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받으소서 - 해설 34 그리스도교 영성, 사회.정치적 사랑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6-03-22 08:17:19    조회 : 429회    댓글: 0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제6장 - 생태 교육과 영성 ④그리스도교 영성, 사회·정치적 사랑

 
2016. 03. 20발행 [1356호]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부도덕했고, 윤리와 미덕과 신앙과 정직을 충분히 조롱했습니다. 경박한 피상성이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왔습니다”(229항).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을 것이다. 마치 물과 공기가 모든 생명체의 유지와 성장에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그 공기와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자연 생태계가 재앙을 맞고 있듯이, 사랑 역시 왜곡되거나 그 가치가 축소되어 사회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랑을 친밀한 육체적 관계로 국한하거나 단순히 타인을 위한 [개별적] 행동의 주관적 측면에 한정시킨” 탓이라 할 수도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혹은 교종의 회칙이 극복해야 할 오늘날의 문화로 꼽은, ‘건전한 윤리와 도덕’을 동반하지 않은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와 ‘공리주의’가 낳은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생태 전환을 도모하려는 대화에서, 회칙은 ‘사회·정치적 사랑’이라는 교회의 영성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교회는 진리와 자유와 정의와 함께 사랑을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로 제시하는데, 특히 사랑이 “사회 윤리 전체의 가장 높고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204항 참조). 사랑을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우리의 태도와는 너무 다르다.

첫째, 교회의 영성에서 사랑이 사회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우주적 형제 관계’에 대한 확신과 ‘우주적 형제애’에의 소명(부르심) 때문이다. 우리 공동의 가정은 공동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무상의 호의로 창조하셔서, 인류에게 가꾸고 돌보라는 책임을 맡긴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 가정에서 인류는 서로 형제이며 누이다. 게다가 뭇 생명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바람과 태양과 구름”조차도 이 가정에서 한 가족을 이룬다(228항 참조). 이 가정에서는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나’의 이기적 욕망에 따른 ‘소유와 지배와 오남용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가족이다.

우주적 형제애는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모든 행동”으로, 곧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의 헌신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이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과 경제적 관계들과 정치적 관계들이라는 거시적 관계들에도” 영향을 주며, “더욱 큰 규모의 전략들을, 곧 환경의 타락을 중단시킬 전략들을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 스며들게 할 ‘배려(돌봄)의 문화’를 촉진할 전략들을 마련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230항).

둘째,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사랑이 정치적인 차원을 갖는 근거는 ‘공동체 차원의 행동’, 곧 ‘연대’에의 소명 때문이다. 사회는 “공동선을 증진하고, [자연과 사회] 환경을 수호하는 일을 수행하는”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의(공동체의) 활동’을 통해서도 풍요로워진다. 이 공동체 차원의 활동은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며, 공유의 정체성과 기억되고 전승될 수 있는 이야기와 함께 연대의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 이 연대를 의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의 공동 가정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차원의 행동들이 공동선에 ‘헌신하는 사랑’을 곧 연대의 의식을 드러낼 때, ‘강렬한 영적 경험들’이 될 수 있다(231항 참조).

우리의 교회 생활을 성찰한다.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궁핍하고 곤궁한 이웃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의 계명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에게는 대안의 관점과 예언자적이며 관상적인 삶을 드러낸 공동체의 활동이 있었다. 이 땅의 초대 교회의 생활이 그것이다.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 삶이기도 하며, 언제나 기억하고 전승할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오늘의 우리 교회와 교회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사회·정치적 사랑’은 그 용어조차 우리 교회와 교우에게는 매우 낯설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니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이 먹을 것을 갖지 못 했느냐고? 물으니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헬더 카마라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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