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작성자 : 미리내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09 00:23:27    조회 : 612회    댓글: 0

(1844년 5월 21일 ~ 1910년 9월 2일)


데뷔 1886년 앙데팡당전 출품 특이사항 : 세관에서 24년간 2등 서기로 근무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으로 이국적인 정서를 주제로 다룬 창의에 넘치는 풍경화 ·인물화를 그렸다.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마옌주 라발 출생. 일요화가 소박파(素朴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루소는 1844년 가난한 양철공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세관 하급 관리직에 있다가 49세가 되던해에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1886년 이래 작품을 발표해 오면서도 그때까지 전혀 주목을 끌지 못하던 루소를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이 발견해 내었다. 그는 리마르 중학에서 데상과 성악으로 상을 받은 일 이외에는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학생으로 졸업했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앙제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 연대 음악대에서 복무했다. 후일 멕시코 종군 시절이 꿈에서까지 자주 보인다고 술회한 것은 이 때의 기억이다. 피카소 등의 호의는 단순히 인간미 있는 노화가(老畵家)에 대한 선의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물을 단순화하여, 명확하고 구성적인 구도를 가진 루소의 세계에서 20세기가 필요로 하는 소박함과 입체주의에 통하는 명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만년에 이르러 루소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54세된 과부에게 열렬한 구애(求愛)를 하였으나 매정하게 거절당한다. 그래도, 이 여인을 잊지 못하고 비오는 날 역으로 마중나갔다가 비를 맞은게 화근이 되어 병상에 눕게 되고 급성 폐렴을 일으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

첨부이미지


루소가 죽기 직전인 1910년 마지막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이 그림에서 역시 열대나 정글림은 그에게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꿈은 일상의 현실 이상 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어느 비평가가 왜 정글 한 가운데에 근사한 소파가 있는가를 물었더니 루소는 "여자가 긴 소파 위에 자고 있다 밀림으로 옮겨진 꿈을 꾸고 있기 때문" 이라 답했다. 피카소와 그 친구들이 한판 즐겁게 놀아볼 생각으로 앙리 루소에게 바치는 축하연을 열었을 때, 이들이 루소 그림의 순진성을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이 순박한 화가가 위대한 화가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했을까? 축하연은 1908년 11월 몽마르트르의 바토 라부아르에서 열렸다. 피카소는 바로 얼마 전에 마르티르 거리의 고물상인 술리어 영감 가게에서 단돈 5프랑에 루소의 그림 한 점을 손에 넣자 이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이 축하연을 위해 긴 널빤지로 만든 탁자를 이젤에 받혀 준비해 두었다. 나뭇잎, 수많은 깃발과 초롱, 그리고 '존경하는 루소를 위하여'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로 아틀리에를 장식했다. 이 축하연에는 서른 명이 모였는데, 이 가운데 조르주 블라크, 앙드레 살몽, 미술품 수집가인 레오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이 있었다. 아폴리네르와 팔짱을 끼고 들어 온 마음씨 좋은 루소는 커다란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와 바이올린을 손에 쥐고는 그를 위해 마련된 비누 상자와 의자로 만든 왕좌에 앉았다. 시 낭송이 끝나자 루소는 자신의 자작곡인 [작은 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이어서 그의 애창곡인 [아이, 아이, 아이, 이가 아파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한 단역 배우가 루소를 당시에 가장 명성을 떨치던 화가 퓌비 드 샤반으로 가정하고는 찬사를 바치려고 앞으로 다가왔다. 이때 루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한마디 했다. "나, 그대를 기다렸노라!"

rousseau_myself.jpg
Henri ROUSSEAU, Myself, Portrait-Landscape, 1890


본의 아니게 현대미술계에 데뷔하다 앙리 루소를 아방가르드 모임에 받아들인 사람은 알프레드 자리였다. 라발이 고향인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1894년 앵데팡당전에서 만났을 때, 자리는 스무 살, 루소는 거의 쉰 살에 가까웠다. 이들은 [지상의 낙원]이라는 종교적인 제목이 붙은 루소의 한 그림 앞에서 만났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루소가 자리에게 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탁월합니다!" 자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신지요?" "앙리 루소, 이 그림의 작가인데요....." 루소는 그림을 무척 좋아하는 하급 공무원이었다. 포르트 드 방브에서 파리로 들오가는 차에 실은 물건을 검사하는 세금 납부소의 세관원이었다(그의 별칭인 두아니에는 '세관 관리'라는 뜻). 그러다 미술에 전념하기 위해 조기 퇴임을 했다. 자리는 잡지 '리마지에'에 로소의 석판화를 실었으며, 자신이 갓 창간한 잡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루소에 관한 기사를 여러 번 썼다. 술리에 영감에게 5프랑에 판 [여인의 초상]이 루소의 걸작은 아니다. 이 그림에는 루소의 두번째 아내인 조제핀이 까만색 드레스를 입고 성채가 보이는 열린 창문은 배경으로 서 있다. 당시에 피카소와 동거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이 성채가 스위스의 산맥임을 알아보았다.

rousseau_woman.jpg

Portrait of a Woman
c. 1895 Oil on canvas
160.5 x 105.5 cm
Musee Picasso, Paris


루소는 한번도 원근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명암을 제대로 처리할 줄 몰랐다. 그래서 회화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기능을무시할 수 밖에 없었고, 본의 아니게 현대미술의 현장으로 떠밀려나오게 되었다. 그는 아카데리 화가인 부그로를 열렬하게 찬미했으며, 세잔의 그림을 미완성작으로, 마티스 작품을 "별 볼일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루소의 작품을 자주 접한 로베르 들로네는 그의 타고난 재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캔버스 전체는 탁월한 판단력에 따라 수정하지 않은 단한번의 붓질로 칠해져 있다. 붓질을 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구성하고자 하는 그림 전체를 염두에 두었으며, 일체 수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강렬하고 주의깊은 통찰력은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한다."

첨부이미지


사육제의 밤(1886) 루소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데 밤 하늘에 달빛은 밝고, 검은 나무들의 그림자는 온 사방을 감싸며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사육제에 참가 예복을 그대로 입은 채 두 젊은 연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애틋한 연정을 나눈다. 화면 전체가 검푸른 청색과 검은 색으로 메워져 있기에 하얀 달빛과 남녀의 밝은 색 옷은 더욱 도드라져 청아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아마 이 여자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루소의 첫 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나날의 정겨웠던 추억이 화면에서 스르르 스며나오는 듯하다 첨부이미지


배고픈 사자, 1905 열대 식물을 그린 그의 연작은 걸작으로 꼽힌다. 그 가운데 하나인 [배고픈 사자]는 가장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세로 2미터, 가로 3미터로 가장 큰 작품이다. 야수주의가 탄생한 1905년 가을살롱전에 내놓은 이 작품에는 루소가 무척 좋아하는 서술체의 긴 제목이 달려 있었다. [배고픈 사자가 영양에게 달려들어 뜯어먹는 동안 표범은 자기 몫이 돌아올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육식 새들은 영양의 살점을 잘게 찢어먹고, 이 가여운 짐승은 눈물만 흘린다. 해가 지는 저녁에] 평론가 루이 복셀이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이 사용한 과장된 색채를 보고 "우리에 든 야수"라는 표현을 썼을 때, 아마도 그는 가을살롱전에 이들의 그림과 가까운 전시실에 있었던 루소의 [배고픈 사자]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Image:Henri Rousseau - Exotic Landscape.jpg


이처럼 루소는 열대 밀림에서 표범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자가 영양을 뜯어먹고 두 마리의 육식 새들이 자신들의 먹이를노리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무성한 열대림은 1896년 막시밀리안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원정대를 보낸 기간에 그가 보았던 풍경으로 여겨졌다. 루소는 군복무 기간에 멕시코 원정에 참여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소문은 널리 퍼져서 아폴리네르는 유명한 바토 라부아르의 축제 때 술병이 산더미처럼 쌓인 탁자 한귀퉁이에서 즉흥시를 써 엄숙하게 낭송했다.

rousseau_forest.jpg


루소, 그대는 기억하는가 아스텍 풍경을 망고와 파인애플이 우거진 숲과 원숭이들이 수박의 붉은 피를 뿌리는, 금발의 황제가 처형당한 그곳을, 그대가 그린 것은 그대 멕시코에서 본 것을 붉은 태양이 바나나나무의 이마를 장식하는 곳 용감한 병사 그대는 갑옷을 착한 세관원의 파란 외투를 바꾸었구나. 하지만 열대 연작의 근원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사실 루소는 당시 그가 살고 있던 파리 14구의 플레장스 지역을 벗어나는 모험을 감행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 열대 연작들은 단지 그가 일요일이면 몽환상태에서 자주 방문하던 식물원 에서 나왔을 뿐이다.

Image:Henri Rousseau Mauvaise surprise.jpg


바토 라부아르에서 축하연을 열기 일 년 전에 두아니에로 불리는 앙리 쥘리앵 펠릭 루소는 사기죄로 고소당해 1907년 1월 9일에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예순다섯 살의 루소는 자기 그림 덕분에 여생을 감옥에서 마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루소는 한때 파리 5구의 아마츄어 친선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함께 악기를 연주하던 소바조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찾아와 프랑스 은행이 자기 돈을 떼어먹어 복수를 하려고 하니 서명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씨 좋은 루소는 선뜻 서명을 해주었다. 그 결과 2만 1천 프랑에 이르는 막대한 횡령 사건에 연루되었다. 두아니에는 이 돈 가운데 아주 적은 액수를 받았지만 허위 사건과 위조죄에 걸려, 이 악당과 순진파 화가는 상테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루소는 기적적으로 집행유예 2년과 벌금 100프랑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최종 언도가 가벼웠던 까닭은 루소의 변호사가 법정에서 루소의 [두 장난꾸러기]라는 그림 한 점을 제시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열대 초목을 배경으로 원숭이 두 마리가 우윳병 하나를 놓고 장난을 치고 있는 그림이다. 변호사의 생각으로는, 이 그림이야말로 피고의 무죄를 변호할만큼 확실한 증거물이었다. 이 그림은 재판관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루소를 살렸다. 재판 중에 루소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개 유죄 판결을 내리신다면, 그건 비단 저한테만 부당한 처사가 아닙니다. 그건 미술로 볼 때도 대단한 손실이 될 터입니다."오늘날 그 누가 루소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rousseau_jesters.jpg


집달리와 서기였던 루소(1844~1910)는 1869년 파리 입시 세관의 세관원이 되어 1893년까지 일한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루소는 1886년 시냐크를 만나, 평생 앵데팡당전에 참가한다. 1894년에 루소는 [전쟁]을 전시하는데, 이 작품에서 몽환상태에 가까운 자신의 독창적인 기법을 보여준다. 1903년부터 플레장스에 정착해 초상화를 비롯해 이국적인 소재로 첫 작품을 그린다([호랑이의 공격을 받는 정찰대]). 1905년 가을 살롱전에 [배고른 사자]를 선보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