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협동조합학교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9-08-06 16:45:08    조회 : 180회    댓글: 0

영광 협동조합 학교 <1> 
이남곡/ 전북 장수 논실마을학교 이사장
 

 2014년 01월 17일 (금) 11:50:48 영광신문  press@ygnews.co.kr 
 

영광군사회적기업협의회와 여민동락공동체가 지난달 20일 부터 16일까지 세 차례 동안 ‘ 영광 협동조합 학교’를 개최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3,000여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겁다. 무한경쟁과 오직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대안으로, 사회적기업·마을기업과 같이 사회적 경제의 견인차로 협동조합의 성공사례를 3회에 걸쳐 특집으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협동조합이나 마을운동은 인문운동과 결합할 때 그 성공 가능성이 높다.’

 

요즘 협동조합과 마을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열기가 뜨겁다. 마을 운동만 하더라도 과거 절대빈곤에서 탈출하던 시기에 일어난 새마을운동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된다. 반세기 전의 새마을운동도 지금의 마을운동도 행복을 위한 것임에는 다름이 없다. 다만 그 성격과 질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대단히 빠른 기간에 달성한 개발도상국 가운데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을 바라보고, 평화적 정권교체도 정착되었다. 그런데도 행복도는 세계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동업한다고 하면 말린다. 괜히 좋던 사이마저 망가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 그런데 새로운 협동조합법에 의해 만들어질 수많은 조합들은 이 동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 협동조합을 함께 하려는 분들은 가치관이 비슷하거나 사이가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함께 하다보면, 공통의 가치관이나 지금까지의 사이좋았던 관계보다 훨씬 실제적인 과제들에 직면한다. 지금까지 몰랐던, 알 기회가 없었던 다른 구성원들의 결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할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자기만 옳다고 할까?’ ‘저 사람은 왜 자기 멋대로 할까?’ 등등...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에게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는 생각들로 서로 힘들어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 함정들을 넘어서지 않으면 협동조합은 실패한다. 이것은 아무리 시스템을 정교하게 해도 해결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의 선진국들은 나름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의식(意識)과 문화를 꾸준히 구축하여 왔다. 우리에게는 그런 협동조합적 전통은 매우 약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인문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해보자는 것이 저의 제안이다. 요즘 인문학이 유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지적 욕구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과 결부될 때 저는 그것을 ‘인문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저는 그 내용을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진화’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증대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 사이좋게 의사결정하기

협동조합은 모두 주인이다. 특히 소규모의 창업적인 협동조합은 평소 사이가 좋던 사람이나 어떤 가치지향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막상 이 주인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고 그것을 집행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진행하다보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던 사이마저 멀어져 버린다면, 끝장이다. 같이 하다보면 서로의 아집이 들어나는 것이다. 연애할 때 모르던 것이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파커파머라는 사람이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갈등은 있게 마련인데, 선택은 결국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부서져 흩어지느냐?’ ‘깨어 열리느냐?’라는 것이다.

이 깨어 열리는 길이 사이좋게 의사 결정하는 길이다. 서로 비비고 부딪치면서 자신의 아집이 엷어져, 상대를 향해 마음이 열리는 상태로 가는 것, 그것이 중심의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야말로 협동조합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될까? 자신과 생각이나 이해가 다를 때 무조건 양보하고 참아야할까? 사이좋음과 일치를 위해서... 참고 양보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참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참는 것은 일종의 독이다. 이 독이 저절로 약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진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는 바탕에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당연하다.’는 것이 깔려 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떨까? 나는 여기, 즉 ‘사실은 어떤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아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각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고전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은 과학이 발전해서 훨씬 고전을 잘 읽을 수 있다.

공자의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吾有知乎哉? 無知也)라는 무지(無知)의 선언이나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참된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을 화두로 서구 사회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린 숭산 선사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현대과학으로 인식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이 말들은 훨씬 잘 다가온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각자의 서로 다른 감각기관과 서로 다른 저장된 정보가 만나서 판단하는 것일 뿐, 사실이나 실제와는 다른(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물론 머리로 자각한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 잘 이해되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내 생각이 틀림없어” 하고 훈습된 상태가 빨리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의식하고, 특히 다른 생각을 만나 힘들 때 이 자각(自覺)을 연습하는 기회로 한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해 갈 것이다. 처음에는 참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점차 참는 것(忍이라는 毒)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恕라는 藥) 마음의 진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협동조합과 인문운동이 만나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 자기실현의 즐거운 노동에 의한 적절한 생산력

협동조합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하더라도 망해버리면 그만이다. 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동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본령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시장 안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일반적으로 이윤과 경쟁을 동력으로 하는 다른 사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더 큰 비전을 그리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사실 지금의 높은 생산력과 소비수준의 근저에는 ‘경쟁’이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누군 과와는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보니 이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된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여야 한다. 공자는 이것을 서(恕)라고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전념할 수 있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15세기의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 부르건 이 서(恕)와 충(忠)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강제적인 협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협동이 아니면, 마치 주인 없는 공사처럼 생산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 마음을 연습하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생산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잘 이루어진다면 협동조합의 성공은 물론 그 보다 훨씬 더 큰 보너스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곧 자유롭고 풍부한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유쾌한 인간 즉 현대의 군자(君子)가 많이 탄생하는 장(場)으로 협동조합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정신과 물질의 조화--마음도 물질도 풍요로운 삶

함께 하다보면, 특히 경제적 사업의 경우 ‘저 사람은 너무 물욕이 강해!’ 또는 ‘저 사람은 지나치게 마음만 강조해!’하는 생각들이 서로를 불편하게 할 경우가 있다. 특히 물질생활이나 소비 욕구 같은 것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 구성원 사이에, 또는 협동조합 간에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사업체로서의 기능과 결사체로서의 기능을 둘러싼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로 전개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무엇일까를 함께 찾아가는 인문운동이 필요하다.

인간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은 물질의 확보이다. 물질생활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면 협동조합 역시 존립기반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역전되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자본주의의 최대 기여는 인간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하게 하는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만 최대의 문제는 인간소외인 것이요. 즉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돌려놓지 못하면 개개인의 행복은 물론 인류의 생존이 아니 존속 그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협동조합의 역할이 기대되는 것이다. 요즘 ‘단순 소박한 삶’이 하나의 화두처럼 떠오른다. 공생공빈(共生共貧;같이 살고 함께 가난하기)이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이런 취지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극단적이 되거나 진정한 자발성에서 나오지 않게 되면 보편화하기 힘든 주장으로 비춰지기 쉽다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안빈락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을 현대적으로 음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즐기는 것이다. 오늘날 이 도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정신적, 예술적, 영적 욕구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인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이란 동물계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욕구들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욕구는 감소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욕구의 질이 변해서 이루어지는 ‘단순 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 생각한다. ‘자발적 풍요’인 셈이다. 아마 자발적 가난이란 표현도 그 뜻이 같겠지만, 자칫하면 참아내야 하는 부자유가 섞일 수 있어서 현대인들의 높은 자유도(自由度)를 생각하면 ‘자발적 풍요’라는 표현이 어떨지... 이렇게 어떤 극단이나 강제도 없이 새로운 ‘(소비)생활문화’가 협동체 안에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비단 구성원들의 삶의 풍요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전환을 위한 인류의 노력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http://www.y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1495 출처 : 영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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