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 묵시록의 교훈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17-03-18 21:39:47    조회 : 263회    댓글: 0


[슬라보이 지제크 칼럼] 오염묵시록의 교훈

등록 :2017-03-16 18:35수정 :2017-03-16 20:52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교수
지난겨울 중국 대도시의 스모그가 너무 심해져 수만명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골로 대피했다. 이 공기오염묵시록(airpocalypse)은 5억여명에게 영향을 미쳤다. 대도시에 남은 사람들에겐, 외출이 지구 멸망 이후를 그린 영화 속 풍경과 비슷해졌다. 행인들이 거대한 마스크를 쓰고, 가로수도 보이지 않는 그런 풍경 말이다. 계급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값비싼 비행기 삯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이 공기오염묵시록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신속한 ‘재정상화’일 것이다. 당국이 더는 그 문제를 부인할 수 없게 된 뒤에, 당국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일상을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과정을 만들려 애썼다. 그 재난적인 스모그가 새로운 현실일 뿐인 것처럼. 지정된 날에는 되도록 집에만 머물러라, 반드시 외출해야만 한다면 마스크를 쓰고 나가라 등의 규정이 발표됐다.
엄청난 생물학적, 물리적 변화의 대공습이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의 집단적 이데올로기는 위선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별한 사회적 심리학적 변화가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불가능하고 현실이 아닌 것으로 여겼던 사건이 현실이고 더 이상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1990년대 초 사라예보 포위를 돌이켜보자. 50만 인구의 평범한 유럽 도시가 포위된 채, 사람들이 굶어 죽고, 정기적으로 폭격을 당하고 시민들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을까봐 겁에 질렸는데, 이런 상태가 무려 3년이나 계속되었다. 포위가 시작되었을 때 사라예보 시민들은 단기적인 사태라 여기며, 혼란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을 1~2주 동안 안전한 곳에 보내려 애썼다. 그런데 매우 빠르게 봉쇄가 정상인 상황이 되었다. 불가능이 정상이 되는 같은 과정(중간에 잠시 공포에 질려 무감각해지는 기간을 거쳐)은 미국 진보 세력이 트럼프의 승리에 반응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북극 빙산이 녹아내리는 생태적 위협에 대한 국가들과 대자본들의 반응에서도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 최근까지 지구온난화가 옛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묵시록적 공포 마케팅, 또는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미성숙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던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이 이제는 갑자기 지구온난화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환경적 재앙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재난의 진정한 측면을 회피하려는 기묘한 술책일 수 있다. 환경 위협에 대한 유죄를 인정하는 것에도 기만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가 유죄라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단지 생활양식을 바꾸기만 하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유죄임을 인정하려 한다. 광적이고 강박적으로 폐지 재활용, 유기농 식품 구매 등의 활동을 하며, 우리가 무엇인가 하고 있고 기여하고 있다고 믿으려 한다.
우리는 이런 게임을 끝내야 한다. 중국의 공기오염 재앙은 천재지변설과 일상, 죄책감과 무관심이 기묘하게 조합된 주류 환경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다. 오늘날 생태학은 생태적 위협의 진정한 면모들을 모호하게 하는 일련의 전략들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격전장이다. 첫째 전략은 단순한 무시다. 둘째는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 셋째는 ‘해법은 (오염 유발 주체에 대한 증세 등으로) 시장에 맡겨라’. 넷째는 거대한 구조적 방안들 대신 개인적 책임에 대한 초자아적 압력 가하기다. 즉 각자 재활용, 덜 소비하기 등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아마 가장 나쁜 것일 텐데 인간의 오만을 비난하고 다시 대지의 어머니인 자연의 자녀들이 되는 자연적 균형, 더 소박하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어머니 자연이 우리의 오만 때문에 망가졌다고 말하는 패러다임은 틀렸다. 주류 생태학적 담론은 생태학적 초자아기구의 끊임없는 압력 아래 우리가 어머니 자연에게 빚지고 있음을 개인의 일상 안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자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오늘 무엇을 했는가? 모든 신문지를 적절한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었는가? 맥주병이나 콜라캔은?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데도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았나? 전체적인 산업문명에 대해 적절한 전지구적 질문을 던지는 대신 개인적 자기 시험에 빠져 길을 잃게 한다.
피해야 할 또 다른 덫은 반자본주의를 훈계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본가 개개인의 더 큰 권력과 부를 향한 이기주의적 탐욕에 의해 지탱되는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자본주의에서 개인적 탐욕은 자본 자체가 재생산하고 팽창하는 비인격적인 움직임에 종속돼 있다. 즉 무조건적으로 자본의 자기 확장 충동에 헌신하는 자본가는 인간성의 생존 그 자체를 포함해 모든 것을 위기에 처하게 만들 태세인데 그것은 병적인 이익이나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스템의 재생산 그 자체를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20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저서에서, 20세기의 “실제의 열정”을 정치적 극단주의의 전조로 보고 거부한 뒤, 21세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 책의 첫 부분 두 편의 에세이 제목에 가장 잘 담겨 있는데, ‘인류세’(Anthropocene)와 ‘인간의 교화로부터 문명의 개화로’이다. ‘인류세’는 삶의 새로운 시대를 지칭한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우리 생산 활동의 모든 결과를 흡수해주는 저수지의 역할을 하는 지구에 의존하지 못한다. 지구는 우리가 부주의하게 파괴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할 수 있는 유한한 존재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우주에서 하나의 동물 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환경으로부터 무한한 자원을 끌어내는 영웅적 노동자가 아니라, 환경과 협력하는 겸손한 사람,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의 안전과 안정을 끊임없이 협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것은 이익에 초점을 맞춘 자기강화적 순환이며, 생산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 환경에 미친 부수적 피해는 원칙적으로 무시된다. 따라서 환경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정치-경제적 변화가 필요하다. 슬로터다이크가 “야생 동물 문화 길들이기”라고 부른 것이다. 지금까지는 각각의 문화가 그 구성원을 길들이고/교육해 국가 권력의 모습으로 구성원 사이의 평화를 보장했다. 그러나 다른 문화, 국가들 간의 관계는 영원히 잠재적 전쟁의 그늘 아래 있다. 각각의 평화 상태는 일시적 휴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이 개념화한 것처럼, 국가의 완전한 윤리는 영웅주의의 가장 높은 행위, 민족국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태세로 귀결된다. 이는 국가들 사이의 야만적인 관계가 한 국가 내부의 윤리적 삶의 기초가 됨을 의미한다.
오늘날 북한이 인정사정없이 핵무기와 로켓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야말로 이 무조건적인 민족국가 주권 논리의 궁극적 사례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지구라는 우주선 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긴급하게 부과되는 과제는 문명 그 자체를 문명화하는 것이며, 모든 인류 공동체들 사이에 보편적인 연대와 협력을 이뤄내는 것이다. 이 과제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분파 종교적, 윤리적, “영웅적” 폭력의 증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그리고 세계를) 희생시키려는 태도 때문에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자본주의자들의 팽창주의를 극복하는 것, 국가 주권을 넘어설 수 있는 광범위하고 국제적인 협력과 유대가 우리의 자원과 문화적 공공재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그것이 공산주의적 지평을 암시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6821.html#csidx6282f30f0438b38a1f1e80f211b21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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