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과학과 과학기술 : 창의성과 권력 기쁨과 흥분, 위험과 공포와 극단의 모험 사이에서
대중매체가 특정 기업들의 새로운 상품이 출시될 것이라는 예고 기사를 내보내고, 출시일이 되면 전날부터 매장 앞에서 밤을 새워 기다린 이들을 화면으로 내보내고, 그다음에는 전 세계에 걸쳐 그 신상품이 얼마나 팔렸는지를 생생하게 강조하며 보도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 상품에 담긴 새로운 기능들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다. 이 자리에서는 언론사인가 특정 기업의 홍보실인가를 따지는 일은 제쳐놓자. 하여튼 그렇게 ‘신상품’ 곧 ‘변화’는 세상을 휩쓸 기세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일부 사람들은 열광한다. 사실 기뻐하고 흥분할 만한 변화가 얼마나 많은가? 그 변화의 영역과 규모와 속도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앞에 소개한 사례는 ‘정보통신’ 분야의 ‘휴대용 단말기’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경우, ‘국민건강보험제도’ 덕분에 쉽게 병원을 찾는다. 대도시의 대형 병원에는 ‘여기 아픈 사람은 죄다 모였네!’할 정도다. 그곳에서도 붐비는 정도로 절대 뒤처지지 않을 곳이 아마 ‘진단방사선과’가 아닐까 한다. 핵 기술을 ‘의료’ 분야에 적용한 결과다. 전국 어디에서나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발달한 대중교통수단 덕분일 터이다. 특히 고속전철과 지하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속도에 대해서 어르신들의 놀라움은 혀를 내두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핵 기술을 ‘전력 생산’ 곧 ‘산업’ 분야에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인류는 핵 기술을 ‘평화롭게’ 이용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교종은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변화 물결이 일어난 지난 2세기의 수혜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발전을 기뻐하고 그 발전이 우리 앞에 계속해서 펼쳐놓고 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흥분하는 것은 정당합니다”(102항). 물론 과학과 기술이 “제대로 된 지도를 받을 때”(103항)와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이 있을 때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렇게 기뻐하고 흥분할 수만 있을까? 정보통신 분야와 핵 산업 분야를 예로 들었으니, 그 ‘치명적 부작용(?)’을 살펴보자. 공교롭게도 다른 대형 사건으로 묻혔지만 한동안 온 사회를 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 막강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이때 개입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정보통신기술’이었다. 심지어 이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권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다룬 책까지 나왔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감시사회’라고 부른다. 교회는 ‘뉴스 미디어’를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들이 조종하거나, 여기에 통치활동과 금융, 정보기관의 유착까지 더해지면 ‘전체 민주주의 제도’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14항).
전 지구를 공포에 몰아넣었고, 사람들은 잊고 지내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며 그 악영향을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건이 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 어느 기업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다. 그때 언론에 ‘안전 신화’라는 말은 빠짐없이 등장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도시 상공 500m에서 폭발시켜 한꺼번에 무려 20여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핵폭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인류를 ‘공포’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정보통신기술이든 핵 기술이든 인간의 창의성으로 만들어낸 과학과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산물”(102)이다. 그런데 “이 분야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그 지식과 재능을 이용할 경제적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막강한 권력”이 “극소수”의 손에만 쥐어졌다면, 게다가 그 “막강한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보장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면, 그래도 마냥 기뻐하고 흥분할 수 있을까? 교종은 인류가 과학과 과학기술을 갖고 이처럼 “극단의 모험”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104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