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나타난 생명(2)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영원한 생명이 언급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
요한복음사가는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고 만져볼수 있을 때에 확실히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눈이 있고 대상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볼수 없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서는 빛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가 보고 알수 있게 해주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보고 알게 해 주시며, 또한 하느님의 눈동자에 새겨진 사람을 알게 해 주십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어? 라는 광고멘트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상식으로 아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또 연인이 서로를 알아간다는 말에는 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남녀의 사랑하는 관계를 표현할 때에도 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까지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운데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발을 씻는 일은 종들이 하던 일인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종이 되시는 것도 개의치 않으십니다. 또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낮은 부분이며, 먼지가 많은 이스라엘에서는 쉽게 더러워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그 더러운 부분을 만지시고 씻어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귀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더러운 발을 만지지 못하게 말렸던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모순된 생명이 나타납니다. 생명이신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종이 되시고, 생명이신 분이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납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열매 맺어라.”
이제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곧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바꾸어 표현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경 말씀과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이 굳건해 지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