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다 있는 것이자 없는 것”…최종태 초대전 ‘구순을 사는 이야기’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1-11-20 18:40:52    조회 : 10회    댓글: 0

예술은 다 있는 것이자 없는 것최종태 초대전 구순을 사는 이야기

 

김종목 기자입력 : 2021.11.17 15:44 수정 : 2021.11.17 23:07

 

초대전 최종태, 구순(九旬)을 사는 이야기의 제목은 작가 자신이 정했다.

조각가 최종태(서울대 명예교수)는 해방되던 해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일제 식민지 백성이라고 하는 걸 모르고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학교에 다닌 거예요.”

 

그는 1932년 생이다. 최종태는 구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예술과 삶에 영향을 끼친 여러 순간을 이야기했다. 1953년 김종영의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나상을 보고 조각을 전공하리라 결심했다.

 

이듬해 미술대학에 입학한 걸 따지면 조각가로 산 지 68년째다. ‘원로대가니 하는 수식이 늘 따라붙는 이는 지금도 예술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지난 16일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기자회견을 연 최종태는 이런 말을 했다. 조각가 최종태가 지난 16일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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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미술) 역사에서 예술은 이런 것이라고 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정답은 없어요.

각자 뭐라고 얘기를 했을 뿐이죠. 답을 내려고 그러면 예술은 없어요.” 가톨릭 신자인

그는 하느님을 본 사람도 없어. 하느님이라는 그 세계는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거예요.

예술도 그렇더라고요라고 했다.

 

최종태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알 수 없음만이 확실했다. 그에게 아름다운 것들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풀과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로 들었다. 유럽에 방문했을 때 미켈란젤로의 작품 등 수많은 걸작을 봐도 감흥이 안 일었는데, 딱 한 번 기둥만 남은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감격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냥 가슴으로 아름다움을 느꼈다. 누가 그걸 해석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40년 전 미국 뉴욕에서 전시 광고를 보고 멕시코시티로 가 마야 조각 특별전을 봤을 때의 감동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떠올린다. “얼마나 좋은지. 느껴야지.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는 거는 모르는 거요.” 그는 아름다움을 모르니, 아름다운 걸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최종태는 마야 조각을 보면서 조각은 모르는 것이라는 한마디가 천둥 치는 것처럼 머릿속에 들렸다고도 했다. 무지는 겸양의 표현만은 아니다. 오랜 공부와 사색, 깨달음의 결과다.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 동양미술사,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작업할 때면 거장들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연필과 조각 도구를 든 손을 부리는 듯했다. 작품을 끝내보면 자신의 작품이 거장들의 그것들과 닮아 있었다. 서울대 미대 은사인 김종영이 특히 그랬다. “(처음에) 내가 저 양반(김종영)을 다 받아들였어. 그걸 벗어나려고 노력했죠. 김종영 선생을 벗어나는 데 20년이 더 걸렸어요. 예술을 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게 스승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였어요. 난관이 많았어요.” 화가 장욱진,

 

스위스 출신 조각가 자코메티도 최종태 머릿속을 늘 헤집던 스승이었다. 세계미술사의 주요 걸작도 맴돌았다. 이 굴레를 벗어나자 그는 아이들처럼 본대로, 맘대로 그리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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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최종태의 말은 선문답의 답 같았다. 예술에 관해 도달한 결론은 다 있으면서 다 없는 것이다. 그는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 법이 있어서도 안 되고 없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며 이같이 답했다. 스승과 거장들, 미술사를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단계에 도달해 내린 말이다. ‘다 있다는 것은 앞선 세계 미술사를 공부하고 생각해야 한다이고, ‘다 없다는 것은 그 뒤 세계미술사와 거장들에게 매이지 않고 그 틀을 깨고 나와 맘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다. 먼저 이해해야 벗어날 수 있다. 앞선 것들에서 도망가서도 안 된다. 그래야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있다. “머릿속이 이제 조용해, 아무도 나한테 간섭을 안 해. 그래서 참 좋아 요새는.” 최종태가 보기엔 추사가 그랬다. 중국 글씨를 다 배운 뒤에 중국인도 감탄하는 독창적인 서체 추사체를 만들었다. 최종태는 배운 것을 버린 결과라고 말한다. ‘글씨를 그림같이 그림은 글씨같이를 실현한 이가 추사다. 최종태는 충청투데이에 연재한 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에서 추사 예서글씨 新安舊家자를 두고 글씨인데 글씨인가 그림인가. 동양 그림인가 서양그림인가. 추상인가 구상인가라며 길고 긴 여운의 매력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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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반에 나침반과도 같은 역할을 한 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다. 최종태는 삼촌이 준 일어판 <레미제라블>을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방학 때면 글이 몸에 밸 정도로 두고 두고 읽었다. “그 일어판 서문에 이와 같은 불쌍한 일이 이 세상에 있는 한 내 소설은 영원히 읽힐 것이라는 위고의 말이 나와요,” 해방 직후에 알게 된 일제 강점기 역사 말살, 해방 이후의 4·19혁명, 박정희 5·16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6·29 선언 같은 격변을 거쳤다. 혼란스러운 시대 와중에 최종태는 삶과 예술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혼돈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통해 인간존재를 성찰하고 영원한 평화로 나아가려 했다.

 

1965년 국보 금동 반가사유상(7세기 전반의 것으로 국보 제83였다)을 본 게 미적 가치와 창작 방향에 영향을 줬다. 그는 한국 반가사유상과 쌍둥이 같다는 평을 듣는 일본 교토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을 두고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한 말 이 불상만큼 인간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반가사유상이 나한테 그 쇼킹한 무언가를 줬어. 그래서 (맑음, 깨끗함, 평화를 추구하는) 길을 가야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최종태는 반가사유상 두 점을 위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사유의 방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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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 ‘악한 사람들이 난무하던 시절 그는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을 그리려 했다. 연민과 자비심을 담아내려 했다. 그 다짐을 오로지 여성의 얼굴로 구현했다. 모델을 두지 않고 그 비전만을 실현하려 했다. 최종태가 남성을 대상으로 조각 작품을 낸 건 손자들 말곤 거의 없다.

 

최종태는 어느 철학자가 자신의 전시회 때 방명록에 적은 여성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라는 말을 오래 곱씹었다고 했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상’(2000)이 최종태의 가치 구현과 실천의 구체적 결과물 중 하나다.

 

시대의 영향을 벗어날 순 없었다. 작품의 얼굴은 한동안 어두웠다. “어두운 시절을 살았는데 어떻게 밝게 하겠어요. 요즘은 밝아졌는데, 마치 긴 깜깜한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아요.”

 

이번 초대전 출품작은 목조·브론즈 조각 42, 드로잉 30, 판화 5점 등 77점이다. 2020·2021년 작품도 여럿이다. 최종태는 정정했다. 보청기를 착용한 것 말고는 건강 이상 징후는 없어 보였다. 최종태는 사람 이름과 읽은 책, 겪은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연도까지 곁들이며 정확하게 말했다. 나이 들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법이 무엇인지 하는 세속적인 궁금증도 일었다. 따로 하는 운동은 없다고 한다. 대신 이런 말을 했다. “요즘에도 자택 작업실에 한 번 들어가면 10시간씩 일합니다. 그게 좋아요. 참 좋아요. 일할 때 즐거움이라고 할까, 기쁨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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