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의 생활 인문학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5-03-07 13:36:09    조회 : 398회    댓글: 0


[녹색세상]농부들의 생활 인문학  전희식 | 농부·‘아름다운 후퇴’ 저자
      
며칠 전에 송년회가 있었다. 겨누고 겨눠서 날짜를 잡고 밤늦도록 잔치를 벌였다. 밥도 있고 과일도 있고 술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다른 송년회와 같다. 선물을 하나씩 가져와서 선물주기 놀이를 벌인 것도 그렇다. 색다른 점은 회원들이 강연 잔치를 벌인 것이라 하겠다. 거참, 잔치 중에 별난 잔치도 다 있다.


회원 여섯 사람이 나서서 자신의 생활을 소재로 15분씩 강의를 한 것이다. 주제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아이들과 바느질하기, 책 만들기, 생활 속 행복 에너지, 좌선과 명상, 언론 협동조합, 치자 넣어 만드는 백김치 등이었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빼고 서로 미루더니 정작 앞에 나와서는 15분을 넘기지 않은 회원이 없을 정도로 열강을 했다.

농촌마을 면 단위에 주소지를 둔 이 단체는 ‘닦음과 행함’이라는 이름을 쓴다. 올 한 해 동안 21개 강좌를 진행했고 4차례 답사기행을 다녀왔다. ‘농민생활인문학’이라는 단체 성격에 비춰보면 농민들이 자신의 생활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재조직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한 해 강좌 횟수가 상당히 많다. 농민들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2갑자라고 그 강좌가 5회나 되었다. 두 번은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중심의 현장기행이었다.

이 인문학 단체의 특징은 강의 횟수에 있지 않고 모든 강좌가 공동강사제로 진행된 점이라 하겠다. 한 강좌에 주 강사와 보조 강사가 있는데 보조 강사는 강의 핵심을 쟁점화하고 생활 속 실천 주제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강좌가 있기 전에 강사의 원고를 자료집으로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한 뒤 미리 읽고 오도록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강사와 청중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으로 구분하지 않고 통합된 주체로 보는 것이라 하겠다. 회원(청중)이 주인이지 절대 강사가 주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매우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임에서는 대개 그 지역 친환경영농조합 유기농 음식을 먹거나 회원들이 싸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마흔 명 가까이 되는 전체 강사 중 지역 강사가 60%가 넘는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런 강좌가 전염병처럼 번지면 내로라하는 전문 강사들이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 더 재미있는 원칙 하나가 있다. 강좌를 들으려면 회원은 월 1만원씩 내야 하고 비회원은 누구나 공짜라는 원칙이다. 회원들에게 특혜는커녕 차별이 심하다. 그러나 그 단체는 그것이 인문학의 본령이라고 주장한다. 모임의 취지를 알리는 카페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닦기 위함이지 지적 과시나 처세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닦음으로 행하고 행함으로 닦음을 심화한다’고.

 

4명의 주 강사와 역시 4명의 보조 강사가 등장한 강좌 중에 ‘우리동네 보통명사(名士) 이야기 마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4명의 주 강사는 요리사, 향교의 전교, 음식정의 활동가, 장애인 돌봄이였다. 진득한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보통명사들에게 참석자들은 공감을 보였다. 그 공감이 각별했던 것은 늘 보던 이웃의 진면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누구나 강사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마이크를 잡으면 강사고 앞에 앉으면 청중이다.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었다는 동학농민군 딱 그 모양새다. 양반 상놈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외치던 동학농민군처럼 강사와 청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단체는 평생 처음으로 ‘강사님’소리를 듣는 사람을 마구 양산해 내고 있는 셈인데 아직까지 부실 강사 시비는 없다. 내년에는 이런 흐름을 더 강화한다는 소문이다. 인문학이 땀내 나는 농업노동과 결합해서 서로 더 건강해지는 농민생활인문학 ‘닦음과 행함’의 송년잔치는 그렇게 이어져 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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