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8.
경제 성장과 발전,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2016. 01. 31발행 [1350호]
경제 성장과 발전,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경제는 효율성만을 내세우는 무차별적이며 획일적인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수익 극대화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 세대에 떠넘길 상처를, 즉 환경에 입힌 손상을 반성하기 위해 스스로 발걸음을 멈출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 과연 현실주의적입니까?(190항)
한국 천주교회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았지만, 사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교회 안팎에서 신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전문가들은 세계적인 경제 전문 잡지나 방송을 통해서 그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회칙이 발표되던 날 미국 공화당은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교종을 비판했다. 그들이 교종을 신경질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바로 오늘날 세계 질서를 선도하고 있는 ‘체계(system)’와 발전 모델과 도그마 자체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한 절대 지배권을 행사한 신자유주의(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금융)자본주의 경제체계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그들에게 교종의 도전은 “특정 이해관계(집단)들이나 특정 이념들이 공동선을 손상시킨다”(188항)는 고발로 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완성을 위한 대화에서의 정치와 경제’(189 ~198항)라는 소제목에서 이미 엿볼 수 있듯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와 경제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정직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는 경제에 복종”했으며, “경제도 효율성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했다(189항). 그에 따라 발생한 극단적 사례가 바로 ‘2007~2008년의 금융 공황’(189항 참조)과 같은 사태와 정치 자체에 대한 악평과 불신이다(197항 참조). 건전하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대가를 “환경과 가장 약한 사람들”(198항)이 극단의 고통으로 치러야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경제체계에 대해 회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미래라고는 없고 새로운 재앙을 잇달아 불러일으킬 뿐이며, 그 재앙의 회복은 더디고 치러야 할 희생은 막대하고 그 회복마저도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한 금융체계의 절대 권력”, “우리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구시대의 쇠퇴한 기준들”, “환경에 불필요한 충격을 가하며, 역내 경제들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생산 [방식]”과 “더 많은 거품을 내려는 금융 거품”(189항). “시장이 마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식의 개념”, “오로지 수익 극대화만 꾀하는 곳”(190항). “존경할 만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더욱더 천박한 일”(192항).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연출된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성장”(193항). “경제의 불량 기능과 그릇된 적용”과 “지나간 자리에 더 나은 세상과 더 높은 수준의 통합적 삶의 질이라는 흔적을 남길 수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 발전”과 “사회와 환경에 대한 기업들의 책임”마저 “일련의 마케팅과 이미지 제고의 수단들로 환원시키는 방식”(194항). “수익 극대화의 원리”가 초래한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윤리적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는 경제 활동(195항).
사실 “전체 체계의 철두철미한 개혁과 재검토”를 위한 “새로운 길들을” 닦을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189항), 우리는 (경제와 정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융의 거품은 더 많이 나도록 했고, 실물 경제에 대한 열정은 식게 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점점 더 강렬하게 실물시장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기업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중소기업은 무너지며 고용의 기회는 바늘구멍보다 작아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기저기서 ‘지속 가능한 성장’에 관한 구호는 무성하다. 그러나 회칙은 이를 두고 “생태의 가치들과 언어들을 금융과 과학 기술주의의 범주들 안에” 흡수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핑곗거리를 내놓는 한 방식”일 뿐이라고 비판한다(194항).
한마디로 회칙은 지금의 경제 체계와 발전 모델 자체(실재)와 그것을 떠받치고 이끌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재검토와 철저한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환경은 시장의 힘들로는 적절하게 보호하거나 증진시킬 수 없는 재화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90항). 그리고 “합리적인 한계를 둠으로써,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걸어온 발걸음들을 거슬러 올라가 조사함으로써 성장 억제와…후퇴 성장까지도”(193항),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191항)까지도 검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진보(발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다시 정의해야 하며, 지구촌 차원의 현재의 발전 모델을 바꿔야” 한다(194항). 경제는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하며 창의력과 진보에 관한 이상들을 끌어내는 ‘개방성’을, 상이한 가능성에 대한 개방성을 갖춰야 한다(191항).
우리의 경제를 성찰한다. 경제는 사람과 사회의 삶의 질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자연 환경과 사람과 사회를 경제의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눈만 뜨면 외치는 ‘성장’과 ‘발전’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분명히 경제는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그만큼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