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2일 1명이 11명의 증언을 논리로 제압

작성자 : 디딤돌    작성일시 : 작성일2015-04-12 06:51:33    조회 : 470회    댓글: 0

◈ [인천] 2015년 나해 4월 12일 부활 제2주일

제1독서 사도 4,32-35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제2독서 1요한 5,1-6

사랑하는 여러분,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복음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제가 신학생 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앞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울렁증이 심했던지 남들 앞에 서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지요. 이런 제가 한심하게 느끼면서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저의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인 공포증 같은 것을 느낄 정도로 힘들어하는 제게 어느 날 아주 뜻밖의 사건이 하나 생겼지요. 학부 3학년 말이었는데, 학생회장 후보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제가 되고 싶어서 나간 것이 아니라, 동창들이 강제로 밀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벌벌 떨기만 하는 제가 글쎄 학생회장까지 되었지요.

그 뒤로 앞에 나가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특히 학교가 통합되면서 더욱 더 앞에 나갈 일이 많았지요. 그렇다면 저의 울렁증은 없어졌을까요? 더욱 더 두려웠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사람들이 바보 같은 제 모습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워했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동창들과 신학생 때의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울렁증이 심해서 힘들어했던 저의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 누구도 제가 말을 잘 못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곳저곳 강의를 다니는 제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에도 말을 잘 했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앞에 서서 말을 할 때 전혀 떨지 않는 지금의 저를 보면서 당시와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마음의 평화가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할까 라는 두려움 등으로 마음의 평화가 없으니 더욱 더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서 말을 합니다. 그냥 제 이야기를 담대하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두려움이라는 평화가 없는 상태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그 두려움은 마음의 문까지도 닫아걸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에게 평온과 성령 안에서의 나눔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인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평화의 인사를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해주시지요. 이 힘을 통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에 나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스승님의 부활하심을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두려움 등의 부정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의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이런 나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첫 마디로 평화를 빌어 주었고, 두 번째 말씀 역시 평화였지요.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나타나셨을 때(그 자리에는 토마스 사도도 있었지요) 역시 첫 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이는 많은 두려움 속에 살면서 마음을 닫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평화가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 세상 안에서 잘 살아가는 비결인 것이지요.

힘이 되어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면서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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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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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의 가치

23번이나 가출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부모는 너무 힘들어서 아이에게 화를 내며 말합니다.

“야 이놈아, 집 나간 것이 벌써 몇 번째냐? 넌 아들이 아니라 원수다 원수!!”

어느 날, 동네 사람을 통해 한 지혜로운 현자를 소개받았습니다. 아이 문제를 곧바로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아이가 가출하지 않을까요? 우리 아이게 어떤 좋은 말이 필요할까요?”

이 현자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의 표정은 ‘당신이 날 어쩌겠다는 거야?’라는 식이었고, 전혀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어떻게 23번이나 집으로 돌아올 마음이 들었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그 뒤로 가출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3번이나 가출한 것과, 23번 집으로 돌아온 것. 어떻게 보면 똑같은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간의 변화를 통해서 아이가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나의 관점에서만 말을 하고, 전혀 듣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한 마디 가치를 잃어버리고 사용하지 않았던 적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말의 소중함. 이를 기억하면서 내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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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다

2015년 나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복음: 요한 20,19-31
 
<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다 >

1957년 고아로 출생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12살 때 고아원에서 도망쳐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잡지를 읽고는 삶이 바뀌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중국집 배달로 월급 70만원을 받으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도왔습니다. 1.5평 고시원에 살면서 이십 년 넘게 피던 담배와 안 좋은 것들을 다 끊으며 절약하여 아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후원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2011년 배달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故 김우수씨는 남을 도우면서 자신의 안 좋은 습관들까지 고쳐지고 도울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故 김우수씨는 가난한 아이들이 자기 처지처럼 느껴져 돕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눔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 2주일이기도 하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파우스티나의 ‘자비의 예수’ 그림을 공경할 것을 권하시며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정한 날입니다. 자비란 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상징됩니다. 피와 물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기에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내 것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 자비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로우면서 자기 것을 먼저 챙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명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모든 것입니다. 그 권한을 교회에 주시며 죄의 용서를 위해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교회에 맡겼는데 그 성령을 통한 성사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 받은 성령 때문에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는 이유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아낌없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라고 증언합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이 아무 것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근본구조가 ‘공동소유’였다는 것을 거의 잊었습니다. 나눌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신의 재산을 더 늘려달라는 기도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하느님이 원하신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물질만능 주의는 우리나라의 경쟁적 교육과 사회구조에서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집니다. 공부는 다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 배웁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유산기부가 정착되어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은 어리석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진 자들부터 얼마나 세습을 위해 피땀을 흘립니까?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는 사람에겐 신앙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지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주인으로서의 하느님은 내게 머무실 수 없습니다.

류시문 한맥도시개발 회장은 기부천사로 유명합니다. 어릴 적 사고로 다친 다리와 청력의 문제까지 안고 있지만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하여 지금까지 총 30억을 기부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기부하기로 결정한 힘은 바로 대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 부부가 “너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남을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과 신뢰가 너무 고마워서 그 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닮아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의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에게 비슷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는 세상의 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약속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믿어주셨다면 우리 또한 세상에 복이 되기 위해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나의 복을 먼저 챙길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자신의 돈으로 사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살 땅을 마련하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아내 사라의 무덤을 샀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했던 최초의 땅이었습니다. 복이 되려면 가진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당신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소유의 백성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래서 자신의 것을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잘 살게 되었지만 그 공동소유의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28세의 한 젊은 엄마에게 이혼과 해고라는 두 어려움이 동시에 닥쳐왔습니다. 그녀는 생후 4개월 된 딸과 함께 어려운 시간을 버텨야만 했습니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우는 아기를 달래가며 카페에서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작가의 꿈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복지급여’라는 사회가 베풀어준 고마움이었습니다. 헤리포터라는 글로 1조원이 넘는 재산을 소유하게 된 그녀는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 자선재단을 설립하고 약 500억을 기부했으며 에든버러 대학에는 185억을 어머니를 앗아간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연구비로 기부했으며 익명으로 낸 책의 모든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바닥에 있을 때 영국의 복지를 통해 나는 일어섰습니다. 나는 영국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에 대한 애국심의 표현으로 영국의 납세자로 남고자합니다.”

한 사람도 나라에서 받았던 도움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재산을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데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께 감사한 마음으로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에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해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해 주는 것입니다.

제가 ‘내 것, 내 것...’이란 말을 많이 쓸 때는 아프리카와 인도 친구와 방을 같이 쓰던 신학생 때였습니다. 그들이 저의 것을 마음대로 쓰고 돌려주지 않자 저절로 짜증이 나서 내 것부터 챙기는 버릇이 생겼고 말에서조차 ‘나의 것’이라고 자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아, 사랑이 사라지면 나의 것부터 찾게 되는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생명을 주셔서 생명을 바치셨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나누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나눔이 곧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우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착각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귑시다. 돈을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줄어듭니다. 나중에 그분이 물으실 것입니다. 돈을 더 좋아했는지, 하느님을 더 사랑했는지.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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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1명이 11명의 증언을 논리로 제압
 
2015년 나해 4월12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5

제2독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6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1명이 11명의 증언을 논리로 제압

예수님의 가르침 따라 하느님 모시고 살아야 한다며 평생을 바칩니다.
한 두 명 한 두 번이 아니고 인류사에 엄청난 이들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생각 오류에 매여 믿음에 시쿤둥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와 직결된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설득하려는 11명은 1명의 논리 전개에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도 보면 그만한 비례대로 세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군요. 거, 참!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5)”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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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보지 않고도 믿는 복된 이 
      
2015년 나해 4월12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보지 않고도 믿는 복된 이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저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아니 삶 자체가 두려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참된 삶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성령을 부어주시고 평화를 주신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온갖 불의와 부패로 폐쇄된 세상, 그리고 두려움과 이기심과 아집으로 갇혀 있는 ‘나’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려 다가오신다.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현 앞에서 진실해야 하고 그 무엇도 감출 필요가 없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지인 ‘상처받은 손과 옆구리’를 보고 제자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을 체험한다.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그러한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뵙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불안해한다. 여드레 후,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시어, 토마의 나약한 불신앙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고,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온유와 사랑 깊은 배려 때문에, 토마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이라는 신약의 가장 장엄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이렇게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신앙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먼저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어가도록 하느님을 향하여 개방하는 태도이며 다른 이들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기다림’이며, 계속하여 ‘다시 새롭게 보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그 누구든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을 때, 이웃을 용서할 수 있고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남편의 번민, 자녀들의 성장에의 몸부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들의 신음소리, 친구들의 갈등이나 어려움에 그윽한 사랑의 눈길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란 형제자매들의 체험과 사랑을 겸손되이 받아들여 서로 친교를 나누면서 서로를 인정해 주면서 생명이신 예수를 향하여 ‘더불어’ 나아가는 것이다. 토마는 예수님께서 처음 발현하셨을 때 ‘사도들의 무리’와 함께 있지 않았고,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이었기에 다른 제자들의 예수 부활 체험을 믿지 않았다. 누구든 신앙 공동체와 멀어진다는 것은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과 같다. 부활한 삶은 형제들 안에서 형제들을 통하여 채워지고 비워지는 ‘사랑의 건너감’이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표지이다.

끝으로, 신앙은 볼 수 없는 주님께 대한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인 ‘예’이다. ‘빈 손’은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과 악습들이 묻히는 곳이자 영원한 생명, 기쁨이 시작되는 곳이다. 바로 이 빈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몸짓이다. 이러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으로 토마가 원하는 대로 대해주신 다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다. 그분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먼저 사랑을 베풀었고(루카 5,1-11) 마지막으로 사도적 사명을 맡기실 때에도(요한 21,15-19) 사랑을 요구하셨다. 우리도 다양한 관계에서 불신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탓하기에 앞서 사랑을 베풂으로써 신뢰를 회복해야 하겠다. 우리 모두 어떠한 처지에서도 서로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서로를 탓하기에 앞서 먼저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자. 그리하여 일상의 삶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복된 이들이 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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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2015.04.1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오늘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시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물을 받고싶나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려면 마음속에 의구심이나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거듭 인사하십니다.
평화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얼마나 용서를 잘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아직 잘 모르겠다구요?
그렇다면 오늘 성령을 청하십시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십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십시오.
그러면 내 안에 평화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부활하신 주님께 성령을 청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비를 닮은 용서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비에 충만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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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5년 나해 4월12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5

제2독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6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자신의 모습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릇에 따라서 모양을 바꾸어 줍니다. 물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줍니다. 갈증이 날 때 마시는 한 모금의 물, 가뭄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지구가 생명이 풍성한 푸른 별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공기 없이는 5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입니다. 공기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햇빛이 있습니다. 햇빛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가리지 않고 모두를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비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고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 공기, 햇빛’을 통해서 자비로운 삶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는 지구별입니다. 성공, 출세, 재물, 권력, 명예라는 신기루를 찾아서 끊임없이 오르려고 합니다. 내어 놓으면 볼 수 있고, 멈추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욕심이 쌓아놓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말을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상대방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다면,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너그러워 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보지 말고, 우리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워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자비는 ‘참된 행복’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욕심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자비의 승리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료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던 토마에게도 나타나셔서 “평화를 빈다.”고 말씀하시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를 만났고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그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참다운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제 1독서는 평화를 회복한 제자들의 삶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그 세상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뛰놀고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소풍을 가고 독사들이 춤을 추는 그 기쁨의 날”이 온 것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형제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고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 2독서는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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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평화, 일치, 승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12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4,32-35 1요한5,1-6 요한20,19-31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32-35

제2독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6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평화, 일치, 승리-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 하느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자비하신 하느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우리가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최상 최고의 선물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말그대로 자비로운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어제 노(老)수녀님의 면담성사중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전 번에 주신 보속 말씀이 바로 위의 성서구절이었는데
지키지 못하고 막바지에 넘어졌다하시며 자신의 무자비했음을 반성하였고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드렸습니다.

"넘어지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되어 종국에는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넘어지는 횟수도 적을 것입니다.
이렇게 넘어졌을 때는 겸손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이렇게 죄를 뉘우치고 용서 받으면서 하느님을 닮아 자비하고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사실 겸손과 자비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오늘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은혜로운 지요.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깨달아 닮아 가면서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알게 되어
겸손과 지혜, 자비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에 대한 묵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첫째, 평화(平和)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인상적인 장면은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개인에게가 아닌 제자공동체에 나타나 평화를 선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공동체에 나타나실 때 맨먼저 선사하시는 것이 당신의 평화입니다.
무려 세 차례나 거푸 나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으니 평화와 더불어 기쁨까지 선물로 받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만이 줄 수 있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기쁨, 성령, 용서의 선물이 줄줄이 뒤따릅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의 평화로 마음이 활짝 열린 토마스의 고백도 감동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렇게 주님을 고백할 때 주님의 선물은 확실히 나의 것이 됩니다.
토마스처럼 주님을 보고 믿는 사람보다 보지 않고 믿는 우리가 복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보지도 않고 당신을 믿는 우리를 평화의 선물로 부요케 하십니다.

둘째, 일치(一致)의 선물입니다.

평화의 선물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한마디도 생략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묘사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하니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가진 것을 다 사도들 앞에 내어놓고 저마다 필요한 것을 나누어 받았다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 유토피아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완전 복지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물질과 돈의 탐욕에서 해방된, 이기적인 자기를 비운 모습입니다.
놀라운 회개와 내적변화의 기적입니다.

바로 이런 이상을 추구하는 교회공동체요 수도공동체입니다.
성체성사가 지향하고 추구하고 상징하는 공동체도
이런 한마음, 한뜻의 공동소유에 저마다 필요한 것을 나누어 받는 공동체입니다.

셋째, 승리(勝利)의 선물입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세상과의 전쟁, 궁극에는 자기와의 전쟁입니다.
총칼만 없는 생존경쟁 치열한 전쟁이요 이기적이요 탐욕스런 자기와의 전쟁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승리할 때는 불화요 분열이요 우리가 세상에 승리할 때는 평화요 일치입니다.
보십시오. 세상 곳곳이 불화로 분열로 가득한 현실이 아닙니까?

이런 세상과의 전쟁에 승리의 표지가 주님께서 주신 평화와 일치의 사람이자 공동체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의 평화공동체, 사도행전의 신자들의 일치공동체,
우리의 평화와 일치의 요셉수도공동체는 바로 세상에 대한 승리를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은 2독서 서간에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바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을 때
하느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평화와 일치를 선물하십니다.

십중팔구, 세상과 싸우며 세상을 닮아가고 괴물과 싸우며 괴물을 닮아갑니다.
하여 불화(不和)와 분열(分裂)의 사람이 됩니다.
세상과의 전쟁에, 이기적인 나와의 전쟁에 최상, 최고의 무기는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평화(平和)와 일치(一致)의 선물입니다.
이래야 세상과 싸우면서 세상을 닮지 않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을 닮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온전히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자비의 주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일치를 선물하시어
세상과의 전쟁에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고 받아 모셨으니,
이 신비를 마음 속에 간직하여 평화와 일치의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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