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4일 비우고 낮추어 만나는 말구유

작성자 : 디딤돌    작성일시 : 작성일2014-12-24 06:11:55    조회 : 486회    댓글: 0

◈ [서울] 대림 제4주간 수요일 
 
2014년 나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7-79
 
운전을 하면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어두운 터널의 끝에는 밝은 빛이 보입니다. 이제 차는 밝고,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대림시기라는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깨어있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여지고 평지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로운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사자와 어린이 함께 뛰노는 세상, 늑대와 새끼양이 손을 잡고 다니는 세상,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깨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요셉과 마리아, 즈카리야아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평생 기도 중에 주님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안나’가 있었습니다. 어린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목동들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 유향, 몰약’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이라는 드라마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습니다.

2014년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리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를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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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뉴튼수도원 44일째),
사무하7,1-5.8ㄷ-12.14ㄱ.16 루카1,67-79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7-79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어제 저녁기도 시 성전을 들어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큰 성전을 가득 채운 한 나무의 성탄츄리나무 그윽한 솔향기가
때문이었습니다.
'아, 성인(聖人) 하나만 있으면 큰 수도공동체도 성인의 그윽한 성덕의
향기로 가득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잘 들여다 보면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성인입니다. 수도형제들의
'성덕의 향기' '기도의 향기'로 가득한 여기 뉴튼수도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츄리 나무를 통한 '자연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요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성독이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
별난 독서법이 아니라 옛 수도승들은 평범한 일상의 수행으로 성경독서인
렉시오 디비나에 항구했습니다.

시간이나 목표에 매이지 않고, 정보를 얻을 욕심 없이, 그냥 '읽기
(reading)-묵상(meditation)-기도(prayer)-관상(cotemplation)'의
리듬따라 이뤄지는 오관(五官)이 총동원된 전인적, 관상적 성경독서가,
교회의 전통적, 정통적 성경독서가 바로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이런 렉시오디비나는 옛 수도승들에겐 숨쉬는 공기와 같았습니다.

항구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우리를 위로하고 자유롭게,
풍요롭게 합니다.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 그러니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렉시오 디비나보다 더 좋은 영약(靈藥)은 없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렉시오디비나의 수행입니다.
저는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에 둘을 첨가합니다.
내 '삶의 성경'과 '자연 성경'입니다.

우선 렉시오 디비나의 원천은 신구약 성경이고 이를 바탕으로 내 삶뿐
아니라 자연에까지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내 삶의 성경, 자연 성경이라 칭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비단 신구약 성경뿐 아니라 내 삶의 여정을 통해서도,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글자는 몰라도 누구나 보고
깨달아 알 수 있는게 자연성경이요 내 삶의 성경입니다.
사막의 교부 아르세니우스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자신의 생각들에 대해 이집트의 연노한
농부에게 털어 놓고 자문을 구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아니 어떻게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하시고 좋은 교육을 받은 압바께서
이런 농부에게 생각을 털어놓고 자문을 구합니까?"
압바의 대답이다.
"그렇다. 나는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통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농부의 알파벳을 모른다.“-

물론 아르세니우스의 겸손이 놀랍습니다만 그의 진정성 가득 담긴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지혜로운 아르세니우스는 이미 이 농부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한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연노한 농부의 '삶의 성경'이 얼마나
풍부한지 직감적으로 깨달은 아르세니우스임이 분명합니다. 더불어
'학문의 지식'이 '삶의 체험적 지혜' 앞에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한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는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완성됩니다.
때로 삶이 힘들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조용히 주님 앞에 머물러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함이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우리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지도자는 성령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성령의 사람, 나탄 예언자가 친히 다윗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 주며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나탄에게 말씀 하시며 다윗 삶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해 주도록
하십니다.

다윗의 생애에 하느님을 주어로 넣고 읽으니 다윗의 삶이 온통 은총임이
드러납니다. 모든 일은 다윗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인 '나'가 한 일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복음의 즈카르야 찬미가 역시 성령에 충만한 즈카르야가
삶의 성경을, 이스라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한 산물입니다.

아마 사막 같은 침묵 피정 중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자신의 삶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말하였다.'
서두 말씀에서 보다시피 성령이 바로 렉시오 디비나의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제 강론 역시 성령의 인도하에 렉시오 디비나 한 결과입니다.
사실 저는 신구약 성경, 내 삶의 성경, 자연 성경, 셋을 펼쳐 놓고
렉시오 디비나 하며 강론을 준비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즈카르야의 훌륭한 렉시오 디비나의 산물인
'즈카르야 찬가'를 우리 가톨릭 교회 공동체는 아침기도때 마다 힘차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루하루 내 '삶의 성경'을 잘
써나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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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비우고 낮추어 만나는 말구유/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루카 1,67-79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1,78)

비우고 낮추어 만나는 말구유

오늘 제1독서는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위를 보장해 주시리라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알려준다. 나탄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주님의 뜻을 전한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2.14.16)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본디 유다계 가난한 이들(아나윔) 가운데서 메시아 예수님의 구원을 체험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른 감사가였을 것이다.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다윗 집안에서 탄생할 구원자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구원을 위해 태어나실 아기는 우리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빼내어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9).

아기 예수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게 하느님을 섬기도록 해주시며,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시려고’(1,75. 77) 우리에게 오셨다. ‘거룩함’과 ‘의로움’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두 가지 덕목이다. 거룩함과 의로움을 지니지 못한다면 평화 안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이끌어주실 평화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될 때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얼핏 보면 다윗이 하느님께 보인 헌신은 참으로 대단한 듯 보인다. 하지만 더 깊이 살펴보면 그는 하느님과 자녀로서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았다. 다윗은 그저 양치기일 뿐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1,68)라고 하며,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해 주셨다”(1,68)고 고백한다. 이처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태도야말로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그분의 종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이의 자세이다.

하느님께는 인간의 찬미나 도움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무엇인가를 이웃과 나눌 때 참으로 겸손의 바탕 위에서 행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겠다. 재물, 재능, 선행, 기도 등 그 무엇이든 그분 앞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땅히 되돌려드려야 할 그분의 것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탄은 바로 이런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자신을 비우며 사랑의 혼을 지니고 자신을 내놓는 작고 낮은 말구유를 향한 순례이다. 이 순례길에서 우리는 즈카르야와 더불어 메시아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에 대해 감사드리자!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철저히 인식하였고, 모든 움직임이 그분을 향하고 있었으며, 모든 선을 그분께 되돌리는 겸손을 항구히 사셨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육은 항상 모든 선을 거스르기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이 그 때문에 자신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더 비천한 자로 여기며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자신을 더 작은 자로 평가할 때 알 수 있습니다.”(권고 12) 자신을 낮추고 비워 모든 것을 주 하느님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선물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높은 곳에서 별, 곧 메시아가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어주실 것이다(1,78-79).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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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2014년 나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복음: 루카 1,67-79
 
<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

저는 월요일마다 한 수녀원 본원에서 수련자들 교리 강의를 해 주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일주일 중 이 시간만 기다려집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서 강의할 때 받는 상처들이 힐링 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강의할 때 가끔 느끼는 것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강의를 해 본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강의나 글이나 자신들이 기쁘고 자신들 마음에 맞지 않으면 얼굴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하거나 써서는 안 된다고 반발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강의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다가가려해도 상대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본성이 있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아주 적습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도 자주 나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가 수련자들 교리 방학하는 날이라 강의를 마치자 그들이 일어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정성껏 만든 초와 성탄카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첫 서원을 하게 되어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고 어떤 이들은 몇 달 뒤에 다시 보게 되는데 이들의 눈엔 눈물이 글썽이고 어떤 이들은 안경을 들고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제가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남들이 보면 월요일 오후마다 바쁘게 서울로 올라가서 길 막히는 때 내려와야 하는 것을 고생스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들이 있는 곳이면 부산이라도 내려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치 노아의 배가 내려앉을 곳이 없어서 방주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어떤 땅이라도 이 비둘기가 발붙일 공간을 내어준다면 노아는 너무나 기뻐 그 땅으로 배를 댈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은 이렇게 누군가의 받아주는 마음속으로 내려앉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받아주는 누군가에게 가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이 자신은 향백나무로 만든 궁에 살고 있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 천막에 머무르고 있기에 주님의 집인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은 그 일은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이 하게 될 것이라고 거부하십니다. 그러나 예언자 나탄을 시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이는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는 온통 다윗에 대한 축복의 말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이가 탄생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결국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태어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다윗이 주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 또한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는 본성이 매우 크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받아주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다윗만이 천막에 외로이 계시는 하느님을 좋은 성전을 지어 모시기를 원했고, 신약에서는 오직 성모님만이 당신 마음에 하느님을 받아들여 귀한 성전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지어드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분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성전을 짓는 방법은 그분의 뜻을 목숨을 걸고 순종할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오시는 분의 합당한 성전은 진정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종처럼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바뀐 봉투’란 사연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패스트푸드 점에서 바쁘게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중요한 서류봉투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분명 그 패스트푸드 점일 것이라 추측하고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정과 전화번호를 적어 문틈으로 밀어 넣고 왔는데, 다음 날 아침 서류를 찾았다는 여점원의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달려가 보았지만 봉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점원은 맞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용물을 보니 자신의 것이 맞았습니다. 여점원이 그 봉투를 발견한 것은 쓰레기통이었는데 음식물 찌꺼기들이 묻어있어서 깨끗한 새 봉투로 바꾸어놓았던 것입니다.

봉투를 바꾸는 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서류의 주인이 느끼는 것은 사뭇 다를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오물이 묻었다가 어떤 누군가에 의해 구해지고 깨끗한 옷을 입게 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점원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그분이 들어오실 성전을 마련해드리려는 마음은 그만큼 축복이 넝쿨째 우리에게 오시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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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구세주의 강생을 하루 앞둔 오늘

2014년 나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7-79

이제 기쁜 성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고, 또한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습니까? 솔직히 저는 개인적으로 바쁘게 보내다보니 어느새 성탄을 하루 앞둔 오늘을 맞이하게 되어서 주님께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며칠 전에 동창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기는 했지만 또한 외적으로도 단정하게 주님을 맞이하자는 생각으로 어제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손질했습니다. 그런데 미용실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나 경험하게 되었네요.

이발을 하고 있는데, 자매님 두 분이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분이 제 옆 자리에 앉으셨고, 미용사가 다가와 어떻게 머리를 손질해드릴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께서 보통 깐깐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앞머리는 웨이브를 아주 조금만 넣어주시고요. 꽁지머리는 과감하게 잘라주세요. 옆머리는 길이 반보다 조금 더 길게 해주세요……”

한 5분 동안을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저렇게 손질해달라고 요구를 하시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도 잘 모르겠더군요.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으신 미용사 역시 어떻게 손질을 해야 하는지 감을 못 잡으시는지 “그러면 이렇게 해드리고, 저렇게 해드리면 돼요?”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에 다시 길게 설명을 하니 미용사는 또 다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시더군요. 이 모습을 보고 있었던 친구로 보이는 함께 온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젊어 보이게 잘라달라고요.”

이 말씀이 정답이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젊게 잘라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했던 젊어 보이는 머리스타일을 요구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상대방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길게 말만 늘어놓는다고 해서 제대로 설명되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의견, 내 뜻만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내 뜻, 내 의견만을 길게 늘어놓으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의견을 늘 염두에 두고 생활한다면 보다 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는 자신의 뜻만을 이야기하다가 혀가 굳어 말을 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혀가 풀리게 되었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통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뜻에 맞춰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드디어 구세주의 강생을 하루 앞둔 오늘, 내 뜻과 의견만을 늘어놓는 하루가 아닌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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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속에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은 절대 그것을 나무 밑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로이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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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을 위하여~~~

요즘에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시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솔직히 저 역시 그 기능을 다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전화 받고 문자메시지 보내고, 급할 때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 정도? 아무튼 어떤 기사를 보니 최고급 스마트폰 기능의 70%는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잘 생각해보니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자동차의 매뉴얼을 보면 거의 책 한 권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기능을 다 사용하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마트폰처럼 자동차 기능의 70%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계기판을 보면 속도가 글쎄 240까지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40이라는 속도를 다 사용하지 못합니다. 시내와 고속도로를 사용하는 빈도를 따지면 시속 80Km 정도 되니까 자동차 속도 역시 거의 70%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의 70% 정도는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간단명료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지요. 복잡한 그 모든 것들을 누리기 위해 애를 쓰며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단순하게 사는 삶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단순하게 사는 삶. 그 안에 행복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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