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6일 사랑의 힘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8-26 07:24:03    조회 : 350회    댓글: 0

◈ [서울]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015년 나해 8월26일 [(녹)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2,9-13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저는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지난주일 동창 신부님들과 조촐한 모임을 함께 하였습니다. 24년 동안 사제로 지내면서 부족한 점들은 반성을 하였고,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한 친구는 10년 이상을 도시 빈민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24년을 본당 사목만 하였습니다. 3친구는 이번에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소국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꾸르실료, 엠이의 일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일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매주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복음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저의 내면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은 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매 순간 충실하지 못하였고, 쓸데없는 것들에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어릴 때, ‘개미와 배짱이’라는 이솝우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개미는 뜨거운 여름에도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이 왔을 때, 개미들은 열심히 일해서 모은 식량을 먹을 수 있었고, 무사히 추운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짱이는 여름 내내 신나게 놀았습니다. 주위에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놀아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왔고, 이제 주위에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짱이는 추운 겨울에 먹을 것이 없었고, 아마도 노숙자 배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배짱이처럼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여름에는 배짱이처럼 살아도, 개미처럼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삶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개미들은 추운 겨울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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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우리가 바로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2015년 나해 8월26일 [(녹)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2,9-13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한 남자가 번화한 도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먹을 것을 구걸하는 한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른의 보살핌을 오랫동안 받지 못해서인지 지저분하고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으며, 배고픔에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지요. 남자는 화가 나서 하느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왜 이 죄 없는 아이를 도우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그의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너를 만들지 않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를 동업자로 삼고 계십니다. 세상을 보다 더 나은 곳으로,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이 손길을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동업자가 되자고 하시는데 과감하게 거절하지요. 복자이신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우리를 통해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그 역할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면서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동업자이신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의 손을 통해서 세상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시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외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도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실천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내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참된 동업자로 참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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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결은 간단하다. 기도를 하는 것이다(복자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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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복자 마더 데레사께서 살아 계실 때,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모든 사랑을 쏟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사람들이 데리고 왔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쥐와 곤충들이 그의 무릎 아래 살을 파먹어 두 다리뼈가 하얗게 드러나 있었고, 남아 있는 살에도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 의심할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자 마더 데레사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최고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방문객이 복자 마더 데레사에게 말합니다.

“나 같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하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사랑의 일에 있어서 주저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성과 편리만을 생각할 때, 사랑이란 단어는 자그마한 글자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사랑은 세상을 강하게 울리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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