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벚나무와 온주감귤’…에밀 타케 신부가 남긴 유산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2-08-03 20:42:44    조회 : 230회    댓글: 0

 뉴제주일보 승인 2022.08.01 19:00  


60. 서귀포 하영올레 3코스(3)

수도원 면형의 집, 과거 홍로본당 있었던 곳
타케 신부, 1902~1915년 주임신부 선교사 활동
제주 식물 1만여 점 채집, 표본 세계에 알려
1911년 포리 신부에 온주밀감 14그루 받아 보급
제주 미장온주밀감 시초…감귤산업 토대 마련

수령 약 250년으로 추정되는 면형의 집 녹나무.
■ 면형의 집
‘면형의 집’은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수도원’이란 긴 이름을 가진 서귀포시 서홍동 204번지에 자리한 수도원이다. 마당으로 들어가 오래된 녹나무 앞에 서면,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은 과거 홍로본당이 있었던 곳으로 성당과 사제관으로 쓰던 건물들이 방치된 채 남아 있었는데, 1959년 당시 서귀포 성당 주임 사제였던 모 로베르트(R. Brady) 신부는 당시 광주대교구장인 현 하롤드(Most Rev. Harold Henry)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 방치된 홍로본당의 관리를 한국 순교 복자 성직수도회에 요청했다. 이에 수도회에서는 1959년 8월 17일 3명의 수사를 파견하면서 수도회 두 번째 분원이 되었다.’

당시 수사들은 밀감농장을 운영하면서 서귀포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담당했다. 수도회에서는 1966년 11월 4명의 수사들을 서귀포 분원에 파견하여 홍로본당 시절의 성당과 사제관 건물을 철거하고 1967년 4월 시멘트 벽돌 성당(건평 35평)과 수사들이 생활할 새 수도원 건물을 완공했다. 

지금의 건물 피정센터는 1973년에 시작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중단되었다가 교황청과 제주교구청의 도움으로 1976년 수용인원 60여 명 규모로 완성된 것이다. 이후 1988년에 중축 수리를 끝내고 1992년에는 1월 5일에 복자회관을 수도회의 창설자 영성용어를 따라 ‘면형의 집’으로 바꿨다. 이후 수도원을 피정의 집 내부로 옮기고 감귤원을 정원으로 조성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면형의 집 표석.
■ 에밀 타케 신부


에밀 타케 신부상(부분).
제주에 온주 밀감을 전해준 다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선교사였다. 1898년 1월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는데, 1906년부터는 선교활동과 식물채집, 교육자 생활을 병행했다. 그렇게 우리나라 여러 곳을 돌며 활동하던 그(한국명, 엄택기)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대구직할시 남산동에 묻혔다. 

다케 신부가 식물 채집을 적극적으로 하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같은 프랑스 선교사인 포리(Faurie, R.P.U)의 영향이 컸다. 포리 신부는 초창기 일본 식물학에 공헌한 선교사로,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1900년대 초 한국 식물분류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타케 신부가 채집한 식물과 씨앗들은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지역과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로 보내졌다. 일본 도쿄대 부속식물원(27종), 미국 하버드대 아널드 식물원(120종), 영국 큐 왕립식물원(97종), 영국 자연사박물관(88종), 영국 에든버러왕립식물원(926종), 프랑스 파리국립자연사박물관(331종) 등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타케티와 컬렉터 타케 식물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에밀 타케 신부의 밀감나무.
■ 왕벚나무와 온주밀감
마당 한켠에는 ‘타케 신부가 전해준 14그루의 온주밀감’이란 표지석과 함께 후계목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당시 홍로성당 주임신부였던 타케 신부는 1902년에 부임하여 1915년까지 이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3년의 선교활동을 하면서 식물 1만여 점을 채집하여 세계에 알리는 식물학적 입적을 남긴다. 

타케 신부는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포리 신부를 만나 식물채집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후, 1908년 한라산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하여 유럽학계에 보고했다. 그리고 포리 신부에게도 왕벚나무 몇 그루를 보내고, 그 답례로 1911년에 온주밀감 묘목 14그루를 받았다. 이것이 제주의 미장온주밀감의 시초가 되어, 서홍동을 중심으로 제주 감귤산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14그루 중 마지막 한 그루는 2008년 9월에 ‘서홍8경’으로 지정돼 관리해 오다가 2019년 4월에 고사되었는데, 정리하여 성당현관에 보존 중이고, 옆에 있는 나무는 그 고사목과 60년을 함께 지낸 나무로서 후계목으로 부르고 있다. 왕벚나무뿐만 아니라 제주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 구상나무도 그에 의해 널리 소개되었다.

면형의 집 마당 건물 앞쪽에는 엄청난 몸집의 녹나무가 한 그루 있다. 줄기에 석위를 비롯한 송악, 일엽초 등이 가득 돋아났다. 높이 약 16.5m, 가슴둘레 약 3.9m라 하나 아래서부터 뻗은 굵은 가지들은 더욱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이 나무로 하여 이곳 면형의 집의 무게감을 더해준다. 이 나무는 수령을 약 25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서귀포시에서는 1994년부터 보호수로 지정했다.


산지물 진입로.
■ 동흥천 이음길과 힐링길
면형의 집에서 올레길은 다시 북쪽으로 골목길을 돌아 나와 동흥주공 5단지 아파트 구역을 돈 후 동흥천과 만난다. 그곳에 조그만 쉼터를 마련해 정자를 짓고 돌로 된 탁자와 의자를 마련해 놓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쉼터에서 나오면 중산간동로가 나타나고 횡단보도를 지나 ‘산지물’이란 간판이 붙은 아치형 문을 통과하게 된다. 산지물은 동흥마을 설립 단초가 되었던 용출수로 주민의 식수원이자 생활용수였다. 5월 장마에 천둥이 치고 나면 물구멍이 터진다는 전설이 있는데, 2007년부터는 그 물을 이용해 물놀이 쉼터로 꾸몄다. 

거기서부터 동흥천 천변을 따라 굴왓교를 거쳐 고망물교, 우성빌라, 열린병원까지 약 1.5㎞의 힐링길을 조성했다. 더러는 길에 황토를 깔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마련하고, 먼나무와 수국길을 조성하였다. 힐링길이 끝나면 동흥천을 떠나 서쪽으로 난 골목길을 걸어 중앙로150번길로 중앙로에 나오면, 서귀포고와 서귀중앙여중 앞을 지나 도착점 서귀포시청 제1청사에 이른다.  
*다음에는 서귀포시 서홍동 ‘추억의 숲길’이 이어집니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동흥천 힐링길.

출처 : 뉴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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