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7일 참된 진리를 볼 수 있는 것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9-17 06:05:45    조회 : 279회    댓글: 0

◈ [서울]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9월17일 목요일[(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제1독서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매주 목요일에 신학교엘 가고 있습니다. 신학생들에게 ‘설교학’ 강의를 하기 때문입니다. 정년퇴임을 하신 신부님께서 맡겨 주신 일입니다. 처음에는 겁도 없이 하겠다고 했는데,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습니다. 요즘 신학교에는 도토리들이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수녀님께서 곳곳에 도토리를 담을 수 있는 상자를 놓았습니다. 산보를 하면서 도토리를 주어서 상자에 넣었습니다. 제가 넣은 도토리가 묵이 되어서 학생들의 식탁에 오를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즐겁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전쟁, 폭력, 원망, 분노, 시기, 질투는 모두 우리들의 집착과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도토리나무를 보고 배울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롭고, 아름다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서 1년 이내에 16가지 이상의 예방 주사를 맞는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예방 주사를 맞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방 주사를 통해서 깨끗해진 아이들은 면역체계가 약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고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비염, 아토피, 각종 알레르기에 감염된다고 합니다. 너무나 깨끗해진 아이들의 몸이 그런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4만 년 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환경은 급속하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당뇨, 고혈압, 심장질환, 비만’이라는 새로운 질병과 싸우게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게임, 텔레비전, 컴퓨터’라는 굴레서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들판의 꽃도 보게 하고, 도토리도 줍게 하고, 흐르는 물에 발도 적셔 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가슴으로, 몸으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예방 주사 때문에 오히려 약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신앙은 생활이며 실천입니다. 때문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면 감사하고 고마워 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워하고 분노하면 미워할 일, 분노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복음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씻어 드린 여인은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또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 25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것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것,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넘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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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015년 나해 9월17일 목요일[(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제1독서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어느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서로들 자신의 나이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특기나 장점을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다들 평범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잘 웃어요.”

그러면서 한 번 씩~~ 웃습니다. 이 모습에 서먹서먹한 만남이었던 자리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웃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 세상 안에는 웃음을 잃어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의 웃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우리들은 그 행복을 전하는 일에 너무나도 인색해져 있습니다.

아무튼 이분의 소개를 들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특기와 장점은 참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특기, 장점들은 정말로 많을 수 있습니다. 이분이 소개한 웃음도 있겠지만,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화내지 않는 것, 어렵고 힘든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남의 험담 하지 않기 등등.... 그렇게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만 또 어렵다고 포기할 것도 아닌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뿐 아니라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소중한 일들이라는 것이지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직무유기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라고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 발에 울면서 향유를 발라 드립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었던 바리사이 시몬은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지요. 예수님이 예언자라면 분명 저 여인이 어떤 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것이고, 따라서 여인이 지금 하고 있는 향유를 발라 드리는 행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직접 초대했지만 부정적인 생각만을 품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큰 사랑을 보이려고 노력했던 여인이야말로 죄를 용서받았음을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여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의 표시로 예수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바리사이 시몬은 스스로 올바르다는 생각뿐 정작 초대했던 예수님을 위해 한 행동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도 해야 할 것들이 이 세상에 참으로 많음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위해 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행동들을 할 때, 우리 역시 주님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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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기운을 북돋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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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운 믿음(박광수,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집 안 물건을 훔쳐 내다 파는 못된 도벽이 있었다. 사 형제 중 막내였던 나의 범죄는 대부분 발각되었다. 매번 부모님과 형들에게 혼났지만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시작하여 고등학교 1학년 여름까지 내 도벽은 이어졌으나, 다행히 그해 여름 어떤 일을 계기로 씻은 듯 고쳤다.

당시 우리 가족은 2층 주택에 살았다. 무던히 덥던 어느 날, 2층 방에서 잠깐 잠들었다 깬 나는 1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둘째 형과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툼의 이유는 나였다. 형이 애지중지하던 카메라가 사라졌는데 어머니는 범인이 나라고 단정했다. 어머니의 직감대로 나는 일주일 전쯤 형의 카메라를 청계천 장물아비한테 팔아 버린 터였다.

놀라운 건 형의 반응이었다. 형은 어머니를 나무라고 있었다.

“물건만 없어지면 다그치니까 막내가 더 삐뚤어지는 거예요. 저도 더 찾아볼테니 확인되기까지는 일단 믿어 주자고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차마 1층으로 가지 못하고 다락방에서 다음 날까지 숨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혼자 울었다. 날 믿어 준 형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의 눈물이었을 거다. 이튿날 형의 카메라를 팔았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했는지,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뗐는지는 기억이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그날 이후 내 도벽을 고쳤단 것이다. 누군가가 날 믿어 주려 하는데 그 믿음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이유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믿어준다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그 믿음을 배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를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믿어주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그토록 많은 죄를, 또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는 나에게 또 다시 기회를 주시지요. 바로 우리가 당신의 뜻에 맞게 살 수 있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어줌을 내 마음 안에 굳게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 믿어줌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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