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도법스님 강좌 "유일한 희망, 깨달음의 길"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7-04-12 20:58:55    조회 : 291회    댓글: 0


유일한 희망, 깨달음의 길

 

실상사 주지인 도법스님이 1999년 한살림 전국생산자연수회에서 강의한 글입니다.


1. 두렵고 두려운 마음으로

1) 눈먼 자들을 향한 애정의 辯


“태어나기 이전에는 누가 나이었으며
태어난 이후의 나는 누구인가
태어나 성장한 것이 나인가 했는데
죽어 눈감고 몽롱한 지금 나는 누구인가“

- 순치황제 詩 -

“뼈와 가죽과 살들은 흙으로 돌아가고
피와 소변과 땀들은 물로 돌아가며
몸의 따뜻한 기운들은 불로 돌아가고
활동하는 작용들은 바람으로 돌아가네
육신이 죽어 제 갈 곳으로 돌아가버린 지금
그대의 참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 무상게 -

삶에 대한 밝은 안목의 소유자인 古人들께서는 존재이유와 가치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고 살아가셨다.

우주란, 인생이란, 나란 무엇인가.

존재이유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명제인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인간의 역사가 대단히 발전해왔고 이룩한 업적이 엄청나 보이지만 그것이 존재이유와 가치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자신의 존재이유를 모르는 삶이라면 그 삶은 맹목적인 삶이며 무의미한 삶인 것이다.
삶의 이유도 실현해야 할 가치도 모르는 채 습성과 욕망과 주어진 환경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체적이고도 창조적인 삶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지금까지의 역사과정과 나날의 삶들을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하게 지내왔음을 보게 된다. 맹목적인 욕망의 허상을 쫓아다녔을 뿐 한심스러울 만큼 자기존재에 대해 무지했음을 알 수 있다.

삶의 이유와 실현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무지한 채 살아온 것은 바로 칠흑의 어두움 속을 맹목적으로 헤매 왔음을 뜻한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가치에 대해 철저하리 만큼 무지하면서 세계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인지 깨달아야 할 때가 오늘이 아닌가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존재이유와 가치에 대해 눈멀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제멋대로 주의,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만에서 깨어나야 한다. 눈뜬 자들의 안목을 빌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조금은 진실하고 겸허함을 견지하면서 오늘의 자신을 살펴보는 현명함을 유지해야 할 때가 되었다.

“태어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죽어서는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오고 가는 곳 깨닫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 대혜어록 -

“태어나도 온 곳을 알 수 없을 세 말하여 生大라 하고
죽어서 가는 곳을 알지 못할 세 말하여 死大라 하네.
크나큰 하나의 길, 生死문제 해결하는 길
이 길만이 自他가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이니라“

- 고봉선사 법어 -

古人들께서는 분명하게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주의 참모습을 밝히고 살아가지 않는 한 그 삶은 미혹과 무지의 어두움을 헤매는 삶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땀흘린 노력들이 고통과 불행을 재생산하는 어리석은 짓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진리의 길, 바른 길이 아닐 경우는 처음부터 아니 감만 못하다”라고 하신 古人들의 말씀은 거듭 음미해야 할 가치가 있다.


오늘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스러운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면 “존재이유에 대한 달관의 안목과 존재가치에 대한 올바른 신념이 없는 애씀은 어리석고 부질없는 헛수고일 뿐”이라고 하신 현인들의 말씀이 천지를 진동하는 웅변임을 수긍하게 한다.
지금부터라도 잘못 걸어온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옛사람들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겸허함으로 문제를 다루어 가는 진지함을 간직해야 하겠다.

2) 눈뜬 자의 확신에 찬 辯

“이제 어두움은 영영 사라졌도다.
이제 생사의 길 따르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고 선언하노라“

- 자설경 -

“나는 一切의 勝者, 一切의 智者라.
生死의 굴레에서 영원히 해탈했도다.
스스로 깨달음 얻었나니
나에겐 스승도 없고 견줄 자도 없도다”

- 대품수계편 -

중생인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다음 붓다가 되어 하신 말씀들이다. 얼마나 멋지고 당당한 모습인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 정도의 자신감은 있어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 정도의 자부와 긍지를 가질 수 있다면 인생이란 참으로 살만하다고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절망의 강을 건너 삶이라는 희망의 신천지가 펼쳐지고 있음에 대한 확신에 찬 붓다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경전에선 중생인 싯달타가 깨달음의 완성자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대단히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다.

“어두움의 역사가 청산되고 광명의 역사가 펼쳐지도다.
 
죽음의 문을 닫고 참삶의 문을 활짝 열었도다.
고통의 감옥을 쳐부수고 행복의 대자유를 실현했도다”

- 불본행집경 -

“天地가 진동하고 산천초목이 춤을 추며
봉사가 눈뜨고 앉은뱅이 걸어가도다”

-불소행찬-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따르는 삶만이 인류역사에 유일한 희망의 길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눈먼 자의 삶에서 눈뜬 자의 삶. 어두움의 삶에서 밝음의 삶. 절망의 삶에서 희망의 삶. 불행의 삶에서 행복의 삶. 죽음의 삶에서 참삶의 삶. 속박의 삶에서 대자유의 삶. 싸움의 삶에서 평화의 삶의 길이 열렸으니 천지가 진동하고 만물이 환희용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자기중심의 이기적 욕망의 사고방식으로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어리석은 자만을 버리고 깨달은 자의 안목을 빌려 삶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성실함과 겸허함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하겠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도 당당하고 만물들도 환희하는 깨달은 자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면 또 다시 어리석은 과오를 되풀이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2. 깨달음의 안목으로 본 삶의 문제

1) 오늘의 현실을 직시함(苦)

깨달음의 법인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중생의 삶을 살펴보신 부처님은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라고 정의하셨다. 지금까지의 역사경험과 오늘의 지구촌 현상들을 놓고 볼 때 부처님의 정의는 현실적인 설득력이 있다.
인류역사는 고통과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로지 앞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싸워서 이기는 길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믿음으로 피흘리고 목숨을 바치며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 많은 소유와 성취만이 살길이라는 확신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뛰어왔다. 승리와 지배만이 문제해결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살상과 파괴 등 비인간적인 행위도 주저하지 않았다.

개발과 성장만이 희망의 길이라는 철학으로 밤낮을 쉬지 않고 땀흘려 노력해왔다.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하게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경쟁하고 또 경쟁하며 살아왔다. 덕택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했다. 농촌사회를 극복하고 도시사회를 이룩했다. 개인소득 60불 시대의 가난을 청산하고 개인소득 1만불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는 인류의 영원한 바램인 꿈과 이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6,25 이후 최대의 국가적 위기 또는 지구촌의 총체적 위기라며 모두 불안에 떨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불신과 대립은 더욱 심화되고 갈등과 불만은 날로 증폭되고 있다. 불안과 공포는 나날이 확산되고 모순과 고통의 상황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생태계 붕괴, 환경오염, 자원고갈, 핵 확산, 인간성 파괴, 자아상실, 맹목적인 욕망의 확대로 인한 비인간화의 경향과 생명위기의 상황은 계속 가속화되고 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음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폐해들이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라고 하신 깨달은 자의 말씀에 설득력의 무게를 더하게 하고 있다.

2) 오늘의 모순과 비극의 원인(集)

깨달음의 눈으로 모순과 고통의 문제를 살펴보신 부처님은 그 원인이 두 가지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첫째,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 대한 무지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온 우주는 마치 영원과 무한 그 자체이며 인연을 따라 출렁거리는 하나의 생명바다이다. 생명바다의 활동은 시작도 끝도 없다. 바람이라는 인연에 의해 영원히 출렁출렁 활동할 뿐이다. 파도치는가 하면 잔잔하기도 하다. 동쪽으로 가는가하면 서쪽으로 가기도 한다. 큰 파도가 이는가 하면 작은 파도가 되기도 한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함이 나타나지만 본래 미워하고 대립해야 할 남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이지만 본래부터 하나의 생명바다였으므로 분노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란 찾아볼 수 없다. 때로는 너의 모습과 나의 모습, 죽음의 모습과 삶의 모습, 여자의 모습과 남자의 모습, 청년의 모습과 노인의 모습, 인간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으로 출렁거리지만 본래 하나인 생명바다의 움직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곳엔 진리의 길인 공존과 균형과 조화의 길이 있을 뿐 그 외의 길은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

둘째,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無知

깨달음의 눈으로 본 존재가치는 형언할 수 없는 불가사의함이라고 했다.
인간 존재는 광대한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별똥별처럼 고립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영원과 무한의 생명인 우주와 한 몸, 한 생명이다.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음으로써 끝나버리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진리의 생명, 우주의 생명과 한 몸인, 영원한 생명의 존재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과 무한을 자유자재로 누리는 대자유의 존재다. 늙고 병들고 어리석고 추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불완전의 존재가 아니라 영원과 무한, 만족과 기쁨, 평화와 자유 등 인간의 영원한 바람들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완성의 존재다. 자신의 존재가 바로 진리요, 우주요, 생명이요, 평화요,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요, 자유요, 완성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서 자족할 뿐 그 밖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배반하는 행위로서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이요 불행한 일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의 세계에 대한 무지는 인간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낳았으며 그로 인하여 인간과 자연이 갈등과 대립관계로 인식되고 나아가 정복과 파괴의 역사로 전개되어왔다. 또 존재가치에 대한 무지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낳았으며 그로 인하여 너와 나는 갈등과 대립관계로 인식되고, 아울러 야만스러운 경쟁과 승부, 살생과 파괴의 역사로 흐르게 되었다.
인간의 미혹과 무지로 인한 이기적 욕망의 논리에 따른 사고와 삶의 방식이 결국 인류역사의 비극과 불행을 낳게 한 장본인이었으며 현대사회의 총체적 위기와 지구촌의 생명위기상황을 초래케 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3. 깨달음의 안목으로 제시한 문제해결의 길

1) 연기적 세계관에 의해 실현된 이상적 삶(滅)

동서를 막론하고 현명하신 古人들께선 진리의 길, 만 생명의 길은 본래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최첨단의 현대과학이론들도 대부분 賢哲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현인이라고 추앙하는 분들은 본래 있었던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따라 살아가신 분들이다.

그분들은 스스로 발견해낸 진리의 길을 역사대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一生을 바치었다. 개인적으로 진리의 인격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진리에 의한 사회를 만들고자 열정을 쏟으셨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진리의 정신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고 좋은 사회 되도록 가꾸어 가는 것이 바로 자기완성의 길이요, 진리실현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셨던 것이다. 古人들께서 진리의 인간상과 사회상 또는 그 실현의 과정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야말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큰 위안인 것이다.

간단하지만 역사 위에 나타난 이상적인 삶의 사례를 살펴볼까 한다.

첫째, 진리의 인간상이신 부처님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장엄하고 황홀한 아름다움을 일출과 일몰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탄생이 장엄한 일출이라면 그분의 임종은 황홀한 일몰이라고 표현할만하다.
그분의 얼굴엔 언제나 잔잔한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너그럽고 따뜻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도 누구를 미워하거나 불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몸담고 살았던 시대상황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비극적이었지만 그 안에서 역사대중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흔들림 없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해 가셨다.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을 대해서도 신뢰와 융화의 태도를 지켰고 진리의 인격자답게 아름다움, 자유로움, 행복함으로 살아가셨다. 우리의 좋은 벗인 중생 싯달타가 진리실현의 인간상으로 우리와 함께 역사현실 속에 살아가셨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희망이자 보람인 것이다.

둘째, 진리의 사회상인 승가공동체

깨달음의 진리를 실현하려는 고상한 이상을 간직한 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가 바로 승가공동체인 것이다.
승가공동체란 영원한 생명, 영원한 기쁨, 영원한 자유, 영원한 평화의 사회를 실현하려는 높은 뜻, 높은 이상으로 함께 어울려 서로를 격려하며 정진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엔 계급차별이 없다. 빈부차이도 없다. 남녀불평등도 없다. 주종관계도 없다. 그곳엔 진리의 이상을 향한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된다. 주체적 자유정신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다. 서로 신뢰하고 협력함으로써 보다 높은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데 뜻을 모은다. 마치 여러 종류의 작은 꽃들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듯이 인류의 영원한 이상과 가치를 꽃피우려는 좋은 벗들이 모여 형성된 승가공동체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혼돈의 오늘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인 것이다.

셋째, 너무나 인간적인 진리의 실천자 간디

간디는 대부분의 위인들과는 달리 특별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범속한 우리들처럼 너무나 평범한, 아니 조금은 바보스러운 듯한 인물이었다. 보통아이들과 같이 학업성적도 중간 정도였고, 체구도 작은 편이었으며, 유달리 겁이 많은 아이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우리와 비슷한 간디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들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범속한 간디가 보여준 진리실천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갖게 하는 빛으로 빛나고 있다.

간디의 삶을 간단히 간추려 보자.

① 진리의 정신인 진실, 사랑, 헌신, 비폭력으로 인도독립을 이끌어냈다.
② 진리정신에 입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립적 마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③ 진리의 정신에 일치하는 진실, 사랑, 헌신, 비폭력 실천으로 인류구원의 길을 열어가고자 전력했다.

범속한 우리의 벗 간디가 진리실현을 위해 보여준 헌신적인 삶의 태도는 미로를 헤매는 현대사회, 나약하기 그지없는 범속한 우리들에게 희망의 횃불임에 틀림이 없다.
진리의 정신으로 인류역사의 전체흐름을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진리실현의 가능성을 역사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며 역사의 어두움을 밝혀줄 한줄기 빛인 것이다.

2) 영원한 희망 - 깨달음의 길(道)

세계의 참모습에 대한 미혹과 무지의 세계관이 인류역사의 비극과 현대사회의 위기를 낳은 원인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미혹과 무지로 인해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짚어보았다. 세계의 참모습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관에 의해 역사 위에 실현된 이상적 삶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존재가치에 대한 깨달음의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해봤다.

역사적 반성과 새로운 모색의 입장에서 살펴본 바를 정리해보면 그 내용은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다.

진리의 세계, 생명의 진실인 우주적 생명질서에 대한 깨달음의 길 말고는 그 어디에도 길은 없다. 우주적 생명의 질서에 따른 존재가치에 대한 주체적 깨달음의 안목으로 살아가는 길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길이 될 수 없다. 역사경험과 현대사회의 양상들로 미루어볼 때 賢哲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와 ‘깨달음의 길만이 진정한 희망의 길’이라는 가르침이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 인류역사를 지배해온 전도된 세계관에 의한 사고와 삶의 방식은 단호히 청산해야 할 길임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유일한 길이라고 매달려왔던 미혹과 탐욕의 세계관에 의한 사고와 삶의 방식은 시급히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절망의 길이었음을 역사과정과 현대사회의 문제들이 잘 웅변해주고 있다.
이쯤에서 일찍이 삶의 문제를 정확하게 통찰하여 유일한 희망의 길, 깨달음의 길을 제시한 현철들의 견해를 간추려 볼까 한다.

“세상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첫째, 절망과 불행의 길이다. 세계의 실상을 바르게 통찰하지 못한 二元的이고 대립적인 세계관으로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한 역사에 희망은 없다. 전도된 세계관에 의한 자기중심, 인간중심의 가치의식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어갈 경우 인류의 불행은 피할 길이 없다. 맹목적인 욕망의 흐름을 쫓아 경쟁과 승부의 논리로 살아가는 한 비인간화의 길은 더욱 심화되어가고 지구촌 생명위기의 비극적 상황은 악화되어갈 수밖에 없다.

둘째, 희망과 행복의 길이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의 안목에 의해 제시되어진 세계관으로 삶의 문제를 다룰 때 희망의 삶, 행복의 삶, 완성의 삶이 실현된다. 깨달음의 세계관에 따라 공존과 협력과 창조의 사고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가꿀 때 자유와 환희의 삶이 가능해진다. 우주적 생명질서에 따라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는 논리로 삶을 이끌어갈 때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이 이루어진다.”

옛 현철들께서 이처럼 명확하고 확실한 입장을 갖고 우리가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전존재를 바친 현실적 경험과 체험에 의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좀더 확실한 이해를 위해 역사현장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 깨달음의 길만이 영원한 참삶의 길이요, 희망의 길임을 몸소 보여준 붓다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붓다는 깨달음의 안목으로 자신의 一生을 깨달음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정리하셨다.

첫째, 깨달음 이전 자신의 삶은 미혹과 무지의 세계관으로 살아간 삶이다. 즉 전도된 세계관에 의한 세속적인 욕망의 길도 출세간적인 고행의 길도 미혹과 고통을 재생산하는 길인 만큼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버리고 극복해야 할 삶이라고 했다.

둘째, 깨달음 이후의 삶은 깨달음의 안목에 의해 파악된 진리의 세계관으로 살아간 삶이다. 즉 진리의 세계관에 의한 중도의 길은 미혹과 고통을 근절시키는 대자유, 대평화의 길인 만큼 만인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무이한 희망의 길이라고 했다.”

붓다의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실제 동서의 賢哲들이 제시한 방향과 내용, 또 그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비인간화와 생명위기의 상황이 심화되어가는 현실을 볼 때, 세계의 실상과 존재가치에 대한 깨달음만이 유일한 희망의 길이라고 한 가르침이 갖는 시대적 의미는 절대적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4. 맺음의 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지의 어두움이 세상을 덮고 있다.
짙은 어두움 속에서 우리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에 길이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은 어떤 능력이나 기술이 아니고 어둠을 밝힐 등불을 준비하는 일이다. 방향과 길을 밝혀줄 등불을 준비하지 않는 한 우리들의 모든 노력들이 부질없는 수고가 되고 만다.
존재가치에 대한 무지의 맹인들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무지의 맹인들에 의해 역사가 좌우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눈멀어 있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재주가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눈뜨는 일이다. 존재가치에 대한 깨달음의 눈을 뜨지 않는 한 열정을 다한 애씀들이 불빛을 쫓는 불나비 신세가 되고 만다.

지금 여기에서 등불을 준비하는 작업을 떠나 그 어떤 길도 길이 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지금 여기에서 눈뜨는 작업을 떠난 그 어떤 노력도 방법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다. 깨달음의 길만이 유일한 희망의 길이라는 변으로 맺음의 글을 대신한다. 분명한 자각과 확고한 입장을 확립하는 애씀이 절실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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