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노동 참사와 생명가치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0-06-21 20:38:59    조회 : 210회    댓글: 0

 

 

반복되는 노동 참사와 생명 가치

 

2020429일 오후 1시 반경, 서울 가까운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의 한익스프레스남이천 물류센터 냉동·냉장 물류창고 신축 현장 지하 2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38명이 사망, 10명이 부상당했다. 화재가 난 물류창고는 2019423일에 착공되어 2020630일 완공 예정으로, 공정률 85% 상태였다. 그런데 화재 사건 이전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물류창고 공사 업체로부터 받은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보고 이미 화재 위험성을 경고하며 수차례 개선(특히, 환기 문제)을 요구했다고 한다. 서류심사 2차례에 이어 현장 확인 4차례까지 유해위험방지계획서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 시공회사 측은 이를 진지하게 경청, 이행하지 않고 무리하게 작업을 속행하다 대형 중대재해를 초래했다. 몇 명이 구속되고 벌을 받지만 죽어간 노동자의 목숨은 누가 살리나? 그 어떤 피해 보상이 사람의 목숨을 되돌릴 수 있나?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일하러 나갔던 자, 또 그를 기다리는 가족과 아이들은 과연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더욱더 놀랍고도 안타까운 사실은, 동일한 형태의 사고가 2008년에도 두 번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2008125일 정오를 좀 넘긴 시각, 같은 이천시 마장면의 ‘GS리테일서이천 물류창고에서 용접작업 도중 큰 화재가 터졌다. 용접 불꽃이 튀어 샌드위치 패널로 옮겨붙는 바람에 큰불이 났다. 이 사고로 냉동 분류작업을 하던 인부 8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또 그해 초 17, 호법면 코리아2000’의 냉동 물류 창고에서도 이번 참사와 아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 참사로 당시 현장 노동자 57명 중 40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했다. 화재와 폭발의 원인은 건물 지하에서 발포 작업 중이던 우레탄에 섞여 있던 시너와 냉매 가스가 터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내부 벽면과 천장 모두가 우레탄폼 재질로 도배된 건물 전체를 태우면서 막대한 피해를 불렀다. 소방당국에서 펴낸 <화재 백서>엔 사고 발생 20여 일 전까지 약 283t의 우레탄 발포작업이 있었고 사고 발생 10일 전까진 매일 약 150이상 유성 접착제를 이용한 보온작업이 진행됐다. 수증기와 비슷한 유증기가 공기 중에 널리 퍼진, 극도의 위험 상태였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우레탄 발포작업에 이어 유성 접착제 보온작업 끝에 다량의 HCFC-141b(디클로로플루오르에탄) 유증기, 톨루엔과 아세톤 등이 발생함으로써 결국 급격한 화재 확산의 원인이 됐다고 발표했다.

 

과연 이렇게 반복되는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분명히 경찰, 소방당국, 국과수, 언론 등이 조사와 보고서를 통해 문제점을 밝혔는데도 왜 유사 사건이 반복되는가?

우선 짚고 넘어갈 점은, 왜 하필이면 이천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이미 세 사건의 공통점으로 드러난바, 용인이나 이천 등지가 서울 및 수도권 물류기지 역할을 하는 대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정도가 서울과 경기 지역에 모여 산다. 수도권 과잉 집중, 이 자체가 이미 극도의 위험 상황을 연출하는 배경이다. 3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의 일상생활, 특히 식··주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갖 자재를 효과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대형 물류창고가 수없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필이면 수도권 인근의, 비교적 땅값이 저렴한 용인과 이천 등지에서 물류창고 관련 사고가 빈발한다.

 

그러나 물류창고가 밀집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사람 목숨을 앗아가는 참사를 반복 발생시킬 순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앞의 화재 백서나 산업안전공단의 경고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가 직접 원인이다. 하나는 우레탄, 시너, 냉매, 유성 접착제 등으로 유증기가 공기 중에 퍼진 상태에서 불꽃 튀는 작업(용접 등)이 병행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증기 물질이 가득한 공기 자체를 제대로 통풍, 환기하지 않은 것이다. 물리적으로 이 문제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사한 참사의 빈발 내지 반복 발생 원인이 과연 이런 기술적 문제일까?

 

더욱 중요한 것은, 유사한 참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반복적인 문제 지적이나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같은 오류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듯, ‘안전 불감증이 깔린 것도 사실이다. 작업자의 부주의나 관리자의 책임 소홀, 가연성 소재의 과다 사용, 위험 작업의 하청화 등이 모두 안전 불감증의 소산이다. 그래서 위험의 외주화를 중단하라는 구호가 설득력을 얻는다. , 2007년 영국에서와 같은 기업살인법을 제정해, 산재가 일어난 경우 기업주를 엄하게 처벌하자는 제안이 사회적 공감을 얻는다. 단순한 노동법(산업안전법) 차원이 아니라 기업살인법(형법) 차원에서 보다 엄하게 다스리면 사업주들도 더 큰 책임감을 갖고 안전과 예방을 도모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인명 피해와 책임자 구속과 처벌이 끝나자마자(경우에 따라선 그 도중에도) 왜 이 안전 불감증이 고쳐지지 않고 거의 반드시 재발하고 마는가? 지금도 해마다 1천 명이 일하다 죽어간다. 공식 산재 통계만 해도 그렇다. 숨겨진 경우까지 헤아리면 두세 배가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철저한 사업주 처벌과 별개로, 산재(“기업 살인”) 자체가 부단히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경제 시스템 자체가 문제기 때문이다. 나는 크게 두 측면을 꼽고 싶다.

 

그 하나는 인간 노동력을 너무나 함부로 대하는, 인간 멸시의 경제 원리다.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무한 훼손하는 바탕 위에 진행되는,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악순환 메커니즘이다.

첫째, 자본주의 경영이나 경제의 틀에서 인간 노동력은 결국 인건비로 치환된다. 노동력을 비용이 아닌 자산이나 투자로 보자고 제안하는 이론적 시각도 있지만, 이 시각조차 비용·수익 관점을 배제하진 않는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늘 비용·투자 대비 수익이 얼마냐를 두고 상호 경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 원리다. 그러니 사람의 안전이나 생명, 사고 예방이나 보호 등과 같은 구호는 늘 현수막이나 서류에서만 현란할 뿐 실제 노동과정에서는 비용 절감구호 앞에 그 모두 부차화해버린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인건비와 동일시된다. 사람(생명)은 사라지고 계산(비용)만 남는다. 늘 이런 위험을 안고 진행되는 노동과정은 사고가 안 나는 게 천운일 뿐, 오히려 사고가 나는 게 일상처럼 되어버렸을 정도다. 노동 현장 여기저기 내걸린 구호처럼 안전제일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현장이 거의 없다. 그래선 이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라는 경제 전반의 메커니즘이 갈수록 대형 참사를 재촉한다. 왜 그런가? 우선, 자본은 소규모 이익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 자본의 법칙은 무한 증식이다. 그래야 지주에게 임대료를 주고 국가에 세금을 내고 은행에 이자를 갚으며 주주에게 배당금을 듬뿍 줄 수 있고, 나아가 경영자 보수와 재투자 잉여금까지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당사자마다 만족이나 충분함을 모른 채 다다익선을 추구한다. 자본의 법칙이 갈수록 대규모, 무한대를 추구하는 것은 이런 자본 자체의 생리다.

 

그러니 소량생산과 소량판매로는 만족하기 어렵다. , ‘대량생산-대량판매-대량이윤을 위해 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시스템을 아무 탈 없이 지속해야 자본은 큰돈을 번다. 그런데 이 모든 연쇄 고리(과정)들에 인간 노동력과 자연이 개입된다. 특히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 노동력과 자연 생태계는 자본에게 늘 비용 요인이기에 이 모든 연쇄 고리에 비용 절감 압박이 가해진다. 생산과 유통, 소비와 폐기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은 대상화, 결국 하향 통제 대상이 된다. 사람이나 생명의 가치는 무시되고 오로지 경제 가치(교환가치)가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 바로 이것이 안전 불감증을 주기적으로 재발하게 하고 반복해서 대형 참사를 유발하는 근본 뿌리다.

 

꼬박 40년 전, 19805월의 광주는 한편으로 저항, 다른 편으로 학살 현장이었다. 군부 세력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갔지만, 사실상 그 배경엔 (미국이건 한국이건 국적·민족과는 무관하게) 경제(자본)가 있었다. 인간 존엄성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저항이란 자본에게 막대한 비용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이 없는 상태를 자본은 사회 안정이라 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 안정을 유지한 채 열심히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해야 자본이 이윤을 획득한다. 이런 의미에서, 군부 독재냐 민주 정부냐 하는 건, 자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회를 통치하는 여러 얼굴들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에 의한 노동자 살인이 부단히 일어나는 까닭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은 성찰에서 나온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났듯, 자본은 돈벌이를 위해 부단히 자연 생태계와 야생동물 서식지를 파괴해왔다. 심지어 인간 스스로 야생동물을 음식이나 놀이도구, 애완동물 등 온갖 형태로 상품화하면서 그들의 생명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또 이런 식의 직접적 파괴가 아니라도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자본운동은 지난 100년 이상 대량의 온실가스 방출과 함께 지구온난화 및 기후위기를 초래했다. 이 모든 과정이 자본 운동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이는 자본의 원리를 지양(止揚)해야 해결될 성질이지 단지 부패한 독재 정권을 민주화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 역시 민주 정부 아래서도 여전히 자본에 의한 노동자 살인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이제 이런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자. 비긴 어겐(begin again)!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 존중이 가능하고 생명 가치가 무시되지 않는 새 세상을 말할 수 있다. ‘값싼 희망’(이른바 긍정적 사고또는 근거 없는 낙관)을 서둘러 말하거나 섣불리 이상적인 미래 사회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솔직히, 우리는 지금까지 자본에 협력·순응함으로써 임금이나 이자 등을 받으며 사실상 공범이 되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바로 이런 고백이 온 사회를 지배하는 교환가치 체제를 지양하고 그 대신 생명 가치를 구현할 가능성의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우리는 제대로 출발도 못했다!

노동자는 늘 자본의 피해자라는 의식에만 머물면 안 된다. 뼈를 저미는 이 진퇴양난의 상황, 누가 뭐래도 바로 여기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_강수돌

조치원마을에서 사람농사, 먹거리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부이자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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