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활동의 목표 설정과 결과 도출 위해서는 전반적 맥락과 윤리적 한계 끊임없이 재고해야
가야 할 목적지와 경로를 분명히 알면 그 걸음이 편안하다. 새삼 무수히 많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비록 거친 도시 환경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간판 속에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나치는 사람의 얼굴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다. 도로 위의 위험스러운 장애물을 볼 수도 있다. 비도시의 한적한 길이라도 길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새삼 눈길을 줄 수 있으며,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몸만 편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가야 할 목적지와 경로를 모른다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은 불편하고, 마음은 불안하다. 그러다가 십자로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불편과 불안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정표마저 없다면….
회칙은 이 시대를 그렇게 이정표 없는 ‘십자로’에 비유하고 있다(102항). 그 ‘십자로’ 앞에 서 있는 인류의 당혹감(불안)의 심각함을, 제3장의 제목처럼, ‘생태적 재앙’으로 기술하며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거듭 확인해야겠다. 회칙에서 말하는 ‘생태’(ecology)는 ‘자연환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필자의 짧은 경험에서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자연’과 ‘생태’를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회칙이 오늘날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한 ‘환원(축소)주의’라 할 수 있다. 그 같은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지구촌 체계가 안고 있는 진짜 문제들과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못 보게) 가리는 것”(111항)이라 할 수 있다. 회칙 1장에서 밝힌 것처럼, 생태는 하나의 ‘공동 가정’이다. 그 가정에는 대기, 물, 땅과 다양한 생물, 사람, 사회, 그리고 지구촌 자체가 서로 결합하여 상호 의존 및 상호 작용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실재(reality)다.
그러니 오늘날 공동 가정이 직면한 ‘생태적 재앙’이란 자연환경의 훼손 정도로 축소해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공멸의 위기에, 곧 가정 자체가 파멸될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칙은 묻는다. 어쩌다가 이 ‘공동의 가정’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회칙은 그 직접적 원인을 “지난 2세기” 동안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감행한 “기술적 무모함”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무모함을 감행하게 된 ‘근본적인 무엇’을 제3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오해해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이 있다. 회칙 1장과 마찬가지로 3장은 생태적 재앙(증후군, symptoms)과 그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기술적 무모함’(102항)과 ‘무차별적이며 일차원적인 기술주의의 패러다임’ 추종(106항)을, 그리고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왜곡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고발하고 폭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회칙이 밝히고 있듯이, 교종은 소극적으로는 “변화의 (급)속도”를 줄이자고,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실재들’(realities)을 보자”(114항, 116항)고 제안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회칙은 “윤리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폭넓은 토론”을 촉구하고 있다. 그 토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다음의 인용은 분명히 보여준다. “생태의 문화가 오염, 환경적 부패와 천연자원들의 고갈이라는 당장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일련의 부분적 응급 대응들쯤으로 환원(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태의 문화에는 사물을 보는 차별화된 방식, 차별화된 사고방식, 차별화된 정책들,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 차별화된 생활방식과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111항). 교종은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로 나서자고 호소한다(114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