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속하는 것입니다. 라너가 이어서 말하는 대로 “시어(詩語)는 하느님 말씀을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은 하느님이시고,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말에는 하느님에 대한 본질적인 향수, 바로 그 말씀을 향하여 이끌리는 성향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시구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분명히 언급하는 하느님 말씀(히브 4,12-13 참조)에 유비적으로 참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 이에 비추어 칼 라너는 사제와 시인 사이에 놀라운 유사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모든 실재를 가두어 두는 것, 곧 하느님께로 이끌리는 본연의 성향을 말하지 못하는 것, 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입니다.”
26. 문학은 우리가 표현 방식과 의미의 상호 관계에 민감하게 해 줍니다. 문학은 식별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미래의 사제가 자신의 내면과 주변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도록 역량을 길러 줍니다. 이처럼 독서는 독자를 자기 존재에 대한 진리로 안내하는 ‘길’이 되고, 불안과 심지어 위기의 순간이 없지는 않을 영적 식별의 여정을 위한 기회가 됩니다. 실제로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영적 ‘메마름’에 관한 수많은 문학 작품의 내용이 있습니다.
27.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 메마름이란, 영혼이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저급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또한 여러 가지 마음의 동요와 유혹에서 오는 불안감 등으로 불신으로 기울고 희망도 사랑도 사라지며, 게으르고 냉담하고 슬픔에 빠져서 마치 스스로가 자신의 창조주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입니다.”
28. 어떤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어려움이나 지루함이 반드시 나쁘거나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타락하는 영혼” 안에서 선한 영은 불안과 동요와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이 제시한 대로 선한 영과 악한 영을 식별하는 첫 번째 규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이 규칙은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 관하여 다룹니다. 그러한 사람들 안에서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선과 아름다움으로 이끌 것입니다.
29. 따라서 독자는 교훈적인 메시지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구원과 멸망의 경계가 선험적으로(a priori) 명확하고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은 변화무쌍한 토양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도전을 받는 사람입니다. ‘식별’ 행위인 독서 행위 덕분에 독자는 독서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의 ‘대상’으로 직접 관여하게 됩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독자는 읽고 있는 글을 통하여 자신이 ‘읽히고 있는’ 경험을 실제로 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경기장의 선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이 경기를 하지만, 선수들이 그 행동에 온전히 몰입한다는 의미에서 선수들을 통하여 그 경기가 진행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의 집중과 소화
30. 마르셀 프루스트의 잘 알려진 표현에 따르면, 문학은 그 내용과 관련하여 ‘망원경’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처럼 문학은 존재와 사물을 가리키고, 인간 경험 전체와 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사이에 있는 그 ‘엄청난 간극’을 깨닫게 해 줍니다. “문학은 또한 삶의 단상들을 다듬어 그 윤곽과 음영을 드러낼 수 있는 현상소에 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학이 있는 ‘이유’입니다. 문학은 우리가 삶의 단상을 ‘현상하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가 삶의 의미에 관하여 자문해 보도록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31.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세계관은 우리가 세운 실용적이고 단기적인 많은 목표에 따른 압박으로 ‘축소되고’ 좁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전례, 사목, 애덕에 봉사하는 우리의 노력조차도 달성하여야 하는 목표에만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일깨워 주신 대로, 씨앗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성한 열매로 무르익으려면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져 숨 막히는 일 없이 비옥한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마태 13,18-23 참조). 효율성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식별력을 무디게 하고 감수성을 약화시키며 복합적인 측면들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은 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어 보고 듣는 법을 익힘으로써, 정신없이 바쁘고 무비판적인 생활양식으로의 이 불가피한 유혹에 맞서 균형을 갖추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단순히 책을 읽으려고 멈출 때 가능한 일입니다.
32. 우리는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전략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결과에만 목적을 두지 않으며 현실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존재의 무한한 존귀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 유일하지는 않지만 특권적인 표현 형태로 나타나는 현실 접근법의 특징은 균형감과 여유와 자유입니다. 그러하기에 문학은 개인과 상황의 현실을, 범주, 설명 체계, 그리고 원인과 결과, 목적과 수단의 선형적 역학 관계를 통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넘쳐나는 의미로 가득 찬 신비로서 바라보고 살펴보며 식별하고 탐구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33. 문학의 역할에 대한 또 다른 인상적인 표현은 인체의 활동, 특히 소화 작용에서 비롯됩니다. 11세기의 수도승 생티에리의 윌리엄과 17세기 예수회원 장 조제프 쉬랭은 소가 여물을 씹는 이미지인 되새김질(ruminatio)을 관상적 독서의 모습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쉬랭은 ‘영혼의 위(胃)’를 이야기하였고, 예수회원 미셸 드 세르토는 참된 “소화하는 독서의 생리학”을 논하였습니다. 문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소화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 경험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을 파악하도록 돕습니다. 문학은 한 마디로 삶을 해석하고 그 깊은 의미와 본질적 긴장들을 식별하게 합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34. 말의 형태와 관련하여, 문학 본문을 읽는 것은 우리가 ‘타인의 눈을 통하여 보게’ 하고, 따라서 인류애를 확장시키는 폭넓은 관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타인의 시각과 경험과 반응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하는 상상력을 통한 공감 능력을 계발합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 없이는 연대, 나눔, 연민, 자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 감정이 그저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가장 고독한 사람조차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됩니다.
35. 인간의 놀라운 다양성과 문화와 학문의 공시적 통시적 다원성은 문학 안에서 그 모든 다양성을 존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나타납니다. 이와 동시에 그 다양성과 다원성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공유되며 의미 있게 하는 상징적인 문법으로 옮겨집니다. 문학은 학문적 서술 방식이나 문학 평론의 비평처럼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깊은 의미를 표현하고 해석함으로써 경험의 풍요로움을 전달한다는 사실에 그 독창성이 있습니다.
36. 우리가 이야기를 읽을 때, 저자의 묘사력 덕분에 우리의 눈 앞에는 버림받은 소녀의 흐느낌, 잠든 손주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할머니, 입에 풀칠하려 고군분투하는 상인의 어려움, 끊임없이 비난받는 이의 수치심 그리고 비참하고 끔찍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인 꿈으로 도피하는 소년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 내적 체험의 희미한 잔상들을 일깨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경험에 더욱 민감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와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어려움과 열망에 공감하며,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마침내 그들 여정의 동반자가 됩니다. 우리는 과일 판매상, 성매매 여성, 부모 없이 자라는 고아, 벽돌공의 아내 그리고 언젠가는 멋진 왕자님을 만나리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노파의 삶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공감 능력으로 때로는 관용과 이해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37. 장 콕토는 자크 마리탱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문학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문학을 통하여 벗어나려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믿음이 우리를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고통과 기쁨이 우리 마음 안에서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정말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인간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38. 문학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 개인의 삶과 집단의 역사적 사건들을 구현하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상징적 표현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피상적인 단죄를 막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