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 세례자 요한의 황홀한 일몰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8-29 06:43:15    조회 : 398회    댓글: 0

◈ [서울]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2015년 나해 8월 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은 조그만 충격에도 깨지기 쉽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위는 웬만한 충격에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더러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적자생존, 승자독식, 빈익빈과 부익부’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의 90%는 엄연한 생존의 경쟁에서 견디지 못하고 멸종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의 부는 상위 10%의 사람이 9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욱 가난하게 되고, 부유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의 세계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려는 사람을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렇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셈법이 그렇습니다. 작은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무너트린 다윗이 그렇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려고 하신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 병원을 시작하셨던 요셉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이 그렇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하였던 꽃동네의 오 웅진 신부님이 그렇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늘 함께하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팽목항, 강정마을, 밀양, 평택, 용산’에서는 지금도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발, 발전, 경제, 자본이라는 커다란 산에 드리워진 그늘에는 소외된 이들의 가녀린 신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번 주 복음 말씀은 ‘위선, 편견, 가식, 교만, 욕망’의 껍질을 깨야한다는 예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 운동 역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큰일을 앞둔 사람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은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의 역할을 충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을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제자가 되었고, 세례자 요한을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앞으로 오실분의 길을 준비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하고, 저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의자’를 생각합니다. 성당에 와도, 식당에 가도, 차를 타도, 집에 가도 우리는 의자를 볼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습니다. 의자들은 우리들의 지친 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비워줍니다. 의자가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의자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의자’가 되어준 세례자 요한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기꺼이 남을 위한 ‘의자’가 되어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본당의 많은 봉사들은 가족들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사랑의 의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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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잘못되었으면 고쳐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8월 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잘못되었으면 고쳐라.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 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보고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를 받아야지요.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 머물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 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 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 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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