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일 슬픈 배반의 메아리

작성자 : 디딤돌    작성일시 : 작성일2015-04-01 06:55:43    조회 : 833회    댓글: 0

◈ [인천] 2015년 나해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 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복음 마태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

어제는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점심식사를 한 뒤에 책상 앞에 앉았는데 그냥 잠들어 버렸네요. 그것도 잠깐의 시간이 아니라, 1시간 넘게 의자에 앉아서 말이지요. 그런데 일어나서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우선 잘못 잤는지 어깨와 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또한 소화도 잘 되지 않더군요. 식사 한 뒤에 곧바로 잠자지 말라고 했는데, 곧바로 잠드는 바람에 속이 불편한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사자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자는 일단 먹이를 먹기 시작하면 배가 불러서 도저히 못 먹을 정도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잠을 잔답니다. 그것도 잠깐 자는 것이 아니라, 소화가 완전히 될 때까지 일주일이든 이주일이든 상관없이 숨만 헐떡이며 나무그늘에서 쉰다고 합니다. 그러면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 사자에 비한다면 겨우 1시간 정도 잤을 뿐인데 사자는 괜찮고 저는 왜 속이 불편할까요?

사자를 괴롭히는 적이라 할 수 있는 똥파리 때문이랍니다. 아프리카 정글의 똥파리는 우리나라의 파리보다 4배 이상 크다고 합니다. 그 큰 파리가 사자의 눈과 귀를 비롯한 온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 먹는 것입니다. 꼼짝하기 싫은 사자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떨어트리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덕분에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는답니다. 즉, 몸을 움직여서 운동이 되고, 그래서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자에게 있어서 똥파리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사자에게 똥파리는 은인인 것입니다. 물론 고맙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니 제 곁에도 귀찮은 사람, 귀찮게 하는 환경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제게 고통과 시련을 주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니,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저를 더욱 더 성장하게 해주는 그래서 지금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은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근심하며 말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이 질문을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 역시 똑같이 말합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똑같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즉, 주님과 스승님의 차이가 보입니다. 왜 유다는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썼을까요? 주님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일 뿐인 스승을 배반한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만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배반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주님을 통해서 인간적인 안녕만을 얻고자 한다면,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도와주는 한 인간으로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언제든지 주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음을 유다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고통과 시련 앞에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해주시는 인간적인 측면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유다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감사해야 할 대상, 바로 우리들의 참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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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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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날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참 별 것을 다 연구한다 싶더군요. 글쎄 ‘연인과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시간은 얼마인가?’가 연구 내용이었습니다. 우선 결론을 이야기하면 11주 정도면 이별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을 인터뷰해 보니, 세 달 정도 지나면 이별이 주는 오히려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고통, 시련, 아픔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것 같고, 내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머무르지 말고 딱 세 달만 참아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이를 통해서 얻게 되는 좋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칼럼 리스트인 제니 앨런은 항암 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버렸고 이로 인해 의기소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발을 쓰고 다니면서 자신의 빠진 머리카락을 숨겼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강한 바람에 이 가발이 훌러덩 벗겨진 것입니다. 분명히 망신의 순간인데 제니 앨런은 오히려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 자신을 숨기고 살았는지를 반성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여함을 깨달을 수 있었지요.

망신의 순간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특별하지 않은 날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의 닫힌 마음이 문제일 뿐이지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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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슬픈 배반의 메아리 
    
2015년 나해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 26,14-25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0)

슬픈 배반의 메아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장 친밀했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분을 배반했다는 슬픈 사실이 부각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갖가지 표징과 행적을 목격하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배웠다. 그러나 유다는 겨우 종 한 명 값인(탈출 21,32 참조) 은전 서른 닢에 그분을 팔아넘겼다. 예수 수난사의 열쇠가 되는 “넘겨주다”라는 말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형에 개입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장 친밀하게 함께 지내던 제자의 손에 의해 ‘철저한 무력함’에 내맡겨지게 된다.

과월절 전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축제를 준비하고, 그분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르심에 따라 그곳에 모이게 된다. 누가 방을 제공해줄지 모르나 예수님의 지시는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탈것을 준비하실 때처럼 분명하고 위엄이 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의 때가 임박했음을 뜻하는 “나의 때가 가까웠다”(26,18)는 말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식사는 단지 열두 제자와 낯선 사람의 집에 가족들도 없이 차려진다. “나의 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야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다가왔음을 아시고 자신을 내맡기신다. 이제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이 끝나가고, 그분은 그들이 순종하는 주인이요 주님으로 남으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6,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유월절 잔치에(탈출 13,13 이하)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고대에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것은 우정과 평화의 표시이며 확고한 동지애의 상징이었다. 그 식탁에 앉았던 배반자의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유다는 예수님은 물론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6,24)라고 하신다. 그분은 ‘남을 죄짓게 하는 불행한’(18,7) 유다에게는 걸림돌이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다의 죄악을 폭로하셨다. 그의 근본적인 죄는 예수님을 자기 경험과 돈으로 저울질하고 자기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변화시키려 한 점이다.

오늘도 유다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지는 않는가? 유다는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을 통하여 제멋대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을 참 자유로 여기는 교만에 빠졌다. 유다처럼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외면하며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만을 추구하기에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유다는 제멋대로 생각하고 자기만의 사고방식과 기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다. 결국 그는 마음대로 판단하여 하느님이 주신 목숨을 끊어버렸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의 중심이요 원천은 역시 하느님이시다. 신앙은 겉으로 보면 끝까지 손해 보는 길이나 그 길은 보이지 않는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길이요 하느님 친히 책임져주시는 길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데 도구로 쓰려하였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한 처사이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도구요 심부름꾼으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모든 이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를 섬기는 데 있다. 오늘도 제자들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6,25)라는 말이 울려퍼진다. 이 시대에 자기다운 신앙의 고백,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줏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드물다.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면서도 결국 자신만은 의인인 듯 처신하려는 바리사이들의 태도가 배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혹시 나의 속마음과 언행이 그분을 팔아넘기고 있지는 않을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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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저는 아니겠지요?|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26,14-25)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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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귀의 할례

2015년 나해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복음: 마태오 26,14-25
 
< 귀의 할례 >

중국 푸순에 사는 유펑이란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산에서 부상당한 뱀을 발견하여 집으로 들고 들어와 20일 동안 정성스럽게 보살펴주었습니다. 그 후로 한 달 후쯤 뱀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였습니다. 유펑은 뱀을 인근 산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뱀은 다시 유펑의 집에 돌아옵니다. 두 번 이상 같은 일이 일어나니 유펑은 아예 뱀을 집에서 키우기로 하고 뱀의 이름을 ‘롱롱’이라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펑이 잠을 자다가 전기장판에서 불이 붙어 자칫 목숨을 잃을 번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이 뱀 롱롱이는 필사적으로 유펑을 깨웠다고 합니다. 롱롱이는 유펑의 얼굴을 문대기도 하고, 이빨로 옷을 끌어당기는 등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여 주인인 유펑이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불을 끄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출처: 정보경, 스포츠서울, “현대판 결초보은 - 주인에 은혜 갚은 뱀”, 2010-01-04]

중국에서는 참 별 일도 다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결초보은이란 말이 있듯이 동물조차도 은혜에 보답을 하는 모습은 우리 자신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만 정작 그분께 어떠한 보은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독서는 이사야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메시아는 ‘주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귀는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첫 통로입니다. 통로가 막힌다면 들리지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됩니다. 또한 귀가 뚫려있어야 말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자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 자체가 말 하는 이에 대한 폭력입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사도 7,57-58)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귀를 막은 이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땅에 당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늘 예언은 본질이 말씀이신 분인데 귀를 막은 이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리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의롭다고 하는 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다만 그분은 당신에 대한 폭력을 행사한 이의 목소리를 당신도 외면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나중에 내가 구원을 청해야 할 때 그분도 귀를 막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돌아와 주님 앞에서 울었지만, 주님께서는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셨다.”(신명 1,45)

결국 우리도 마음의 할례, 눈의 할례, 귀의 할례를 받아야합니다. 마치 성령을 통하여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고, 돌처럼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민감하게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들을 이렇게 꾸짖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항구한 ‘종’이 되는 사람의 귀를 송곳으로 뚫는 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을 통한 귀의 할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그를 하느님께 데리고 가서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세우고,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는다. 그러면 그는 종신토록 그의 종이 된다.”(탈출 21,6)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가 곧 당신 자신이라며 우리 귀를 열라고 하십니다.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

내가 먼저 귀를 열어 듣지 않으면 세상 누구도 차후엔 주님까지도 나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이웃의 소리에 귀를 열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만이라도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세상에 이렇게 죽어가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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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2015.04.0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이사 50,7)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엘리어트의 "황무지" 주검의 매장 단락을 다시 읽어봅니다.
1년전 성주간 수요일 우리는 세월호 침몰로 가장 잔인한 달을 맞았었지요.

황무지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듯이 세월호의 아픔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주님의 종은 어떤 고통과 모욕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굳게 믿으니 늘 희망의 사람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어떤 고통과 모욕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굳게 믿음으로써
죽은 아이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리란
희망을 잃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주님께서 여러분
편이심을 잊지말고 꿋꿋이 견디시는 오늘 되십시오.
이제 부활은 얼마남지 않았으니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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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평생학인(平生學人)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이사50,4-9ㄴ 마태26,14-25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평생학인(平生學人)

어제 봄비에 젖어 샛노랗게 활짝 피어난 개나리꽃들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듯 주변이 환해졌습니다.

-활짝/깨어났다/깨어있다
 주변이 환하다
 샛노랗게/피어난/개나리 꽃들
 하늘 봄비/은총에/촉촉히 젖어-

이렇게 하늘 은총 사랑에 젖어 '활짝 깨어나', '활짝 피어나'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이 평생학인입니다.
내 좋아하는 말마디중 하나가 학인에다 평생을 붙인 '평생 배우는 사람'이란 뜻의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요 가장 쉬운 것이 남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이며 결국 공부의 본질도 자기를 아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공부 역시 결국은 자기를 아는 공부와 함께 갑니다.

그러니 평생학인(學人)'은 '평생공부(工夫)'란 말마디와 직결됩니다.
하여 제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란 글에서도 이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평생학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런 관점에서 오늘 불행한 제자 유다에 대해 묵상합니다.
불행(不幸)인지 불운(不運)인지 판단하기 애매합니다.

환경보다는 타고 나는 선천적인 것도 많고 본인도 어쩔수 없는 일도 많기에
쉽사리 판단할 수 없어 때로는 '운명이다'란 말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우선 유다에 대한 변명입니다.
유다를 생각하면 일말의 동정심에 연민의 마음도 듭니다.

오죽 예수님께 실망했고 제자단에서 소외감을 느꼈으면 스승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길 정도로 망가졌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황을 보면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그리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어제 복음의 장면을 봐도 유다가 받았을 모멸감과 소외감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고 그 맞은 편에 유다가 있습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이렇게 다정히 묻는 사랑받던 제자의 모습을 봤을 때의 유다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평소에도 유다는 예수님의 인정이나 호의는 별로 받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성격은 운명이다'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성격은 쉽게 바뀔 수 없기에 많이 공감합니다만 이러다 보면 숙명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을 죽인 카인을 인정할 수 없듯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대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운명에다가 책임감까지 온통 떠 넘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성경에 따라(according to the Scripture)'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그가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

바로 유다에게 부족한  하나가 제자직에 절대적인 장인정신과도 같은 공부정신이었음을 봅니다.
평생공부의 평생학인이 되어 제자정신에 투철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망가뜨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이 바람직한 제자상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이렇게 깨어 제자의 혀를, 열린 귀를 지니고 살며 평생공부에 항구했다면 예수님도 감동하셨을 것이며
운명같은 성격의 결함도 하느님 은총으로 능히 극복했을 것입니다.
이런 평생 하느님 공부에 투철할 때 저절로 나오는 다음과 같은 확신의 고백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하느님과 자기공부에 평생 항구했던 평생학인만이 할 수 있는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며칠 전 주간경향(2015.3.24)에 나온 주철환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 제자상을 발견했습니다.
몇 대목을 나눕니다.

"나이든 것(old man)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옛날에 만든 낡은 지도(old map)를 갖고 길을 찾으며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진대사만큼 동화작용도 필요하죠.
머물지 않고 늘 움직이며 새로운 세대에 스며드는 힘을 뜻합니다.“

"스타보다는 등대가 되고 싶어요.
세상이 바뀌고 별은 사라져도 등대는 늘 지표가 되니까요.“

"저는 빠질 때 빠지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랑이나 열정, 혹은 가슴이 뛰는 일에는 풍덩 빠지라는 것이고, 자신이 빠져줘야 할 자리에서는 슬며시 물러나라는 뜻입니다.“

"'외로움의 역에 오래 머물지 말고 그리움의 역으로 빨리 가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지독한 외로움이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성격순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고 남에게 친절하려는 것이 제 인생 모토입니다.“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주님의 제자상에도 맞갖은 주 교수의 삶같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제자직에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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