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1일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5-07-21 07:18:09    조회 : 229회    댓글: 0

◈ [인천]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2015년 나해 7월21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4,21─15,1ㄴ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가장 멋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삶? 나만의 만족을 채우며 사는 삶?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이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멋있는 삶은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지금의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지금의 내 인생은 잘못되었다면서 후회하며 살고 있다면 결코 멋있는 삶도 또 행복한 삶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끊임없이 연연하고, 미래를 계속해서 걱정하면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멋있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신학생 때 은경축을 맞이하시는 어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사제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젊은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은경축을 맞았다고 하면 거의 할아버지쯤으로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25년이나 사제 생활을 하신 신부님께서 다시 태어나도 사제로 살고 싶다는 말을 듣고는 재미없게 똑같은 삶을 다시 왜 사시려고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기에 다시 똑같은 삶을 살아도 만족한다는 표현이었고, 정말로 멋진 삶을 사시는 신부님의 모습인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만족을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은 채워지면 또 다른 것을 채워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후회를 하게 되지요. 그러나 반대로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만족감이 아주 큽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지금 삶을 다시 살아도 너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전 부분의 내용이 더러운 영에 대한 것입니다. 즉, 더러운 영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더러운 영을 누르시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말씀을 가리기 위해서, 예수님 육신에 따른 가족을 데려 온 것이지요. 예수님도 다른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명확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당신 가족을 하찮게 여기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육적인 것보다는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에 만족할 수 있으며, 가장 멋진 삶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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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는 보람은 그 일이 쉬운가 어려운가, 성공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게 아니라, 희망과 인내, 그 일에 쏟아 붓는 노력에 있다(헬렌 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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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것보다는 주는 데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형이 취직을 해서 동생에게 좋은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나도 저런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그런 형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그런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겠어요? 아니면 그렇게 동생을 위한 형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전자의 모습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해하고 또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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