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과 인문운동의 결합 희망소식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10 17:33:49    조회 : 183회    댓글: 0


협동조합과 인문운동의 결합  희망소식  

2013. 7. 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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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협동조합 주간을 맞이하여 완주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에서 주관한 강연에 발표한 원고입니다.

요즘 협동조합과 마을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열기가 뜨겁습니다. 마을운동만 하더라도 과거 절대빈곤에서 탈출하던 시기에 일어난 새마을운동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됩니다. 반세기 전의 새마을운동도 지금의 마을운동도 행복을 위한 것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그 성격과 질이 다른 것이지요. 
 

우리는 그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대단히 빠른 기간에 달성한 개발도상국 가운데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과를 달성하였습니다.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을 바라보고, 평화적 정권교체도 정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행복도는 세계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양극화, 실업, 고용 없는 성장 등이, 민주화라는 점에서는 정치 제도적 민주화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으나 의식(意識)과 관행 그리고 삶 속에서의 민주화는 아직도 후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괴리현상이 그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외피(外皮) 속의 내용을 진보시켜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협동조합운동과 마을운동이 크게 주목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로 협동조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만, 마을운동도 그 본질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경향각지에서, 또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 협동조합 바람을 보며 저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사실 20년 이상 이런 꿈을 꾸어 왔거든요. 그러나 한편 기쁜 만큼 걱정 또한 많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이 때 어미 닭이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병아리가 스스로 쪼아서 나오는 것이 주(主)가 되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어미 닭이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쪼아주는 것이 보조(補助)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줄과 탁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면 병아리가 탄생할 수 없습니다. 나온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닭으로 자라기 힘들게 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동업한다고 하면 말립니다. 괜히 좋던 사이마저 망가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협동조합법에 의해 만들어질 수많은 조합들은 이 동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관(官)의 성과주의와 민(民)의 지원기대심리가 만나는 것은 협동조합으로 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성공 가능성도 없거니와 설령 일시적으로 성립한다고 해도 지속적 생명력을 갖기 어렵거나 변질되어 괴이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협동조합에 대한 높은 관심과 열정들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두레와 계 같은 우수한 협동체를 만들어 온 선조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전통들이 단절된 지가 오래 되어 그것을 바탕으로 하기는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협동조합이 갖는 장밋빛 꿈들은 더 키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꿈들이 상처로 끝나지 않기 위해 이 장밋빛 꿈들의 이면에 있는 함정(바로 동업을 말리는 그것)을 바로 보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가야 합니다. 완전하게 준비한 뒤에 시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완전한 준비는 없습니다. 비록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 대부분 그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연습해 가야할 것인지 그 방향만은 분명히 알고, 또 같이 하려는 분들이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마 협동조합을 함께 하려는 분들은 가치관이 비슷하거나 사이가 좋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함께 하다보면, 공통의 가치관이나 지금까지의 사이좋았던 관계보다 훨씬 실제적인 과제들에 직면합니다. 지금까지 몰랐던(알 기회가 없었던) 다른 구성원들의 결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할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자기만 옳다고 할까?’
‘저 사람은 왜 자기 멋대로 할까?’ 등등...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에게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는 생각들로 서로 힘들어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함정들을 넘어서지 않으면 협동조합은 실패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시스템을 정교하게 해도 해결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협동조합의 선진국들은 나름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의식(意識)과 문화를 꾸준히 구축하여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협동조합적 전통은 매우 약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인문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해보자는 것이 저의 제안입니다.

 

요즘 인문학이 유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지적 욕구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과 결부될 때 저는 그것을 ‘인문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내용을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진화’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증대시키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구체적 전망들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 사이좋게 의사결정하기

 

 

협동조합은 모두 주인입니다. 특히 소규모의 창업적인 협동조합은 평소 사이가 좋던 사람이나 어떤 가치지향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주인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고 그것을 집행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진행하다보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좋던 사이마저 멀어져 버린다면, 끝장입니다. 같이 하다보면 서로의 아집(我執)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연애할 때 모르던 것이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파커파머라는 사람이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갈등은 있게 마련인데, 선택은 결국 둘 중 하나라는 것이지요. ‘부서져 흩어지느냐?’ ‘깨어 열리느냐?’라는 것입니다. 이 깨어 열리는 길이 사이좋게 의사결정 하는 길입니다. 서로 비비고 부딪치면서 자신의 아집이 엷어져, 상대를 향해 마음이 열리는 상태로 가는 것, 그것이 중심의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야말로 협동조합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될까요? 자신과 생각이나 이해(利害)가 다를 때 무조건 양보하고 참아야할까요? 사이좋음과 일치를 위해서... 참고 양보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참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는 것은 일종의 독(毒)입니다. 이 독이 저절로 약(藥)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진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는 바탕에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당연하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떨까요? 나는 여기, 즉 ‘사실은 어떤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아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각(自覺)을 일상화하는 것이지요. 고전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훨씬 고전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공자의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吾有知乎哉? 無知也)”라는 무지(無知)의 선언이나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참된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을 화두로 서구 사회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린 숭산 선사 등이 그 좋은 예(例)가 될 것입니다.

 

현대과학으로 인식의 메카니즘을 이해하면 이 말들은 훨씬 잘 다가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각자의 서로 다른 감각기관과 서로 다른 저장된 정보가 만나서 판단하는 것일 뿐, 사실이나 실제와는 다른(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머리로 자각한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 잘 이해되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내 생각이 틀림없어” 하고 훈습된 상태가 빨리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늘 의식하고, 특히 다른 생각을 만나 힘들 때 이 자각(自覺)을 연습하는 기회로 한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해 갈 것입니다. 처음에는 참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점차 참는 것(忍이라는 毒)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恕라는 藥) 마음의 진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협동조합과 인문운동이 만나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2.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에 의한 적절한 생산력

 

 

협동조합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하더라도 망해버리면 그만입니다. 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동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본령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시장 안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이윤과 경쟁을 동력으로 하는 다른 사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더 큰 비전을 그리며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의 높은 생산력과 소비수준의 근저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는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보니 이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습니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을 넘어서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공자는 이것을 서(恕)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15세기의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이라 부르건 이 서(恕)와 충(忠)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제적인 협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협동이 아니면, 마치 주인 없는 공사처럼 생산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 마음을 연습하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생산력과 직결되는 것이지요. 만일 이것이 잘 이루어진다면 협동조합의 성공은 물론 그 보다 훨씬 더 큰 보너스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곧 자유롭고 풍부한 인간으로 되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자유롭고, 유쾌한 인간 즉 현대의 군자(君子)가 많이 탄생하는 장(場)으로 협동조합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 정신과 물질의 조화 -- 마음도 물질도 풍요로운 삶

 

함께 하다보면, 특히 경제적 사업의 경우 ‘저 사람은 너무 물욕이 강해!’ 또는 ‘저 사람은 지나치게 마음만 강조해!’하는 생각들이 서로를 불편하게 할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물질생활이나 소비욕구 같은 것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 구성원 사이에, 또는 협동조합 간에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업체로서의 기능과 결사체로서의 기능을 둘러싼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로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무엇일까를 함께 찾아가는 인문운동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은 물질의 확보입니다. 물질생활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면 협동조합 역시 존립기반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전되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자본주의의 최대 기여는 인간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하게 하는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만 최대의 문제는 인간소외인 것이지요. 즉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돌려놓지 못하면 개개인의 행복은 물론 인류의 생존이 아니 존속 그 자체가 위험해질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협동조합의 역할이 기대되는 것입니다.

 

 

요즘 ‘단순 소박한 삶’이 하나의 화두처럼 떠오릅니다. 공생공빈(共生共貧 : 같이 살고 함께 가난하기)이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이런 취지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이 되거나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지 않게 되면 보편화하기 힘든 주장으로 비춰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현대적으로 음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즐기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 도(道)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이 정신적, 예술적, 영적 욕구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인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동물계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구들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욕구는 감소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욕구의 질이 변해서 이루어지는 ‘단순 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발적 풍요’인 셈이지요. 아마 자발적 가난이란 표현도 그 뜻이 같겠지만, 자칫하면 참아내야 하는 부자유가 섞일 수 있어서 현대인들의 높은 자유도(自由度)를 생각하면 ‘자발적 풍요’라는 표현이 어떨지... 이렇게 어떤 극단이나 강제도 없이 새로운 ‘(소비)생활문화’가 협동체 안에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비단 구성원들의 삶의 풍요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전환을 위한 인류의 노력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 글 : 이남곡(희망연대 지도위원, 연찬문화연구소 소장)

[출처] 협동조합과 인문운동의 결합|작성자 익산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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