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5일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9-05 06:35:28    조회 : 407회    댓글: 0

◈ [서울]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2015년 나해 9월5일 토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1-23

복음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5
 
인사이동에 따라서 사제들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교구가 커지고, 사목의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인사이동의 소임지도 여러 곳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본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교구청의 여러 부서로 자리를 옮기기도 합니다. 사무처, 사목국, 청소년국, 사회사목국, 해외선교 봉사국, 홍보국, 성소국, 관리국이 있습니다. 학교법인, 해외선교, 교포사목, 해외유학, 국내수학, 중견사제 연수, 바오로 연수, 베드로 연수가 있습니다. 10년 이상 사목을 하면 청할 수 있는 안식년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안식년을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2013년 안식년을 청했는데, 교구장님의 명으로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다른 소임지는 맡겨진 일들이 있지만 안식년은 본인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안식년 중에 택시 운전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세상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수도원에서 글을 쓰기도 합니다. 같은 안식년이지만 결과는 모두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3분이신 하느님께서도 고유한 역할과 담당업무가 있으십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성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고, 느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자이신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십니다. ‘슬기, 지식, 의견, 굳셈, 효경, 두려움, 통달’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위로와 희망, 용기와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는 삼위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위해서 특별히 전구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예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방향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불교의 큰 어르신이신 ‘성철’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께서 연로 하셔서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을 때입니다. 그분의 제자 1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이제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가십니까!’ 성철 스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놈아! 그것을 알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겠느냐!’ 깨달음이 큰 스님도 어디로 가야할지 스스로 알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마지막 말씀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이는 이제 교황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스스로 알기는 어려운 일들을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안내 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방황하는 이들에게, 외로운 이들에게 밝은 빛으로 인도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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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015년 나해 9월5일 토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1-23

복음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5

언젠가 어떤 신부님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의 모습과는 달리 글씨를 너무나 잘 쓰시는 것입니다. 순간 제가 본 것은 그 신부님의 손에 들려 있는 펜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펜이 아니라 조금 특별한 모양의 펜이었지요. 저는 잠시 빌려서 한 번 써보았습니다. 훨씬 잘 써지는 느낌이어서 이 펜이 무슨 펜이고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지요. 아트펜이라고 하며, 미술 용품을 파는 화방에 가면 구입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얼른 화방으로 뛰어 가서 아트펜을 구입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부님처럼 멋진 글씨가 나올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지요.

지금 현재 저는 이 펜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니,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펜을 가지고서도 엉망진창인 저의 글씨체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보다는 글씨를 잘 쓰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도구 탓, 환경 탓을 할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도구가 없어서,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작 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인데도 말이지요.

요즘에 어떤 운동을 시작하려면 먼저 도구부터 구입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자전거 쪽에는 더욱 더 그런 분이 많더군요. 앞으로 계속 탈지 안 탈 지도 모르는데 몇 백 만 원짜리 자전거부터 사고 보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여기에 완전히 선수처럼 보일 정도로 주변 장비까지 완벽하게 구비를 하십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노력과 꾸준함이 있을 때, 비로소 도구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먼저고 자신에게 맞는 도구는 그 다음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중요한 것보다는 중요한 것을 돕기 위한 부차적인 것들에 더 힘을 쏟는 것 같습니다. 전혀 노력하지 않으면서 도구만 구입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바리사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고발합니다. 그런데 그 고발의 내용이 참으로 유치하지요. 즉,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었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뜯은 것이 추수한 것이고, 비빈 것은 타작하는 것이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이 왜 있는지 그 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처럼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그래서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이 제외된 모든 행동들은 주님 앞에서 의미 없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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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의 외면도 바꿀 수 있다(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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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중요할까요?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시험 성적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성적표를 보니, 다 평균 이상인데 수학만 50점을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술은 가장 높은 점수인 100점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이 성적표를 보고서 학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어떤 학원을 보냈을까요?

보통의 엄마는 이 성적표를 보고서는 수학 학원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학점수를 높여야 성적이 좋아질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 엄마는 수학 학원이 아니라 미술 학원 등록을 시켰습니다.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는 생각보다는 잘 하는 것의 재능을 더 키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로 현명한 엄마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모든 과목에서 일등하기를 원하겠지만, 사실 모든 과목을 잘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이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만을 키워주는데 집중할 수 있다면 본인이 잘하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학원을 몇 개씩 끊어서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렸을 때 제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어렸을 때 떠올려지는 추억은 주로 놀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야구하고 축구했던 모습, 하루 종일 동네 공터에서 뛰놀던 시간들만 기억납니다. 공부한 것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하기 싫은 학원 다녔던 시간들이 내게 정말로 좋은 시간이었다고 먼 훗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추억을 떠올리며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러한 추억들을 간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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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5일 토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1-23

복음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5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에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억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오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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