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3>

작성자 : 마태오    작성일시 : 작성일2015-12-27 08:11:11    조회 : 449회    댓글: 0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②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야기할 비극들을 몸소 겪어야 할 사람들은 (곧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는) 이런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169항).

 

‘지난 세기 중반’부터 우리는 ‘하늘과 땅과 물과 뭇 생명’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연 환경의 악화가 무수한 사람의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사회를 고장 나게 했고,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으며, 그 범위가 지구촌 차원으로 확산되었음을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된 덕분에(?) ‘이성과 지성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강하게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이 행성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며, 인류는 하나의 공동 가정에 살고 있는 한 백성”이라는 확신이다. 또 “지구촌 차원의 환경 및 사회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몇 나라만의 이해 관계”가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하나의 공동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다(164항 참조).

이 고통스러운 자각(19항 참조)은 ‘시민 사회’의 ‘대중적 토론과 헌신적이며 활발한 응답’을 이끌어냈지만, 세계 공동체의 ‘정치 및 경제 영역’에서는 그 대응 방식과 시의성에 있어서 시민 사회의 열망을 거의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165항 참조). 예를 들어, ‘1992년 리오 데 자네이로 지구 정상회의’는 ‘생태계를 돌보기 위한 국제적 협력’과 ‘오염 유발자의 비용 부담 책무’와 ‘환경 충격 평가의 의무’ 등을 명문화했다. ‘지구 온난화’ 추세를 되돌리려는 노력으로 ‘온실 가스의 대기 집중을 제한한다는 목표’를 설정했고 ‘생물 다양성에 관한 행동 계획을 갖춘 의제’를 채택했으며, ‘삼림에 관한 원칙’도 밝혔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일부 분야에서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 성적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협정 이행 감시 장치’와 ‘정기적 조사’와 ‘협정 불복종에 대한 제재 수단’ 같은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아직까지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7-169항 참조).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원인, 곧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교종은 ‘공동의 책임’과 함께 다음과 같이 ‘차등의 책임’을 분명히 밝힌다.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구촌 차원의 공동선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울 정도로 ‘보다 더 힘이 세고 [지구를]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일까?(169항)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조사하면 다 나온다.’

회칙의 언어를 빌면, 이들 나라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하며 무책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종은 이를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그 실패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 말을 만든다면, 일종의 ‘역차등의 고통’이 발생한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문제들”이 야기할 비극은 누가 더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있는가? “오늘날 국제 공동체에서 벌인 토의에서 우리가 경솔하게 미뤄놓았고, 그에 따라서 우리가 초래한 나쁜 결과들”의 고통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 오늘날 사회적 약자이며, 내일의 세대다. 그래서 회칙은 단호하게 경고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수 있으며, ‘부정직과 비겁함과 무책임과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169항 참조). 일부 진영에서 교종을 격렬하게 비난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일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차별적 언어가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말이다. 흔히 경제적으로(물질적으로) 앞선 나라와 뒤쳐진 나라를 지칭한다. 그러면서 일부는 그 ‘선진국’을 동경하고 그 ‘후진국’을 무시한다. 그 나라 국적의 시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동경하고 닮으려 하는 그 ‘선진국’ 가운데 일부 나라는, 회칙의 문맥을 따르면, ‘정신적 도덕적 후진국’이라 부를 만하다.

회칙은 경고에 그치지 않고 경계와 고발로 이어진다. 그대로 옮겨놓는다. “‘탄소 배출권 거래 전략’은 새로운 형태의 투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투기는 세계 차원에서 오염 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전략은 일종의 ‘환경에 대한 책임이라는 가면’을 쓴 것일 뿐이며,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전략은 단순히 일부 나라들과 영역들의 과소비 유지를 허용하는 술책이 될 수 있습니다”(171항). 그런 전략들은 겉으로는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 나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 있다. ‘산업화된 나라’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나라들과 사회적 약자를 ‘궁지’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170항 참조).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투기와 가면과 술책은 언제나 ‘더 나쁜 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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