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믿는 이들의 사명

작성자 : 디딤돌    작성일시 : 작성일2015-04-11 06:34:32    조회 : 418회    댓글: 0

☆ 2015년 나해 4월1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 [수도회] 기프란치스코 신부님 - 부활하신 주님의 꾸짖으심 
     
2015년 나해 4월11일 부활 팔일 축제 토, 마르 16,9-15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부활하신 주님의 꾸짖으심

생명의 숨결은 차가운 대지와 앙상한 나뭇가지 저 밑에서도 숨 쉬고 있었다. 그 숨결이 이제 감각의 한계 속에 눈으로 보아야 알아차리고 느끼는 우리에게 새 봄을 알리기 위해 연초록빛을 뿜어내고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이런 자연의 창조적 몸짓은 감각 저 너머의 것을 보고 알아차리며 새로워지라는 하나의 부르심인 듯싶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 한 사람에게, 이어 두 제자에게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나 부활 발현을 보지 못한 자들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16,9-14). 부활의 증인들은 완고한 마음과 감각의 세계에 매여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시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적 믿음의 빛을 비추어 주지 않으시면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다. 곧, 부활신앙은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4)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전에 유다인들의 적대적인 불신앙을 꾸짖을 때 사용하신 적이 있는 표현을 하고 계신다. 성경에서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기관이며 하느님을 느끼는 안테나이다. ‘꾸짖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오네이디센’은 믿음이 없는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에 대해서도 발설되었다(마태 11,20). ‘불신’을 뜻하는 ‘아피스티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보인 태도(마르 6,6)와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완고한 마음’을 나타내는 ‘스클레로카르디아’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께 저항하는 타고난 성향을 가리킨다(마르 10,5). 예수님의 꾸짖음은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열어주고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선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발현하신 것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도 하셨다(16,15).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시어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당신을 믿도록 이끄신다.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불리었고, 그 소명을 수행함으로 인해 그들의 부활 신앙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이렇듯 신앙은 반드시 행동으로 표현될 때 참신앙임이 드러난다. 믿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결단이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서 차별 없는 형제가 되도록 사랑으로 행동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겠다고 약속한 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독선과 고정관념, 완고함을 드러낼 때가 있다. 이런 마음들이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임을 잘 알지 않는가! 오늘도 나를 향해 사랑으로 꾸짖으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 모두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또한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예수님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회 지도자들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거부한 사도들의 태도를 깊이 새겨 주님을 선포하자. 우리에겐 어정쩡한 중간지대나 그럴싸하게 넘어가기 위한 양비론은 존재할 수 없다. 생명과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행동이야말로 그 어떤 반대나 거짓도 부끄럽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임을 되새길 일이다. 완고함과 불신의 안경을 이제는 벗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는 부활 여행을 시작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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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께 희망을 두는

2015년 나해 4월1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제1독서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13-21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15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뽑는다면 아마 ‘노벨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이너마이트(TNT)를 발명하여 사업적으로 성공한 노벨이 유언으로 만들어진 명예로운 상이지요. 노벨이 이 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잘못된 신문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교통사망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노벨의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는데, 신문기사는 노벨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신문기사의 제목이 이런 것입니다.

“희대의 살인마 노벨, 사망하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생명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아무튼 이 기사에 그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결과가 바로 노벨상이라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명예로워하는 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 누구도 노벨을 희대의 살인마라고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을 만들어서 인류 발전에 기여했다면서 칭찬을 하고 있지요.

노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으면 합니다. 즉, 내 마지막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지요.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 후회하고 절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오늘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혼내셨던 이유에 대해 오늘 복음은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나타나셨음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명백한 사실인데도 믿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그대로 절망에 빠졌기 때문에 명백한 사실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않을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역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또한 어떤 좌절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제자들처럼 주님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삶이 아닌, ‘내 마지막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하면서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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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은 사람들이 당신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한 일을 해내는 일이다(월터 배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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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본능

동물이나 어류를 보면,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성장한 뒤에 산란을 위하여 태어난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회귀본능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 역시 이 회귀본능을 가져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즉, 언젠가 다시 되돌아갈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를 잊지 말아야 말아야 합니다.

이 하느님 나라를 잊지 않을 때, 마치 연어가 거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삶의 어려움이 찾아와도 정면으로 부딪히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포기와 좌절을 통해서는 절대로 회귀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되돌아갈 하느님 나라. 그 나라를 향해서 힘차게 살아가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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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2015.04.1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4,20)

여러분은 말을 많이 하나요? 주장이 강한 편인가요?
분명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고 올바른 주장은 굽히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실제로 '보고 들은 것',
즉 직접 체험한 것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간접적으로 주워들은 것을
진실인 양 착각하고 그 주장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sns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심지어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것이 참다운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어떤 의도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한 것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만이
내가 올바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소위 '카더라 통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겠지요.

오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겠지만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것인지 카더라 통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식별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목격증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진실입니다.
그 목격증인들이 어떤 정치적 이유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증언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믿어서는 안되겠지요.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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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믿는 이들의 사명|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1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마르16,9-15)

제1독서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13-21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15

믿는 이들의 사명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보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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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은 하느님을 잊은 증거
 
2015년 나해 4월1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복음: 마르코 16,9-15

< 두려움은 하느님을 잊은 증거 >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씁니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웁니다. 시험을 받는 날 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움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도 소년들은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활을 겨누고 있는 느낌을 받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내 등 뒤에 계신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에게 와서 아우성쳤습니다. 모세가 사라졌으니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하느님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금붙이들을 모아 그들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아론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대사제입니다. 대사제라면 하느님을 두려워했어야 했지만 사람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스운 가축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전쟁을 하고 있던 사울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진영을 이탈했습니다. 사울은 두려워졌습니다. 그러다가는 병사들이 다 떠나갈 것 같았고, 제사장 사무엘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이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왕위에서 쫓겨나는 이유가 되게 됩니다. 두려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추문을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고, 솔로몬은 여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방 신들에게 향을 올렸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을 벗어나는 계기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하와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하느님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가족 간의 분열이나, 나라의 분열까지 서로 갈라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두 부류가 대립합니다. 바로 기득권자들인 유다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에게 어떤 처벌할 방도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백성이 모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것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고 백성들로부터 힘을 얻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요한은 누구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위협에 이렇게 대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함도 성령의 일곱 은사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만을 두려워할 뿐 세상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타이타닉 호가 가라앉을 때 승객들의 불안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 갑판에서 정복을 입은 악대가 성가를 연주하였습니다. 곧 죽음에 임박한 그들은 모두 성가를 부르며 물속에 잠겼습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그분만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눈처럼 우리를 지키십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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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2015년 나해 4월1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제1독서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13-21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15
 
제가 아는 분에게 전화번호를 하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송해 드린 전화번호는 다른 분의 전화번호였습니다. 뜻밖의 전화를 받은 분은 잘못 걸었다고 정중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게 전화번호를 전송받은 분은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이야기를 다시 하였습니다. 잘못된 전화를 받은 분은 다시금 본인은 세례명은 같지만 그 일과는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화를 하신 분은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전화를 받았던 저의 지인은 ‘복음화 학교’에서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마디가 전화를 잘못 받았던 자매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 자매님은 아이들도 다 자라고, 남편도 잘 해 주는데도 기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삶이 단조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생활이 바뀌고, 삶도 활력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전화번호를 잘못 전송해 준 저에게도 고마움의 표시로 예쁜 만년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시곤 합니다. 대녀가 참 많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신데,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저보다 훨씬 좋으십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시고, 이해 해 주시고,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화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던 나약한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담대하게 전하는 뜨거운 신앙인으로 변화였습니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에 태풍이 심하게 불어서 과수원의 사과들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과수원의 농부들은 모두 낙심하고, 걱정을 했는데, 한 농부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10%의 사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팔았다고 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사과’ 그 사과는 10배의 가격을 더 붙여서 팔았습니다. 그해의 수험생들은 ‘떨어지지 않는 사과’를 비싼 가격에도 사서 먹었다고 합니다. 떨어진 90%의 사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았던 10%의 사과를 보았던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숨’을 불어 넣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합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평범한 일들을 통해서 보통사람과는 달리 숙련된 솜씨를 보이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박스를 많이 들고 다니는 사람, 종이를 빨리 접는 사람, 단추를 많이 끼우는 사람, 청소를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하면서 남과는 다른 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무슨 달인이 되어야 할까를 생각합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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