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5일 선물같은 교황님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9-25 07:18:14    조회 : 361회    댓글: 0

◈ [수도회] 선물 같은 교황님
 
2015년 나해 9월25일 [(녹)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제1독서
 <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5ㄴ─2,9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2

선물 같은 교황님

해외 출장 중에 아메리카 대륙을 순방 중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든 프란치스코 교황님 열풍이 대단합니다. 지구촌 방방곡곡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분의 소탈하면서도 파격적인 행보, 그리고 그분의 용기 있는 발언 하나 하나에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민감한 지역인 쿠바의 심장부 아바나 광장에서 그것도 쿠바 공산 혁명을 주도한 체게바라의 대형 조형물이 내걸린 장소 아래서도 교황님의 말씀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이념에 죽고 이념에 사는 사람들 앞에서도 교황님께서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으시고 이념보다 더 상위의 것이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이념에 봉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봉사합니다. 봉사는 절대로 이념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목숨 걸고 국경을 넘었지만 적법성의 결여라는 일방적인 잣대를 내세우는 매몰찬 미국 앞에 교황님께서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관용을 촉구하십니다.

“미국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조국인 미국 역시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저 역시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가정의 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약자, 특히 이민자,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차별을 거부하고 관용과 포용의 사회를 건설해주길 부탁합니다.”

홍콩 살레시오회 본부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은퇴한 노인 수도자들이 머무는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홍콩 관구장 신부님의 소개로 가에타노란 노인 신부님 한명을 만나 뵈었는데, 올해 연세가...100세시랍니다.

그분의 머리맡 탁자에는 최근에 찍은 사진이 한 장 놓여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는 신부님에게 10O세 기념 선물로 교황님을 알현하는 깜짝 선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은 볼수록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세가 100세시니 당연히 홀로 서실수가 없었습니다. 후배 사제가 휠체어에 앉은 신부님을 교황님 가까이 밀고 갔습니다. 당시 교황님께서는 그분의 상황을 즉시 눈치 채시고 100세 신부님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통상 교황님 알현 때에는 사제가 교황님의 반지에 친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사진을 가만히 보니 교황님께서 거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백세 신부님 손에 친구를 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너무나 컸던 100세 할아버지 신부님은 당시의 사진을 크게 인화해서 당신 침대 머리맡에 세워두셨습니다. 교황님과 당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그렇게 당신의 여생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겸손입니다. 한 사목자의 겸손한 행보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하루는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큰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이십니다. 결국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은 권세와 힘의 왕이 아니라 겸손의 왕이요 희생의 양, 사랑의 왕이십니다.

최근 계속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신선한 발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풍겨 나오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세상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우리 인류 모두에게 선물 같은 교황님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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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2015년 나해 9월25일 [(녹)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제1독서 
<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5ㄴ─2,9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2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말합니다.

“재벌2세가 꿈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기가 막혔지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전해주었지요. 그러자 이 아버지 역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나도 재벌 아빠가 꿈인데, 아이가 노력을 안 해요.”

사실 옛날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해서 교육의 기회를 갖기가 힘들었지요. 그러나 그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자신은 배우지 못했어도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교육 받은 자녀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했고, 실제로 가난에서 벗어나 보다 더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문제는 요즘 시대에는 워낙 자녀를 조금 낳다보니 모두가 다 고등교육까지 받게 되지요. 또한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부모보다 더 잘 살 것이라는 확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무능함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부모가 왜 부자가 아니어서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자녀는 부모 탓, 부모는 자녀 탓으로 돌리는 시대가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서로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불신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 탓으로 돌리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보다는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분명히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대뜸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라는 소문을 이야기하시지요. 이 소문이 맞는지 틀리는지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소문이 완전히 틀린 것임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너희’라는 단어에 오랫동안 머물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대꾸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곧 세상의 견해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시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정답을 말한 베드로, 아마 모든 제자 역시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해주시지요.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우리, 거짓 없는 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우리,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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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콜린 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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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허리가 몹시 굽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진료실에 나온 할머니가 허리를 쫙 핀 채 지팡이를 짚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할머니에게 의사가 어떤 치료를 해주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별 다른 치료 해준 것은 아니고. 글쎄 전의 지팡이보다 긴 지팡이를 주더라고.”

문제는 짧은 지팡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지팡이가 짧아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삶 안에서도 이러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사랑과 이해의 마음으로의 전환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더욱 더 많아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라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르라는 생각의 전환을 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용감하게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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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삶으로 고백하는 나의 정체성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9월25일 연중 25주간 금요일 루카 9,18-2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삶으로 고백하는 나의 정체성

가끔 내가 누구인지 잊고 살고 있음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할 일이 많아 늘 바쁘고 주어진 직무와 다른 이들의 요구에 응하며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잊은 채 움직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따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뚜렷이 인식하지 않는다면 얼빠진 삶이 될 것입니다.

지금껏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의문을 던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인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시자 사람들은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7,48-49). 또 그분이 풍랑을 가라앉히시자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 하며 놀랐기도 했습니다(8,25).

이제는 거꾸로 예수님께서 그동안 갈릴래아에서 하신 활동의 결과를 알아보려고 당신의 신원에 관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일에 대한 기초를 놓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헤로데의 궁전에까지 퍼졌던, 예수님에 관한 군중의 생각을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닌 예언자 곧, 세례자 요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 등으로 제각기 달리 인식하였습니다(9,19). 정치적 해방과 현세적 구원을 바랐던 그들에게 이런 이해 부족은 너무나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9,20)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9,21)고 분부하십니다. 함구령을 내리신 까닭은 군중들뿐 아니라 사도들 역시 하느님의 아들이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기에 앞서 고통 받고 죽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고 이르셨습니다(9,22).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임무로 받아들여 ‘걸어야 할 길’로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시다가 배척당하고 죽음에 처해지시자만 되살아나실 것입니다.

군중과 베드로의 예수님 이해는 이렇듯 서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로만 바라보고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편견과 고정된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이미 선택받은 민족, 태생 구원의 대상으로 여겼기에 예수님의 치유와 해방을 위한 처사들은 ‘좀 괜찮아 보이고 때로는 놀라움도 주는 예언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문제는 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내 삶과 밀착되고 녹아들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군중들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됩니다.

삶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기울어진 생각이나 닫힌 마음을 열어 주님의 영을 호흡하고 그 영으로 새롭게 보고 하느님의 손길을 맞아들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평소에 무심코 넘겼던 평범한 일들이나 무심코 지나쳐버리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놀라운 창조의 순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께서는 그저 낭만적인 기쁨이나 감상적인 행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수난을 겪어내고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어주신 메시아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길이 우리의 길임을 알아차릴 때 군중과는 다른 우리의 정체성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다운 얼을 지니고 움직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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