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고난의 언덕 저 너머의 빛을 바라보며

작성자 : 디딤돌    작성일시 : 작성일2015-03-27 06:41:35    조회 : 55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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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수도회] 고난의 언덕 저 너머의 빛을 바라보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예레 20,10-13 † 복음 요한 1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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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레미야는 박해를 받는다. 가까운 이들도 모두 그를 거부한다. 박해자들은 숫자도 많고 강하지만,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박해자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을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분께 돌을 던지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신다.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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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서를 강의하다가 신학생에게서 예언자들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인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곧, 신탁(神託)이나 예언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주어졌을 때, 예언자들 가운데는 그 말씀이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기에 바로 대답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말해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분명한 확신이 있지 않았더라면 예레미야처럼 목숨을 걸고 죽기까지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자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군중의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그의 말과 삶이 그의 확신을 방증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다섯 편의 고백록 가운데 마지막 편에 해당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그동안 묵상해 온,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예레미야의 태도도, 예수님의 태도도 시종일관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고 그분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맞서시는 예수님의 대답도 지극히 단호하고 당당합니다. 당신 자신의 처신에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용기가 솟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여 사람들이 돌을 던지더라도 나의 길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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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고난의 언덕 저 너머의 빛을 바라보며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요한 10,37) 고난의 언덕 저 너머의 빛을 바라보며 때로는 오해받고, 뜻하지 않은 일로 조롱당하거나 멸시를 당하기도 하는 우리네 인생길과도 같은 사순시기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과 하느님의 죽음의 신비 한복판으로 가는 모퉁이길에서 유다인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의 중요한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이 임박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하느님에 대하여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요한 5,18; 7,11-31 참조). 나아가 예수님의 행동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요한 11,48-57 참조). 유다인들은 유연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편견과 선입견, 의식을 조종해 버릴 정도의 습관에 젖어 예수님께 일관되게 반응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있어서도 모든 계층과 여러 집단들이 각자 자기식대로 한몫을 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 처형을 위한 각본을 짰고,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음모를 지휘했으며, 그 과정을 충동질하였고, 증인을 마련하고 결정을 강요했다. 두 명의 수석사제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경전 내용을 왜곡하였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경멸의 말을 퍼부었고,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상투적인 말로 예수님이 바보임을 보여주려 했다. 여종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하였고, 따돌림 받은 강도까지도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군인들은 실패자로 보이는 예수님의 고통을 조롱했다. 백성들도 이때만은 상류층과 야합하여 예수님의 처형에 동조하였다. 유다인들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을 보여준 것이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삼아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자들로서, 예수님 안에 머물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누려오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정의와 사랑 곧 더불어 사는 세상을 싫어하며 계속 상승 구도 속의 지배만을 바란다. 그들의 돌보다도 더 무딘 마음과 차가운 무관심, 그리고 불신과 적개심에서 비롯된 공격적인 태도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의 태도는 또 한사람의 유다인은 아닐까? 서로에게 무심코 던지는 모진 말, 상처를 입히는 행동, 무관심, 불신, 보복하려는 마음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이 지녔던 것들이다. 나 역시 나에게 세상적 편의와 만족을 가져다주는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빠져들지는 않는가?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10,31) 그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셨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죽은 나자로를 부활시키신 예수님, 곧 하느님의 생명을 죽이려 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돌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적개심을 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비인격적인 말 한마디, 냉정한 태도, 왜곡된 시선, 부정적 비난, 자기중심적인 감정표현 등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엄청난 상처를 줄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유다인이기를 거부하면서 들었던 돌을 내려놓으며 예수님께 달려가자. 서로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안도록 하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셨던가? 그분은 유다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과 적대적인 태도,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셨다. 십자가상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회피하거나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피해 가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에 앞서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삶이 고단하고 힘겨울 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던 순간들과 하느님 안에서 맛보았던 참기쁨의 장소를 회상해보자. 그렇게 조용히 아버지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분 친히 나의 위로가 되어주시며 힘이 되어주실 것이다. 세상적인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없을 테니까...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미리 보여주었다. 그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을 받아야 했다. 그는 소명을 주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절규한다. 그의 기도는 분노와 복수의 외침에서 주님께 대한 신뢰와 찬미로 이어진다. 그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갈등하고 번민하며 주저할 때가 있다. 그러나 고난의 언덕 저 너머 비치는 부활의 빛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주님과 더불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자! 깊은 신뢰와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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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믿음의 효력은 끝이 없다.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세상에서 가장 실천하기 힘든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용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종종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곳인 고해소에서조차 “저 사람만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요.”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 안에서 용서란 너무나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겠지요. 솔직히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용서해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 하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대방이 ‘3회 이상, 또는 7회, 10회 이하의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용서할 수 있다.’ 식의 법이 있습니까? 없는데도 우리는 내 안에서 그 사람이 자격이 있냐 없냐를 따져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요. 주님께서는 항상 이 용서를 안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을 향해 돌을 던져서 죽이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만나는 것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아무런 불평 없이 걸으십니다. 이렇게 의연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인간 모두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그들 앞에 서실 수 있었던 것이고, 의연한 태도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를 청하지 않은 사람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그 누구도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시기 위해서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단죄하려는 과거 유다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이성적인 생각, 즉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만을 진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은 어느 정도까지만 통할 뿐입니다. 그에 반해 믿음의 효력은 끝이 없지요. 또한 이성은 ‘의심’이라는 부정적인 예상이나 느낌을 가져오기에 성취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성인 성녀들의 삶은 당대에는 ‘괴짜’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계를 두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삶이었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믿음에 기초했기에 ‘기적’을 만들고 성인 성녀의 특별한 삶을 만들었습니다. 한없는 용서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그 사랑을 굳게 믿으며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인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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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통은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소통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읽는 것이다(양광모).
20150327_01.JPG 동물도 서로 용서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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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거절 때문에(‘좋은 생각’ 중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마틴 쿠퍼는 좀처럼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무선 전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업계에서 유명했던 조지를 떠올렸다. 그는 조지를 찾아가 월급은 안 줘도 좋으니 조수로 써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지는 쿠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언제 졸업했나요? 무선 기술은 얼마나 연구했고요?” 쿠퍼가 대학을 갓 졸업했다는 사실을 안 조지는 손사래를 치며 그를 돌려보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남자가 벽돌 두 개 크기의 무선 전화를 들고 뉴욕 거리에 서 있었다. 바로 ‘휴대 전화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마틴 쿠퍼였다. 그는 조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지금 휴대 전화로 거는 겁니다.” 쿠퍼가 조지보다 먼저 휴대 전화를 발명한 것이다. 마틴 쿠퍼는 훗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약 그때 조지의 조수가 되어 그의 연구를 도왔더라면 모든 공이 조지에게 돌아겠죠?” 마틴 쿠퍼가 대답했다. “아니오. 만약 그가 나를 받아 줬다면 나는 휴대 전화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나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을 접었기 때문에 나만의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겪은 일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조지와 내가 손을 잡았더라도 연구에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참으로 다양한 것 같습니다. 가장 부정적인 상황 역시도 결국 내가 가장 감사할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보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주지 않은 것만을 따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물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면서 어렵고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20150327_02.JPG 메모가 붙어있는 제 방 벽입니다. 지저분하죠? 그래도 새벽묵상글이 이런 메모를 통해서 나와요.
  •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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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2015.03.2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4-35)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성만 보고 그분의 감추어진 신성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죄로 고발합니다. 우리 또한 신인이신 예수님 덕분에 인간이면서도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는 모두 신이라네요.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는 신이랍니다.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을 많이 닮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신이신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절 받으소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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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하느님과 하나되는 특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하느님과 하나 되는 특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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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예수님을 등에 업고 2000리를 걸어간 사나이 -주님과의 우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예수님을 등에 업고 2000리를 걸어간 사나이 -주님과의 우정- 오늘 강론 제목은 특이합니다. 바로 내 안식년 중 산티아고 순례를 요약하는 제목입니다. 사실 내 1년여의 안식년의 첫자리는 '예수님과의 우정'이였고 하루도 빠짐없이 강론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으며 매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중에도 예외없이 배낭에 미사도구를 넣어가지고 걸으며 매일미사에다 강론은 아이패드를 이용해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성인들의 우선적 특징은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이 예수님과의 우정의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은 바로 하느님과의 우정에 직결되며 소통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우정은 소통입니다. 우정과 소통은 함께 갑니다. 오늘날을 한마디로 '소통의 시대'라 정의할만 합니다. 바로 카톡이 소통의 대표적 예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십자로의 일출(日出)에 빛나는 예수부활상이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 마침 길을 지나던 문도미니코 수사에게 청해서 그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지인들에게 '아침선물'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형님! 동생 같아요. 예수님과... 흰색 옷 형님, 검은 색 옷 동생, 두 분 사이 좋은 날 되셔요!“ 허 엘리야 수녀의 화답에 마음이 환해 지는 듯 했습니다.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주님과 같이 계시니 더욱 감동과 영광입니다.“ 고광철 안젤로 형제의 화답입니다. "진정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빛! 신부님이 사랑 담아 전해 주시는 최고의 정성들 모두모두요! 신부님 짱입니다. 고요한 전경 중에도 활기 가득한 기운이 퍼집니다.“ 최태이 글라라 자매의 진정성 넘치는 화답입니다, "애들 등교 준비시키느라 너무 바쁜 아침이었는데,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이동은 아네스 조카의 감사의 화답입니다. 이런 '무상(無償)의 선물', '무사(無私)한 선물'은 그대로 나를 통한 하느님의 선물이요 선물하는 나나 선물받는 이들이나 모두 순수한 기쁨을 체험하니 말 그대로 '나눔의 기쁨'입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소통의 시대이지만 불통의 시대가 오늘의 현실입니다. 무지, 편견, 불신으로 인한 불통의 골은 얼마나 깊은 사회인지요. 이런 사회일수록 비상구, 탈출구와도 같은 하느님과의 소통, 예수님과의 소통은 필수입니다. 어제 받은 김세실리아 자매의 카톡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저 어제 슬픈 소식 하나 들었어요. 광화문에서 근무한 언니 부군이 딸의 결혼식을 한달여 앞두고 교통사고로 이별도 못한채 하늘나라로 가셨대요. 20일이 되었는데 주변에 알리기도 싫다네요. 기도부탁합니다. 집도 팔았고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온대요. 때때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합니다.“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주님과의 우정이 완충역할을, 비상구나 탈출구 역할을 해준다면 상처의 충격을 최대한 완화할 수 있겠지만, 약한 믿음이라면 이것은 '마음의 중상(重傷)'입니다. 몸은 멀쩡해도 심한 충격으로 인한 마음의 중상, 내상(內傷)은 실로 심각합니다. 바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이 이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독서에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처지에 대한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두 분 모두 이웃과는 불통이지만, 하느님과는 깊은 소통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절체절명,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비상구를 통해 탈출에 성공한 예레미아 예언자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하느님 탈출구를 통한 구원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소 주님과 소통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첩경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불통의 관계가 참 답답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신심 깊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만 예수님께 대한 무지와 편견이 벽처럼 느껴집니다. 이후의 전개되는 내용도 완전히 우이독경, 소귀에 경읽기로 완전 불통입니다. 얼마전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와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만났을 때 격론중 마지막 일화가 생각이 납니다. 문 대표가 "소득이 없다.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줄 알았다"고 하자 홍 지사도 "저도 마찬가지"라고 받아쳤다는 일화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가 그러합니다. 이런 불통의 와중에서 하느님과 깊은 소통의 관계가 예수님을 구원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나'로 규정함으로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보여줍니다.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유다인들에게 말씀은 하셨어도 마치 답답하기가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고 원활한 소통이 예수님께는 유일한 탈출구였음을 깨닫습니다. 옛 성경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이면서도 이슬람, 유다교, 개신교, 천주교 등 종교간의 갈등과 불통의 장벽은 때로 얼마나 높고 두터운지요. 하느님과 깊고도 내밀(內密)한 소통으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갈 때 이웃 종교간의 '불통의 벽'은 서서히 '소통의 문'으로 변하리라 믿습니다. 얼마 전 읽은 함세웅 신부의 글 중 다음 대목도 나에겐 깨달음이었습니다. "영적식별 기준으로 겸손을 제시했는데 참된 식별 기준은 오히려 인간적 상식이어야 합니다. 상식이 진리의 토대이고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양식의 소통에 기반할 때 '참된 영성'이요, 이것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사상누각(모래위의 집)의 '거짓 영성'일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깊게 하시며 이웃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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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이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1982년 처음으로 만났으니 33년 동안 친구로 지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는 함께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친구는 운전을 참 좋아했습니다. 여행을 다닐 때면 저를 위해서 운전을 하곤 하였습니다. 운전을 좋아하던 친구가 하느님의 품으로도 먼저 가고 말았습니다. 김 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사목을 하였던 친구가 이제는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은 삶의 길이도 중요한 것이지만, 삶의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24년 동안 사제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에 태어나셨고 184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사제서품은 1845년에 받으셨고 1846년에 순교하셨습니다. 26살에 순교하셨고, 사제생활은 1년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아주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셨고, 사제생활도 아주 짧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 한국의 수선탁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짧은 생이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하느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절망 중에 있는 사람, 슬픔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도 해야 하며, 조롱과 멸시를 당할 각오도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와 같은 일을 하다가 조롱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편하기도 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거름이 되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아 올리는 뿌리가 되기보다는 화려한 꽃이 되기를 더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꼴찌가 되라는 말, 회당에 앉을 때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 밀알 한 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 그분이 하신 말씀들은 현실의 삶에서는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 돌을 던지려 했던 것입니다.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명동의 거리는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합니다. 명동의 거리가 깨끗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어둠에 나와 거리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길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지켜나가는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 조 진섭 요셉과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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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의미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복음: 요한 10,31-42 <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의미 > 오늘 독서에서도 역시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에게 복수하려는 이유는 피해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송사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이런 처지를 ‘가난한 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를 해하려고 하는 이들을 ‘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실 때의 부자는 재산을 많이 가진 이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가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게 된다고 말할 때의 가난한 이도 돈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부와 가난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의 액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단어들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는 ‘자아’와 연관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이태리 신학생 두 명과 봉사활동을 함께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이 차도 못 만들고 기차도 없는 굉장히 못사는 나라처럼 저를 놀렸습니다. 그때는 이태리 말을 제대로 못할 때라 반박도 잘 못하며 기분만 나빠했습니다. 저는 보복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들어가면 로마에서 공부한 것을 절대 떠들고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구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에 질투가 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태리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로마에서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치 로마에서 공부한 사실을 창피한 것처럼 여기는 말을 하자 그들도 흥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제 마음이나 그들의 마음이 ‘부자’의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자아가 강한 사람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세상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을 좋아하면 그 사람은 ‘나는 부자다’라고 자기를 소개할 것입니다. 아니면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국회의원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아의 확장’이라 부릅니다. 세상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여 그런 헛된 것들을 통해 자신을 들어 높이게 만드는 역할을 자아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동일시했던 무언가를 무시하면 자신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아 화를 내게 됩니다. 사실 그들이 우리나라에 기차가 없다고 했다고 해서 화를 낼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기차가 없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또한 로마에서 공부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와 명예를 자기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는 바로 이 세상 것들로 자신을 들어 높이려고 하는 뱀입니다. 반면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자아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인으로 계셔서 자신이 참 성전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이 가난한 사람이 눈의 가시처럼 여겨집니다. 돈을 업신여기면서 부자인 자신들까지 업신여기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을 업신여긴 것인데 돈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여기기에 자신이 비난을 받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며 더 낮아지기만을 원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헛된 것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너 참 무식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난다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지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너는 개 같다”라고 말할 때, “그럼 어때?”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예가 바로 마귀에 들린 딸을 치유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던 이방인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예수님께 아무런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아를 매달아 없앤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차지하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하다”라고 하시며 가난한 이들 안에 참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태초부터 뱀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만이 오로지 나의 주인이 되시게 하여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 동일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해야만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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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 2015년 나해 3월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 두 사람이 마음만이라도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세상 살 맛이 납니다. 그렇게 한 마음 되어 사랑한다면 세상 살 힘과 행복도 더해집니다. 이정도로 하나 되면 어떤 난관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일치제(一致制)는 사랑이었고 대상은 하느님과 사람이었지요.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이 안에 있다는 일치는 일치화(一致化)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一致), 같은 분(一體)이라 믿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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