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의 판이 바뀌고 있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1-08-11 17:29:12    조회 : 204회    댓글: 0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7월14일 수백명의 비정규직 청년이 건강보험공단 상담사들의 정규직 전환에 연대를 표명한 데 이어 35개 청년단체가 지지 선언을 했다. 지난 6월에 서울대 청소노동자분의 사망 후에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이 결성되어 제도와 인식의 근본적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4월엔 인권·여성·노동·기후 등 21개 청년·학생단체가 허구적 세대론에 항의하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시국선언을 했다.

이런 행동들은 개별적·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난 10여년간 한국 시민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장대한 변화의 물길을 따라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일각에선 과거 영향력 있던 시민단체들이 이제 예전 같지 않다며 한국 시민사회가 쇠락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90년대에 인식이 머물러 변화를 못 본 결과다. 2000년대에 시민사회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확장된 생태계에서 과거 단체들의 위상이 바뀐 것뿐이다.

첫째,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행동들이 계속 분출됐다. 몇가지 예만 들자면 2018년에 본격화된 ‘미투’ 캠페인은 이후 새로운 세대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배경엔 2016년 ‘강남역 10번출구’ 추모행동 같은 전환점들이 있었다. 2013년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캠페인은 국내외의 많은 주목을 끌었고, 2011년엔 반값등록금 운동이, 2010년엔 무상급식 운동이 정치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둘째, 대규모의 네트워크형 시민정치행동이 일반화되었는데, 촛불집회가 그 대표 사례다. 촛불문화제가 시작된 것은 2002년 미선·효순 추모 집회였는데, 그 후 2004년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2008년엔 이명박 정부의 시장화·사유화 정책 반대, 2014년엔 세월호 참사 추모, 2016~17년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등이 이어졌다. 이 정도 규모의 대중행동이 이렇게 반복해서 터져 나온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셋째, 대규모 집단행동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는 시민들의 일상적인 참여 경험과 단체 설립이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는 점이다. 세계가치조사의 2017~20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집회, 청원, 서명운동 등 정치사회적 참여 경험자의 비율이 비서구 사회 중에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을 뿐 아니라, 온라인상의 참여행동 경험은 서구 나라들을 포함하여 전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활발했다.

넷째, 한국은 집단행동은 뜨겁지만 조직된 시민사회가 허약하다는 오래된 평가에도 이제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임현진·공석기의 분석에 따르면 1980년대에 설립된 한국 시민사회단체 수가 538개에 불과했다면 1990년대엔 1662개, 2000년대엔 5902개로 급증했다. 2010년대의 경우, 행정안전부 통계에 의하면 2012년에 등록된 비영리단체 수가 1만889개에서 2019년에는 1만4699개로 크게 증가했다.

이 같은 시민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특징들이 있다. 첫째, 청년 주체 사회운동이 급성장하고 있다. 세대적 정체성에 집중한 협의의 청년운동이 아니라, 청년들이 노동·주택·젠더 등 전 사회적 의제의 증폭을 주도하는 운동들이다. 둘째,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지역 기반의 비공식 소모임, 협동조합, 이슈 중심 네트워크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셋째, 시민사회 생태계의 탈중심화가 계속되고 있다. 강력한 자원과 역량을 가진 조직보다는 수많은 작은 단체들이 전체 판을 키운다.

이런 변화의 바로 이면에서 새로운 문제가 부상하기도 한다. 신생, 소규모, 지역 기반 단체들의 인적 재생산과 재정적 지속가능성 문제, 탈중심적 생태계에서 시민사회의 역량 결집 과제, 민관협력 관계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정체성 위기 등이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거시적 수준에서는 시민사회의 총량이 커지고, 밀도가 촘촘해지고, 젊은 참여자들로 열기가 높아지고 있지만, 미시적 수준에서 보면 탈중심화된 판의 구조 안에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는 소규모 그룹들은 홀로서기만으로 재정과 맨파워, 콘텐츠, 정치적 독립성, 사회적 영향력에 큰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금 한국 시민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이 새로운 주체들이 촛불집회와 같은 일시적 집단행동을 넘어서, 더 견고하게 서로 연결하고, 연대하고, 힘을 결집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사회의 문화적 코드와 제도정치의 문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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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7128.html#csidx392aa454a7fb7088c7c6f709d24245b onebyone.gif?action_id=392aa454a7fb7088c7c6f709d2424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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