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바흐 - 자클린의 눈물

작성자 : 미리내    작성일시 : 작성일2015-11-03 10:19:26    조회 : 380회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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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리내님     작성일시:

-쟈크린 뒤 프레의 일생

영국 런던의 유명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인 영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첼로를 선물 받고,
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하며,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장한나의 스승이기도 함)로부터
사사(師事) 받으며 일찍이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얻습니다.
16세 때 런던에서, 20세 때 뉴욕에서 데뷔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녀는 성격이 매우 낙천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활달했으며,
생김새도 순박했을 뿐 아니라 늘 자신감에 넘쳐 살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적어도 질병을 앓기 전까지는...
그녀의 병명은 희귀질환인 '루게릭병'
28세가 되던 1973년 이 질병을 얻어 결국 연주 활동을 중단하게 되고
그녀는 42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본인의 연주를 들으며 투병생활 하다 생을 마감합니다.
1968년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유태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 한 후
그런대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그녀는 연주 도중 자주 현을 끊어 먹을 정도로
격렬하고 열정적인 연주로 늘 청중을 매료시켰답니다.
젊은 천재 첼리스트 쟈크린은 이제 막 성공의 길로 들어선
다니엘에게 어쩌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였는지도 모르지만,
다니엘은 자신의 공연 때마다 그녀를 줄곧 데리고 다니며 혹사시켰고
1970년 무렵, 쟈크린은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피로를 느끼게 되고
눈이 침침해질 때가 많았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볼품없어져 갔으며.
공연을 할 때면 자꾸만 박자도 놓치고 눈에 띄게 연주가 형편없어지자
다니엘은 그녀를 혹독하게 대함.
이후 그녀는 자신의 병명을 천신만고 끝에 알게 되면서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자신의 정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안도하는 모습에서,
당시 다니엘의 질책이 얼마나 심했으며
그로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엿볼 수 있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 조차도 없게 되고
그러나 남편 다니엘을 비롯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쟈크린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다
차츰 누구도 찾지 않게 되었으며,
그녀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어야 했고,
아는 사람들에게 어렵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기도 하였다.
쟈크린은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 또는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쟈클린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쟈클린은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휠체어에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몸이 찢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눈물 조각처럼" 그러고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삶을 극복할 수 있죠?"

세기의 천재들이 요절하는 경우는 많은가 봅니다.
하지만 그녀는 최고의 위치에서 한순간 무너져 내려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 주위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외로운 처지에서 영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매일 떠올리며 잔인하게 죽어갔습니다.
남편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의 어머니 무덤에도 가지 않았던 사람.
그녀의 무덤에는 단 한 차례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비정한 인간이 아닐 수 없죠.
쟈클린은 남편이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는 무덤에서
오늘도 외로히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출처 -클래식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