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게 아니다 반성이 필요한 '이신칭의론'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1-12-15 16:59:09    조회 : 171회    댓글: 0

루터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바로 옆에서 친구 한 명이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루터는 그 일을 계기로 사제의 길을 걷는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로마 교황청이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부패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의 가슴에 거룩한 분개가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칼리 산타라는 계단을 올라가던 중 갑자기 로마서의 말씀이 섬광처럼 루터의 심장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때부터 그는 종교개혁을 결심하고 로마 가톨릭이 잘못하고 있는 속죄부 판매를 비롯한 모든 악행과 관습을 일일이 지적하고 나섰다. 총 95개 조항의 폐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붙였다고 한다. 물론 다소 다른 이견도 있다. 여하튼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물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멋있게 해석하고 역사를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그게 본래 성경의 원의에 어긋난다면 우린 헛된 가르침을 따르는 게 된다.

 

'믿음'이 아니고 '성실'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는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하여진다"는 뜻으로 죄인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과 구원을 받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에 등장한 구호로써 개신교 신학의 근간이 되는 용어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래 이 구호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구약 하박국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여진 구절임을 보여준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

본래 이 구절의 히브리 원어 '에무나'는 믿음이 아니라 신실, 성실, 또는 정직이란 뜻의 단어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용어이고 그 본문은 단지 교만한 자의 정직하지 못함에 대비하여 의인은 정직하거나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의미다. 이는 문맥상으로 보아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 서술된 에무나란 단어는 "무엇을 믿고 안 믿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단어는 애초부터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실제 구약 어디에도 에무나가 '믿음'의 의미로 쓰여진 곳은 단 한 구절도 없다. 항상 신실 또는 정직의 의미로 서술되었다. 그래서 하박국 본문에 대한 바른 번역은 "의인은 그의 성실함(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가 옳다.

 

에무나는 "믿고 안 믿고"와 전혀 무관한 단어

하지만 사실 루터가 이런 오해를 하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헬라어로 기록된 사도바울의 로마서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피스티스)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전술한 구약 하박국서를 인용한 바울의 이 서신은 헬라어로 쓰여졌는데 에무나를 대신한 헬라어 단어 '피스티스'가 문제의 발단으로 보인다. 바로 아래의 구분처럼 히브라어와 헬라어 단어가 지닌 의미의 폭이 서로 달라서이다.

-히브리 원어 "에무나": 성실, 신실(구약 원문)
-헬라어 원어 "피스티스": 신실, 충성 + 믿음(인용된 신약 원문)

즉 구약 히브리 원어 에무나에는 '믿음'이란 의미가 없지만 그것을 인용한 신약 헬라어 단어 피스티스는 '믿음'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언어와 문자의 문제다.  

아무튼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이런 언어적 문제가 더욱 크게 나타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신학은 인간 행위의 자랑이나 공적의 위대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진 선물임을 바울은 에베소 편지에서 강력하게 말한다(“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리고 이러한 칭의론이 개신교 신학에서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실종된 구약의 진리

결론을 요약하자면, 구약 하박국서의 '성실(에무나)'을 신약의 바울은 '믿음(피스티스)'으로 바꾸어 해석했다. 그건 로마서는 물론 바울의 다른 서신들 전체의 문맥을 보아도 확실하다. 바울은 성실, 신실, 또는 정직을 칭의론에 직접 연결하여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 늘 믿음을 칭의론에 연결했다.

그 바람에 구약 하박국서의 위대한 계시인 "의인은 그의 성실함(에무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란 진리가 실종되었다. 아울러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극소수가 되었다.

학문이 천박한 나는 이런 변개가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아니면 사도바울 개인의 실수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허나 개신교는 이런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만날 믿음만 강조할 줄 알았지 신실하고 정직한 행위나 실천의 중요성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그러니 믿음 좋다는 어떤 목회자들이 툭하면 교회를 사유화하고, 헌금을 유용하고, 표절하고, 성추행하고, 그리고 세습하는 일이 발생해도 교인들이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는 기막힌 실정이다.  나는 이런 현실에 깊은 반성과 아픔을 느낀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의인은 그의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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