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2-02-10 20:50:12    조회 : 198회    댓글: 0

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idg202202090006.jpg오전에 외래가 끝난 후 까만 정장을 한 젊은 부부가 진료실에 들어왔다. 1주일 전에 세상을 떠난 7살 남자 아이의 부모였다. “그동안 우리 아이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재우(가명)가 행복했습니다”라며 돌아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우는 생후 4개월에 처음 만났다. 목을 가누지 못하고 깜짝 깜짝 놀라는 증상이 있었다. 뇌파검사와 뇌자기 공명영상(MRI)검사를 했는데, 뇌의 주름이 잡히지 않는 뇌회 결손(편평한 뇌)이 있으면서, 영아연축으로 진단됐다. 검사 결과와 병의 예후에 대해 설명했는데, 외할머니가 대성통곡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딸 내외가 두 번째 아이를 가지고, 몸이 너무 약해 유산하고자 했으나, 설득 끝에 아이를 출산하게 했는데, 자신의 고집 때문에 딸 내외가 평생을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눈물을 흘렸다. 외래에 올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기에 나는 늘 손수건을 준비했다가 눈물을 훔치도록 건네곤 했다.

앤 헤서웨이와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영화 ‘인턴’의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울고 있는 젊은 여사장에게 70세의 인턴이 손수건을 건네며 했던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빌려주기 위해서야(The best reason to carry a handkerchief is to lend it.)”라는 명대사가 나에게는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지극한 신앙으로 전주의 눈물 흘리는 예수님 상에도 다녀오고, 코소보의 유명한 기적의 현장까지 아기를 데리고 갔다 왔지만, 경련은 어느 정도 조절됐으나, 혼자 서고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난히 겁이 많았던 재우 엄마는 아이를 위해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물리치료와 언어치료 등을 위해 여러 센터를 데리고 다니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혼자서 걷거나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에 재우 외할머니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아 가까운 병원에 왔는데,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그 병원을 가겠다고 하니, 올 필요는 없고, 너무 슬피 울고 있는 딸에게 재우가 엄마의 노력 덕분에 자기 수명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만 해 달라고 해 애기 엄마와 통화를 했다. 나도 재우엄마처럼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없는데, 너무 열심히 돌봐 주셨고, 아이는 천국에 갔을 것이니 이제 놓아주자고 위로했다. 이야기를 건네는 나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배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에는 시간, 때를 나타내는 두 가지 말이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과거-현재-미래로 연속해 흘러가는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인간의 목적의식이 개입된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다. 의과대학 졸업 후에 흘러간 40여 년의 시간이 크로노스였다면, 재우와 같은 환자를 만났던 시간들은 카이로스이다.

환자를 만나고, 그 보호자를 보면서 나 자신이 성숙됐기에 환자와 보호자는 나에게 교과서이자 스승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와 행운의 신’이다. 제우스의 막내둥이 카이로스는 이름에 딱 걸맞은 외모를 지녔다. 앞머리는 풍성한데 뒤쪽은 매끈한 대머리다. 등에 달린 커다란 날개도 모자라, 두 발목에도 날렵한 날개를 달았다. 한 손에는 저울,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었다. 앞에서 다가올 때엔 누구나 쉽게 머리카락을 움켜쥘 수 있지만, 바람처럼 지나가버리면 그만이다. 카이로스를 붙잡는 건 저울로 잰 분별력과 칼 같은 결단이다.

이제 정년을 앞두고 오랫동안 돌봐 왔던 난치성 어린이 환자와 그 부모와 힘든 작별 인사를 하면서, 먼저 보낸 어린 영혼들을 생각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갖는다.

1986년 영화 ‘미션’의 테마 곡인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이탈리아 가사를 붙인 ‘Nella Fantasia(환상 속에서)’라는 노래를 10대 소녀였던 재키 애반코(Jackie Evancho)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발달이 지연되고,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Nella Fantasia의 세상을 전해주고 싶다.

“나의 환상 속에서 난 올바른 세상이 보입니다/그 곳에선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 곳/나의 환상 속에서 난 밝은 세상이 보입니다/그 곳은 밤에도 어둡지 않습니다/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나의 환상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그 바람은 친구처럼 도시로 불어옵니다/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 곳.”

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