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 나는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9-01 06:56:23    조회 : 375회    댓글: 0

◈ [서울]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9월1일 화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5,1-6.9-11

복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1-37
 
9월의 첫날입니다. 예전에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 소주 ‘처음처럼’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도 ‘맨 처음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국 사람은 술의 이름도 그렇게 ‘처음처럼’ 이라고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외국 친구가 ‘한국 사람들은 술의 이름도 영성적으로 정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참 좋은 말입니다. 9월의 첫날입니다. 처음처럼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권위’라는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권위는 직책에서 오기도 합니다. 군에서는 계급이 권위의 상징입니다. 조직 폭력배의 세계에서도 권위는 바로 서열에서 시작됩니다. 성직자들도 비슷합니다. 본인의 직책이 곧 권위일 때가 많습니다. 권위는 지식에서 오기도 합니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권위의 시작입니다. 의사, 판사, 건축사, 회계사와 같이 특정 분야를 많이 아는 것은 권위를 드러냅니다. 권위는 재산에서 오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권위이기도 합니다. 돈으로 못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바람, 적당한 햇빛, 알맞은 비가 내리면 곡식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좋은 것을 보고, 따듯한 말을 듣고, 사랑을 받으면 닫힌 마음이 열리기 마련입니다. 신학생 때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형태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감탄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크게 4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의 힘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물위를 걷기도 하시고, 풍랑을 잠재우기도 하십니다. 자연을 제어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가장 많이 보여 주신 치유기적입니다. 예전에는 치유란 나쁜 영을 제어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소경, 앉은뱅이, 중풍병자, 나병환자, 열병환자, 하혈하는 여인 등을 치유하였습니다. 이 또한 신적인 능력으로 생각되는 힘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기적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빵의 기적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게도 하셨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백성들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번째는 소생기적입니다. 나자로의 소생, 죽은 소녀의 소생입니다. 이와 같은 기적의 힘이 예수님 권능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은 현대 자본의 힘으로 ,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 유전공학과 같은 학문은 자연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권능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기적, 치유, 눈부신 발전은 신앙이 드러나는 열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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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1테살 5,11)
 
올 여름 유난히 더워서 많이 힘드셨지요?
이제 가을이 시작되는 9월입니다.
제법 하늘도 높고 깨끗한 날이 많고 아침저녁으론 선선하니 참 좋습니다.
밤송이가 영글어 가고 논에 나락이 여물어 가니
가을이 참으로 시작되나 봅니다.
 
9월 시작과 더불어 상쾌한 나날 꾸미시길 빕니다. 
바오로 사도는 9월 첫날에 이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 길을 제시해 주네요.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해 봅시다.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고
남을 깎아내리려 하지 말고 남이 성장하도록 도우라네요. 
그리 하실꺼죠!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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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나는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루카4,31-37)

나는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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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마음을 바꾸면

복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일화가 하나 생각납니다. 수녀님께서는 어느 가게에 들어가 주인에게 “지금 아이가 굶고 있는데 빵을 좀 기부해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이 주인은 “재수 없어. 꺼져!”라고 말을 하면서 수녀님을 향해서 침을 뱉었습니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수녀님께서는 다시 기부를 해달라면서 사정을 했지요. 이 모습을 보고 있었던 봉사자가 울컥하면서 말했습니다.

“수녀님, 굴욕스럽지 않으세요?”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빵을 구하러 왔지. 자존심을 구하러 온 게 아니거든요.”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중요하게 여겼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 체면, 내 소유, 내 명예 등등…….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아야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까?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힘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대단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깨닫고 마귀는 주님 앞에서 꼼짝도 못하지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는 말씀만으로도 마귀는 사람에게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따름이 중요한데, 왜 다른 것들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고 있을까요? 알면서도 참 실천하기 힘들어하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8월달 달력을 한 장 넘겨서 9월달 달력을 펼쳐 보았습니다. 2015년도 4분의 3이 지났다고 생각하니‘올 한 해가 벌써 이렇게 지난거야?’하면서 세월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네요. 그런데 생각을 바꿔봅니다.‘아직도 올 한 해가 4분의 1이나 남은거야?’라고 생각하니 시간이 고맙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바꾸면 주님을 따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죄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기쁘게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꼼짝 못하게 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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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가지씩 기뻐할 것을 찾아라. 다음에는 두 가지를 찾아라. 다음에는 세 가지, 다음에는 한시간에 하나, 다음에는 매 순간에 하나, 그러면 당신은 행복의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오리슨 스웨트 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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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S’중에서, 강원구)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이 생겼다.

진심으로 다가가면 상대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편견이었다. 오히려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보는 능력이 훨씬 중요했다.

세상은 함께 가야만 살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편견이었다.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 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5년째 일을 재계약을 해서 내가 잘난 거라 믿었다. 편견이었다. 같이 일하는 분들이 나를 어여삐 봐주는 거였다.

공과 사는 다른 거라고 굳건히 믿으며 살아왔다. 편견이었다. 공도 사도 다 사람 사는 세상임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편견이었다. 도움을 주고받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잘 바꾸질 않는다. 편견이었다. 물은 오래도록 고이면 썩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치는 인연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편견이었다. 말 그대로 스치는 인연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수많은 편견들을 보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바보인 만큼 나도 바보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것만큼은 편견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지요. 이 글을 보면서 편견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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