교황 생태 회칙 <찬미 받으소서> 후손들에게 지구 최후의 날을 물려 줄 것인가?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5-12-12 20:10:51    조회 : 455회    댓글: 0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1>

제4장 - 통합의 생태 ④세대 사이의 정의와 세대 안의 정의
2015. 12. 13발행 [13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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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내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필자의 고교 시절 학생 동아리 이름이 YTT(Yesterday, Today, Tomorrow)였는데, 너무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의리를 끝까지 지키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용을 확장해서, 회칙은 이를 ‘세대 사이의 연대’라고 부르며 이 연대를 ‘정의의 기초 문제’로 다룬다(159항 참조).

이 가르침은 교종의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겁게는 역사라는 실재라 할 수도 있겠다(79항 참조). 인류 역사의 무대에는 희망과 고뇌를 안겨주는 사건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시간과 과정). 특정 권력이 그 역사의 과정을 묶어둘 수도 없을뿐더러 조작하려는 것은 억지며 역리다(공간과 권력).

우리는 오늘 어떤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가?(160항 참조). 혹시 내일은 내 삶과는 무관하니까 오늘 모든 것을 다 써버리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가계부채와 함께 공공부채라는 것이 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공기업이든 정치 공동체가 빚을 내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빚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일시적 위험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내일을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오늘 진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오늘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자연스럽게 내일로 그 상환을 연기할 것이다.

그런데 연기했는데도 그 빚과 이자를 갚을 뾰족한 대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또 빚을 내서 생활하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채권자가 무작정 연기해주지 않을 것이고 다른 데서 빚을 얻어 올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부도라고도 하고 파산이라고도 하며 신용불량이라고도 한다. 만일 오늘의 우리가 빚을 내어 생활하고, 그 빚을 내일의 세대에게 갚으라고 한다면? 그것도 처분하여 갚을 담보물도 없다면, 내일의 세대는 오늘의 세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돈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연이든 사회든, 내일의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실재다. 좋은 것을 물려줄 수도 있고, 해로운 것을 물려줄 수도 있다. 교종은 공동선의 원리가 내일의 세대에까지 연장된다고 밝히면서 그 사례를 든다. “세계적 경제 재앙들은 우리가 공동 운명을 무시했을 때 반드시 유해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159항).

우리의 경우는 너무나 생생하다. 1997년 당시 정부는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IMF(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IMF 구제금융을 수용했다. 그 후 누군가는 ‘국가’ 경쟁력이 높아져 ‘선진국’ 대열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시민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회칙 제1장 Ⅳ 참조)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회칙은 말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은 우리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도 귀속되어 있다”(159항).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순전히 실용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보아, “효율성과 생산성과 개별적 혜택”에 맞추어 이용하려 든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4대강 사업,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 케이블카 건설 따위가 다 그렇다. 그 같은 오늘의 우리 사업에서 “이 세상은 우리가 거저 받아서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 할 선물”이라는 태도는, “환경은 각 세대에 하느님께서 빌려주신 것이며, 그 빚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것”이라는 자각은 찾아볼 수 없다.

후손들에게 지구 최후의 날을 물려 줄 것인가?

회칙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을 이제는 더 이상 경멸하거나 빈정거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다가올 내일의 세대에게 엄청난 폐허와 황무지와 오염을 남겨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비와 낭비와 환경 변화 속도는 이미 행성의 한계 역량에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도 지속시킬 수 없는 우리의 현재 생활양식은 파국들을 재촉할 뿐입니다”(161항).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과 ‘파국들’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교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원인을 ‘근대 이후 세상 사람들의 광포한 개인주의의 모험’ 때문이라고 말이다. ‘즉각적 욕구 충족’에만 몰두하고, ‘미래(내일) 세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오늘)우리의 무능력’과 ‘발전에서 배제된 이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이다(162항 참조).

그래서 회칙은 “미래의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적 약자도 기억하자”고 호소하면서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급박한 도덕적 요구라고 가르친다. “이 지상에서 그들의(오늘의 사회적 약자의) 인생은 짧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공정한, 세대와 세대 사이의 연대 의식과 함께 같은 세대 내의 쇄신된 연대 의식이라는 도덕적 요구의 급박성이 대두됩니다”(162항).

회칙은 ‘생태’를 단순히 ‘자연 환경’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환경,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갖고 있으며, 인간 존엄함과 공동선의 원리와 재화의 공동목적과 공동사용권의 원리, 그리고 세대와 세대 사이의 정의와 연대와 세대 안의 정의와 연대의 원리가 모두 작동하는 그런 ‘통합의 생태’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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