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8일 교회가 성장 할 수 있도록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9-18 06:12:18    조회 : 274회    댓글: 0

◈ [서울]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9월18일 금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2ㄹ-12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3
 
지난 수요일 ‘은경축’ 미사가 명동에서 있었습니다. 25년 동안 사목을 하신 신부님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신부님들의 노고를 격려해 주셨고, 선물로 ‘영대’를 주셨습니다. 지난 25년을 열심히 사목하였듯이, 앞으로 남은 날들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목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내년에는 사제 생활 25년이 됩니다. 참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제가 살아온 씨줄과 날줄은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보다는 때로 아픔과 상처가 많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으며, 사목자로서 좋은 표양을 보이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필요 없지만 우리가 아프거나, 사고가 나거나, 피해를 입었을 때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 그것은 보험입니다. 보험의 종류도 무척 많습니다. ‘자동차 보험, 생명 보험, 저축 보험, 화재 보험, 암 보험, 건강 보험, 상조’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보험은 우리들이 위급할 때 도움을 주는 것들입니다.

저도 부모님을 위해서 ‘평화상조’에 가입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평화상조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건강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병원비의 혜택을 받습니다. 자동차 보험을 들어서 26세 이상이면 누구나 저의 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저축 보험도 들어서 매달 조금씩 이자가 나오고 그것으로 부모님을 위한 용돈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떤 보험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보험도 죽게 될 질병에서 치유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혜택을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혹 내가 사망을 하면 나의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보험은 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 겸손, 온유, 나눔, 희생,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보험도 줄 수 없는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난 신앙인들이 천상에서 영원히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성인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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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2015년 나해 9월18일 금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2ㄹ-12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3

얼마 전에 케이블 방송에 출연해서 여러 종파의 종교인들과 토크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주제가 ‘남녀평등’에 관한 것이었지요. 사실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였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신부님, 왜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남자로만 뽑으셨습니까? 이것 남녀차별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남녀차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파격적인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성은 그리 존중받지를 못했었지요. 그래서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집안 정리를 못하거나, 음식을 못하는 것 등등의 이유를 내세워서도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편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12제자 모두가 남자이기는 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여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요.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직분에 맞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고, 또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어떤 종교지도자가 이런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주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많은 불평등이 존재하는 이 세상입니다. 경제, 교육, 건강, 정치적인 불평등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자신이 그 불평등을 체험하지 못하면 지금의 상황이 평등한지 불평등한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평등을 느낀다는 것을 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은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하곤 하지요.

남녀간의 차별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시대에 파격적인 횡보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파격적인 모습으로 모두를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정도의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라는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님의 관점을 마음속에 간직하면 어떨까요?

주님께서도 이런 모습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규정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단지 다를 뿐임을 인정하고 포옹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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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 첫째는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다(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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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대는데 있어서는 국가대표가 아닐까요?

어제 묵상을 하다가 ‘어렸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참 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과학자도 되고 싶었고,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도 되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대통령이라고 말하기에 저도 쫓아서 대통령이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네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사제’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 혼자서 어린이 미사 책을 꺼내들고 신부님께서 하시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대로 쫓아할 정도였지요. 특히 신부님 옆에서 복사를 서면서 ‘사제’는 저의 장래희망 영순위가 되었지요. 그리고 그런 저를 어머니께서도 크게 지지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진학을 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남들 앞에 항상 바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큰 부담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슬그머니 장래희망이 바뀌게 됩니다.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다시 사제성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서 지금 이렇게 사제의 길을 가고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갈등이 있었던 중학교 대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만약 재미없을 것 같다는 핑계, 바르게 평생 살 자신이 없었던 핑계를 대고만 있었다면 분명히 저의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특히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그러한 핑계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하는 소망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 학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생계 때문에 미뤄 두었던 일 등등, 이런저런 핑계로 애써 외면했던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을 언제 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런 핑계를 뒤로 하고서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을 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지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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