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과 두레 - 정홍규신부 환경칼럼

작성자 : admin    작성일시 : 작성일2014-03-05 23:47:55    조회 : 429회    댓글: 0


[정홍규 신부 환경칼럼 - 환경과 창조] 199 살림과 두레

발행일 : 1996-03-17 [제1994호, 12면]

  
이번 봄에 출판되는 나의 두번째 환경칼럼 책 제목을 「살림과 두레」라고 정했다. 이 제목은 20세기말의 문제들을 푸는 대안적 용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명 속에 살고 있다. 교통사고로 죽고, 가뭄으로 나무가 죽고, 미세 먼지나 석면으로 허파가 죽어가고 발암물질이 든 간장을 매일 조금씩 먹여 죽이는 느린 죽임도 죽음이다. 차별과 억압으로 인간의 죽음뿐 아니라 이제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대량으로 죽어가는 총체적인 죽음의 묵시록을 매일 보고 듣고 있다.

「살림」 곧 살리는 일이 바로 우리 시대의 예언적 소명이며 살림살이이다. 살림살이 바로 살리는 일을 자기 삶으로 사는 것, 이것이 창조의 행위이며 구원이다. 교회는 살림의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백성들을 성차별, 종교적 가부장제, 이원론, 인간중심주의 구원론, 온갖 낡은 관습과 전통, 수직구조의 제도 등으로 겹겹이 죽이고 있다. 형제니, 공동체니, 자매니, 사랑이니 하면서 성직 사회와 수녀원 사회가 때론 자주 마구 함부로 민중 생명을 억압하는 추문들을 내놓고 있지 않은가. 우리 본당 안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살림은 교회 밖의 문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안의 문제이다.

살림도 아름다운 말이지만 두레는 더욱 멋있는 말이다. 두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서기 2백년 경의 삼한 시대로 올라간다. 두레는 요사이 말로 소공동체, 기초 공동체이지만 단순히 말씀나누기 7단계만 하지 않았다. 이 두레는 초대교회 공동체와 거의 비슷했다고 보고 싶다. 생활 협동조합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두레는 철저하게 공동작업, 공동식사, 공동놀이, 지역차이를 위한 공동결정, 그야말로 공동체적 삶의 구조가 두레였다. 문제는 이 두레들이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 서서히 없어짐으로 해서 협동 정신이 사라지고 정치권력이 중앙에 집중되고 공동체의 자율성을 잃게 되고 젊은이들은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도시에는 두레는 없고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의 유령들만 있을 뿐이다.

이 두레의 살림은 다층적 소외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밖에서 자본주의는 개혁하는 길, 시장 밖에서 시장을 바꾸는 일, 교회 밖에서 교회를 쇄신하는 일은 두레의 살림, 소공동체 운동,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성직자와 수도자의 교회가 아니라 백성들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정부와 대기업을 해체하고 교회의 교계제도를 해체한다면 참된 해방이 올까?

 

정홍규 신부ㆍ우리농촌살리기 대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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