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일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에 배고파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8-02 14:33:53    조회 : 256회    댓글: 0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에 배고파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8월2일 연중 제18주일

<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않으며,
나에게 오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복음: 요한 6,24-35

<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에 배고파라 >  

남미 페루의 마추피추를 여행할 때 들은 한국 여행객들의
불평이야기입니다. 마추피추를 가기 위해 내려야 하는 쿠스코라는 도시는
해발 3400미터나 됩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어지러움을 느끼고 마치
꿈속에서 구름을 걷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어떤 이들을 바로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잉카인들의 마지막 피신처였던 산
위의 도시 마추피추에 도착하면 고대인들의 돌을 이용한 건축 솜씨에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남미 여행을 오기 위해서는 여행비용만 90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워낙 비행기를 여러 번 타야해서 호텔에서 자는 시간보다
비행기에서 자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추피추에 도착하면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이렇게 불평한다고 합니다.

“내가 이 돌덩이 보려고 그 많은 돈 내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럼 무얼 보러 온 걸까요? 아마 어느 정도는 남미 여행에 대해 예상을
하고 왔을 텐데 무슨 기대를 하고 온 것일까요? 차라리 그 돈으로 국내
여행하며 즐겼으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물어보지 않고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오나요? 어쩌면 우리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고 그냥 성당에 다니면 다 채워지기를
희망하지는 않나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팀이 만든 TV 전쟁 시리즈물 ‘밴드 오브 브라더스’
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최전방에 침투하여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공수부대 ‘이지 중대’에 대한 실화를 그렸습니다.
여기에서 후블러라는 미국 군인은 독일 장교들이 차고 다니는 권총,
‘루거’를 갖기를 소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전투
속에서 독일군 장교를 죽이고 마침내 루거를 손에 쥐게 됩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전쟁도 끝나가는 판에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것을
바지춤에 끼고 다니다가 총이 발사되어 허벅지를 뚫었고 과다출혈로 죽고
맙니다. 마침내 루거를 손에 넣었으니 기쁘게 죽을 수 있었을까요? 이
경우는 헛된 것을 욕망하며 살다가 그것과 함께 죽는 세상의 많은 이들을
대변해줍니다.

미군들은 독일군이 계속 항복하고 히틀러는 자살하고 그래서 베를린으로
손쉽게 진격해가면서 2년 동안 잃은 수많은 것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수많은 동료를 잃었고 그런 것을 보며 정신이상이 된 이들도 있고 여자와
헤어지거나 전쟁터에서 이혼을 당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묻습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독일에 들어가서 그들은 유태인 수용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들은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그 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후퇴하며 탄약이 부족하여 다
쏴죽이지 못해 살아남은 뼈만 앙상한 유태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드디어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의 싸움은 의미가 있었구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그 고생 덕분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모든 희생들은 다 보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혹은 명예나 돈이나 쾌락과 같은 채워지지
않는 허무한 것들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야만 자신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안다면 이태석 신부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행복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결코 후회 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태어나서 처음 의미 있게 보았던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마침을 작은 죽음으로 본다면 잘 죽는
방법은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모토를 ‘행복’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받고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블러가 루거를 갖기를
원했던 것은 왜일까요? 그것으로 미국 돌아가서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자랑할까요?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봐주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큰 차를 타고 큰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부러움은 질투로, 질투는 미움으로 옮겨갑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 줄 알지만 그 반대입니다. 어떤 누구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이
높여지고 사랑받고 싶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남을 사랑해주는
일은 없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원초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등장하는 강동원은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해서 일부러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나영은 사촌에게 폭행당하고 엄마에게 뺨을 맞고 계속 자살시도를 하는
여자였습니다. 이 둘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강동원은 죽고 싶지 않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인간은 진정 ‘사랑’을
원하고 그 사랑만이 삶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음료와 양식이라고 표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음료는 당신 피요 양식은 당신 살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데도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 가정의 안녕이나 자녀들의 건강을
청합니다. 참 ‘사랑 자체’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허기지고 목마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이 사랑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유투브에 고3 여학생이 벤치에 앉아 우는 연기를 하며 사람들에게 한 번만
안아달라고 청하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학생을 안아주고 밥도 사주려고 하고 자신도 고3 딸이
있다며 힘을 내라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녹화를 마치고 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안아줄 때 진짜 눈물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기를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진짜 위로해주니 그 사랑받는 느낌 때문에 연기가
아닌 진짜 눈물이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사랑’임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찾을 수 없습니다. 처음엔
연기로라도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주님께 안겨봅시다. 그러면 조금씩
마음이 녹고 따듯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목마름의 해갈이고
배고픔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의 심장 살을
오늘도 우리에게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이 곧 사랑입니다.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그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참 ‘사랑’임을 인정하는 이에게는 그래서 ‘성체와
성혈’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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