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8일 화해의 피가 뿌려진 땅

작성자 : 디딤돌    작성일시 : 작성일2015-03-28 06:05:51    조회 : 521회    댓글: 0

◈ [인천] 2015년 나해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에제 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 요한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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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명한 수필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적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에게서 너무 많은 남자와 여자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표현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힘세고 대범하시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만능으로 아주 강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이 일기장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너무나 나약한 마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소극적이 되고 마는 마음, 어려운 상황에 대한 걱정거리로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힘들어 함이 가득 차 있는 일기였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내 자신 역시 비춰지는 모습과 실제 내 안의 내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물론 이 간격을 좁히고자 노력하지만 평생가도 완전히 똑같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내면의 자아가 남들에게 비춰지는 것을 벌거벗은 몸이 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이렇다면 다른 이들은 안 그렇겠습니까? 다른 이들 역시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내면이 분명 다르고, 세상의 사람들이 이 다름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온전히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히 예수님의 숨겨진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모든 것을 다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겉모습이 전부라면서 나머지는 다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사람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이상한 논리까지도 펼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내가 만나는 모든 이의 외면보다는 내면을 바라보도록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쉽게 판단내리는 것이 아닌, 좀 더 오래 바라보고 그 사람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한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곁에 조용히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2천 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이기에, 이제는 내 이웃의 내면을 통해서 더 쉽게 당신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던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지 않는 주님을 원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질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질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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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판단력은 천천히 걸어오지만, 편견은 무리 지어 달려온다(장 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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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수 있는 힘(‘좋은 생각’ 중에서)

플린트는 위렌 버핏의 전용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일했다.

어느 날 플린트는 자신의 경력과 목표에 대해 버핏과 이야기를 나눴다. 버핏이 말했다. “자네는 목표가 무엇인가? 현재 가장 중요한 목표 스물다섯 가지를 적어 보게.” 플린트는 몇 분에 걸쳐 목록을 완성했다.

“스물다섯 가지를 다 적었으면,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에 동그라미를 쳐 보게.” 플린트는 이내 다섯 가지 목표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아! 이제 제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럼 동그라미 치지 않은 나머지 목표들을 어떻게 할 건가?” “동그라미 친 다섯 가지야말로 제가 집중해야 할 목표입니다. 다섯 가지 목표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고 나머지 스무 가지도 놓칠 수 없으니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노력해 이루어야죠.”

이에 버핏이 말했다. “그게 아니야! 자네는 지금 실수하는 거야. 동그라미 친 다섯 가지 외의 목표는 어떻게든 버려야 할 것이지. 자네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목표를 전부 달성하기 전까지는 나머지 스무 가지 목표에 관심도 기울여선 안 되네.”

때론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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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화해의 피가 뿌려진 땅

2015년 나해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화해의 피가 뿌려진 땅

한 소년이 여름방학이 되어 시골 외갓집에 누이동생과 함께 놀러갔습니다.
외갓집에 도착한 소년은 고무 새총을 가지고 돌로 날아다니는 새를 맞히려고 하였지만 아무것도 맞추지 못하였습니다. 실망한 아이 앞에 할머니께서 아끼시는 오리가 오고 있었습니다. 장난삼아 제일 큰 돌을 꺼내어 새총에 넣어서 오리를 향하여 쏘았는데 머리에 맞더니 꽥 하는 비명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죽은 오리를 몰래 땅에 묻고는 집에 와서 두려움에 누이동생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할머니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굳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동생은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할머니께 오리 죽인 것을 이르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모두 오빠에게 시켰습니다.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던 그 아이는 동생이 없을 때 할머니를 찾아가 울면서 모든 일을 고백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언제 네가 와서 용서를 구하는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용서를 구했으니 내가 용서를 해 주마. 아무 걱정하지 마라. 손자가 더 귀하지 오리가 더 중요하냐”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서로 잘못에 대한 상대의 탓을 하고 미워하게 된 원인은 바로 ‘죄’에 있었습니다. 그 죄의 탓을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해 댔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타인에게 죗값을 지우는 것이 인간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죗값을 누군가 치러주면 더 이상 남 탓을 하며 싸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위의 예화에서 할머니가 오리가 죽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게 되면 이제 소년과 누이동생 간의 불화도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하늘나라 백성의 평화와 화해와 일치로 하나 됨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미움이나 분열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각자의 죄가 한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의 탓을 할 필요가 없이 오로지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곳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가 사해졌는데 누가 누구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죄를 지닌 우리 각자를 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죄를 속량해주시는 한 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 뿌려져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생명의 땅이 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겨시는 것을 ‘정결’이라고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를 감쌌던 수위에 그분의 피와 모습이 새겨져 가장 귀한 보물이 된 것처럼 우리 각자도 그분의 피를 받아 죄가 사해지고 그분을 모시는 성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죄의 부담을 벗어버렸기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겸손한 그리스도를 모신 공동체가 됩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예언된 하느님나라의 성취를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 카야파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동지사 대학의 초대 총장인 ‘니이지마죠’의 이야기입니다. 한때 그 대학에 분규가 일어났습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완전히 두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어느 날 총장님은 교직원들과 전교생을 모았습니다. 총장님은 이번 분규의 총책임자를 엄하게 처벌하겠다고 엄숙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총장님은 팔을 걷어 올렸습니다. 굵은 벚꽃 나무 막대기로 자신의 팔을 계속 사정없이 세게 내려쳤습니다. 막대기는 꺾어지고 팔에는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모두 총장이 피를 흘리고 있는 앞자리로 나와 엎드렸습니다. 모두 자기들이 잘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로써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화해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로서 죄가 용서받은 백성들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비판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이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로부터 속죄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죽은 땅입니다. 아직은 하느님나라 백성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 피의 의미를 아는 이에게만 양심에서 죄의 부담감을 덜어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가 되게 됩니다. 마치 용서를 받은 간음한 여인처럼 누구도 파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진정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겼다는 증거는 바로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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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공동체와 전례 -분열과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37,21ㄴ-28 요한11,45-56

공동체와 전례 -분열과 일치-

오늘은 '공동체와 전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마침 새벽에 눈뜨니 한 눈에 들어 온 예전 내 영명축일에
최루멘 수녀가 선물한 성경을 들고 계신 예수님의 이콘이었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렉시오 디비나와 전례'였습니다.
어제 미사전 잠시 빠코미오 원장수사에게 한 조언이 생각납니다.

"개신교 신학생들에게 '수도승 영성', '공동체와 전례'에 대해 강조해
주십시오. 개신교에서 아주 부족한 면이고 가톨릭교회에 배우고 싶어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요셉수도원은 개신교 신학생들의 교육기관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요셉수도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지의 조언이었습니다.
교회일치를 위한, 가톨릭교회는 물론 수도원에 대한 이해에 요셉수도원의
역할이 매우 큽니다. 아주 예전부터 끊임없이 요셉수도원을 찾는 개신교
신자들, 신학생들, 수도자들, 목사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런 교회의 전통과 뿌리를 찾는 흐름입니다.
이분들이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찾는 부분이 '공동체와 전례'일 것입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렉시오 디비나와 전례'였는데, '공동체와 전례'
'성서와 전례'등 전례가 가톨릭교회의 영성에 얼마나 중심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여 우리 교회는 물론 수도원의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공동체와 전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서의 진리를 현재화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하는 전례의 역할입니다.
'삶의 전례화', '전례의 삶화'를 통해 육화의 신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
집니다. 사람이 전례를 거행하고 전례가 사람을 만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절로 떠오른 '공동체와 전례'라는 주제입니다.
사람이, 악마가 조장하는 일이 '분열'이라면, 하느님이, 전례가 하는 일은
'일치'입니다. 분열을 치유하여 일치로 이끌어주는 전례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목자들이 할 일은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을 일치에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다음 에제키엘의 예언이 예수님의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놀랍게도 바로 우리 가운데에 있는 주님의 거처인 이 성전에서의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체험되는 공동체의 일치와 평화입니다.
하느님은 전례를 통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바로 다음 에제키엘을 통한 주님의 말씀도 전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바로 주님 부활을 앞둔 사순시기 전례의 정화(淨化)은총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생각나는 것이 아침성무일도 찬미가의 한 연입니다.

"예수의 아름다운 광명으로써/구원의 복된 날이 비추는도다.
 죄악의 상처입은 우리마음은/전례로 말끔히도 회복되도다.“

오늘 복음의 대사제 가야파의 예언에 대한 해설도 전례에 일치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요한11,51ㄴ-52).

바로 가톨릭교회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일치입니다.
강론 준비 중 읽은 주석 부분도 나눕니다.

'사순시기 동안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끈 사건들을 묵상하는 우리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잊어선 안된다. 즉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당대의 사람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분 '사랑의 위업'을 기억할 수
있기 위해서 읽는다. 결코 그분의 죽음에 대한 책임 추궁의 비난을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가이없이 넓고 깊은 사랑을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영원한 표지가 이 거룩한 미사전례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며 치유하시고, 정화하시고 성화하시어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내적일치를 이루어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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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두려움과 악 가운데서 드러나는 거룩함 
    
2015년 나해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요한 11,45-56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11,45)

두려움과 악 가운데서 드러나는 거룩함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 인생이다. 그럼에도 교만의 싹이 올라오면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받들며 하느님을 소외시키고 제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럴수록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할 것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배지로부터의 귀향과 새로운 다윗 왕조의 복원에 대한 약속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7,21.23)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릴 새로운 임금이요 유일한 목자인 다윗의 지팡이 아래 모이게 해주실 것이다(37,24).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평화의 계약(37,26)을 맺으시고, 다시 한 번 예전처럼 그들 가운데에, 그들의 성전에 영원히 머무르실 것이다(37,27-28; 마르 14,58). 이 예언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의 대가로 사람들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때에야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본성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게 하지 않으실 수 없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유배의 운명에서 구하시려는 것은 그들의 덕이나 회개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당신이 참 하느님이심을 알리고, 뭇 민족들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본 사람들은 각기 달리 반응하였다. 그렇게 하느님의 선과 생명은 군중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 많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1,4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인간의 권력을 의식하여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11,46).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11,48)라고 말하며 두려워한다. 그들은 백성들의 동요와 그로 인한 로마의 침략과 파괴가 두려워 불안해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대사제 카야파는 그들에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11,50). 곧, 죄가 있건 없건 간에 예수님은 정치적인 이유로 민족의 안전을 위하여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겉으로는 실은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자구책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예수님의 죽음이 곧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적 죽음임을 예언한 셈이다(11,51-52).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곧바로 '그날' 죽이기로 결의하였다(11,53).

카야파에게서 보듯이 겉으로 그럴싸하게 드러내는 선(善)과 참 선은 겉모습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도 자문해야 한다. 나 자신과 내가 소속된 공동체의 일반적인 사고(思考)나 말과 행동이 어떤 지향으로 무엇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것이 의로움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이로움을 추구하고 있는가? 나 역시 불신 속에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했던 유다 지도자들처럼 다른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을 시기하지는 않는가? 주님! 당신은 우리의 두려움과 악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을 드러내시니 오늘도 바르고 순수하고 참된 지향을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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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나해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요한 11,46-56)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굿은 일에는 나이고 생색나는 일에는 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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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2015.03.2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참으로 지당하고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카야파가 한 말입니다.
그해의 대사제로서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했다면
참으로 멋진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남을, 예수를 그 희생제물로 삼자는 이야기이니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하나로 모으고 흩어지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또다른 희생제물이 필요할까요?

그것이 천안함 장병들인가요? 세월호 학생들인가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데
기여하는 참다운 희생봉헌이 되기를 빌어야겠지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일상의 삶 안에서
남을 위해 더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또다른 예수,
제2의 예수(alter Jesus)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남이 아니라 내가
자청해서 되어봅시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고
부활하는 길임을 명심합시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부활을 맞이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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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5주간 토요일

2015년 나해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한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기업이 외국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한국의 드라마는 ‘구성, 연기, 의상, 심리묘사’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권선징악, 고진감래, 사필귀정, 호사다마, 회자정리’ 등의 삶의 모습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특징은 ‘출생의 비밀’이 많은 것입니다. 주인공은 갖은 고생을 하곤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주인공을 끝없는 궁지로 몰아가곤 합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역경을 이겨내고, 따듯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기도 하고, 악을 물리치고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저는 1963년 4월 15일에 태어났습니다. 제 인생의 드라마는 53년 동안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건강을 타고 나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1991년 유행성 출혈 열로 고생을 하였고, 2012년 발목 골절로 수술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통풍과 혈압도 오랜 친구로 함께 지내고 있고, 치아가 좋지 않아서 거친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편입니다. 2년간 캐나다에서 살기도 했고, 여행도 많이 다녔고, 사제로서 24년을 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시련은 있지만 절망은 없다.’는 말처럼 주어진 하루를 기쁘게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드라마는 어떠하신지요? 어떤 환경에 있어도 인생의 드라마는 본인이 주인공입니다.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삶이 고단해도 하느님께서는 감독으로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여러분들의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의 절정인 ‘성주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인 드라마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 죽음, 부활의 드라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새로운 역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러분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지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저버린 빌라도, 무관심으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군중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낙원에 들어간 죄인일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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