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끝까지 사랑하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6-10 06:25:14    조회 : 342회    댓글: 0

◈ [인천] 지금 당장입니다.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9ㄱ.11-16

복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32

한 여객선이 항해를 하다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이 폭풍으로 배가 고장
나서 항로를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이 어느 무인도에 잘
도착한 것입니다. 물론 다시 항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장 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배 안에 한동안 잘 먹고 지낼 수 있을
만큼의 식량과 미래의 식량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충분히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구조될지를 알 수 없으니 이 씨앗을 땅에 심자고 했습니다.
모두가 동의를 했고, 사람들은 곧바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글쎄 땅속에 황금 덩어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신났습니다. 이 섬은 단순한 무인도가 아니라
황금이 가득 묻혀있는 보물섬이었던 것이지요. 계속 나오는 황금을
채취하는데 열중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처음에 생각했던 씨앗 심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 혼자만 씨앗을 심어버리면, 다른 사람이 더 많은
황금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누구도 씨앗을 심지 않은 것입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이 캐서 소유하게 된 황금은
어마어마해졌습니다. 그런데 식량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씨앗을 심지 않아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황금을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안에서도 더 중요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즉, 순간의 만족을 주는 것과 영원한 도움을 주는 것 사이에서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금 너무하다 싶은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글쎄 오른 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 던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지요. 그리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이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볼 때, 왼쪽과 오른쪽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까? 또 오른손에 생각하는 뇌가
있어서 ‘나는 이렇게 죄를 지을 거야.’ 라면서 혼자 제멋대로 움직일까요?
절대로 이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의 복음 말씀과 같이 죄의
뿌리부터 차단할 수 있는 선택을 과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 주님과 함께 참 기쁨의 삶을 사는 길, 이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선택을 위해서 죄로 기울어지는 모든 말과
행동들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지금
당장입니다.

*****

적절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약삭빠르게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이드리스 샤흐).  

*****

누가 더 행복할까요?

선생님이 학생에게 질문합니다.

“돈 6억 원을 가진 사람과 아이 6명 가진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요?”

학생들은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6명이면 너무 많은 것이 아닐까 싶었지요.
따라서 당연히 6억 원을 가진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 여섯을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돈 6억 원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겠지만, 아이 6명을 가진 사람은 이제 그만 가졌으면 할
테니까요.”

하긴 더 많은 욕심을 가지려는 마음에서는 행복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
반대로 이제는 그만 가지려는 마음, 이 정도는 충분하다는 마음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위 학생의 대답은 명답이네요.

욕심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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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죄의 뿌리인 마음의 살핌과 존엄한 여성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마태 5,27-3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마태 5,28) 

Teaching about adultery

죄의 뿌리인 마음의 살핌과 존엄한 여성

구약성경은 간음죄를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에 대한 탐욕
(탈출 20,17; 집회 41,23)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교의 미쉬나에서도 “손으로, 발로, 생각으로 간음죄를 범하지 말라”
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좀더 근본적으로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간음죄를 범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죄의 뿌리인 마음부터 깨끗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5,30)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눈, 손, 발을
빼버리는 것이 소용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눈과 손, 발이 죄를 짓는다고
그 지체를 절단하는 것으로 유혹을 이길 수는 없으며 올바른 생활의 근원은
정결한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5,8).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도 늘 맑고 바른 마음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사실 마음은 모든 죄악이 생겨나는 근원적인 자리이며,
마음이 비뚤어지면 왜곡되고 비윤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욕구의 비뚤어짐과 혼탁해짐은 그릇된
행동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고치려면 그 뿌리인 마음의 작용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움직임은 고요와 침묵
가운데에서 행동을 멈추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주의하면서 미세한 감정의 분출과 의식의 흐름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은근한 움직임들 안에 나의 욕구와
행동으로 이어지는 요인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께서는 남이 죄를 지을 기회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하며
여성의 존엄성을 절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가르치심입니다. 본디 이혼장을
써주는 제도는 이혼을 당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미흡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혼뿐만 아니라 재혼까지도
금지하십니다.

한 번 맺은 결혼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므로 재혼은
물론 허용되지 않고 나아가서 소박조차도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혼관입니다(5,31-32).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며 이기적인 욕망이나 지나친 쾌락의 요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는 이런 엄격한
가르침의 예외로 '불륜을 저지른 경우'에는 소박과 재혼을 허용하였습니다
(5,32).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적 차별을 받던 여성들의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인정하시고 존중하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떤 동기나 조건, 가치에 따라서도 서로를
차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죄가 생겨나는 마음자리를 고요와 침묵 가운데 살피고,
존엄한 인간성을 서로 존중하는 거룩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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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1열왕 19,11)
 
성심인애 축제가 끝나고 피곤해진 심신을 재충전하기 위해
피정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 성심원 산 중턱에 암자같은 작은 은둔소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홀로 그곳에서 차와 음악과 글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면 참으로 싱그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엘리야에게 소명을 전하기 위해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고 말씀하시네요.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산에서는 바람소리도 꽤 심하고 온갖 소리들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소리들을 다 흘러보내고 나면 그제서야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늘 한 번쯤 세파에 지친 심신을 휴식하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조용한 산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보통 휴식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유명 관광지여서
그곳에서도 시끌벅적한 사람소리, 세상소리만 듣다 오게 됩니다.
나 혼자만 조용히 자연 속에서 거닐며 하느님을 한번 만나 보십시오.
 
그분이 꼭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듣고 싶지 않으세요?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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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마태 5,27-32

어깨와 목이 뻑뻑해서 침술원엘 갔습니다. 선생님이 처방을 내려줍니다.
베개를 낮은 것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베개를
바꾸었더니, 뻑뻑한 것이 사라졌습니다. 원인을 알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성인병이 있습니다. ‘당뇨, 심장질환,
고혈압’과 같은 병입니다. 드러나는 증상만을 치료해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만성질환이라고 합니다. ‘적절한 운동, 체중조절, 규칙적인 식사,
긍정적인 생각, 금연, 절주,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자동차는
우리가 운전하는 대로 움직이듯이, 우리의 몸도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생각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의 눈, 여러분의 손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12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대방동 성당에서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교육이기 때문에 1시쯤 도착했습니다. 저의 강의는 3시부터 였습니다. 저는
지구대표에게 인사를 하고 성당 밖으로 나왔습니다. 새로 생긴 불가마
사우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도 피곤하고, 전날 한잔했기 때문에 잠시
쉬려고 했습니다. 사우나에서 쉬고 있는데 방송이 나왔습니다. 저를 부르는
방송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우나에서 저를 찾는 방송에
놀랐고,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누가 아는 것에 놀랐습니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지구대표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시에 오기로 한 강사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연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구대표는 제가 먼저 온 것을 알기 때문에 천천히 오시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성모동산에서 기도를 하는
줄 알고 갔더니 거기에 저는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는 줄 알고
갔더니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사제관에서 본당 신부님과 대화를 하는
줄 알고 갔더니 거기에도 저는 없었다고 합니다. 급한 마음에 ‘불가마’를
찾았고, 방송으로 저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날 정신없이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마음이 있는 곳에 저의 몸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제들은 거리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엘리야 예언자는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람 속에서 계시지
않았고, 지진 속에서 계시지 않았고, 불길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마음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에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돈, 명예, 권력, 성공이라는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행복은
욕망을 채우려 해서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영광과 존귀의 마음이 아닙니다. 섬김을 받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스리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약하고 힘이 없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음입니다. 부족한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밤을 새워
돌아다니는 마음입니다. 불의한 이들이 다시 회개할 수 있도록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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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끝까지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마태 5,27-32

끝까지 사랑하라.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사랑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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