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시의 ‘독자’임을 드러내며, 문학 텍스트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 바로 문화의 복음적 식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떠버리’(spermologos) 곧 ‘수다쟁이, 허풍선이, 사기꾼’이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스페르몰로고스’라는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씨앗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이는 분명 모욕을 주려 한 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심오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바오로는 처음에 가졌던 격분에서 벗어나(사도 17,16 참조), 이방인 시인들의 씨앗을 모으고 아테네 사람들의 ‘대단한 종교심’을 인식하여 그들의 고전 문학 작품의 내용들에서 참된 복음의 준비(praeparatio evangelica)를 알아봅니다.”
13. 바오로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였습니다. “문학이 인간 내면의 심연에 빛을 비추면, 계시가 그리고 신학이 그 뒤를 이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 심연을 꿰뚫고 들어오시어 빛을 비추시는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문학은 이러한 심연을 향하는 길, 영혼의 목자들이 자기 시대의 문화와 풍성한 대화를 시작하도록 도와주는 “길”입니다.
육신 없는 그리스도가 결코 아닌
14. 미래 사제들의 양성 과정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여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기에 앞서, 현대의 종교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신성 회귀나 영성 추구는 그 성격이 모호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무신론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의 목마름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질적인 해결책들로 이 목마름을 채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또한 육신 없는 예수님으로 이 목마름을 채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복음을 선포하여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위하여, 믿는 이들 특히 사제들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이 만나 뵐 수 있게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야 합니다. 곧, 열정, 감정, 느낌, 도전과 위로의 말씀,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손길, 해방시키고 격려하는 눈길, 환대, 용서, 의분, 용기, 담대함으로 이루어진,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육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5.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미래의 사제와 모든 사목 일꾼이 문학에 친숙해지면, 주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이 그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충만한 인성에 더욱더 민감해집니다. 이로써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모든 이가 체험하도록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추상적인 인간의 신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삶의 일부를 이루는 상처와 열망, 기억과 희망을 지닌 모든 남녀의 신비입니다.
커다란 유익
16. 실용적 관점에서, 많은 학자는 독서 습관이 인생에 수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곧, 방대한 어휘력 습득과 이를 통한 광범위한 지적 능력 계발에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독서 습관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하며 더 풍부하고 표현력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인지능력 저하를 막아 주며 심리적 긴장과 불안을 진정시켜 줍니다.
17. 더 나아가 독서는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독서하는 동안, 우리는 인생의 도전을 결국 극복해 내는 등장인물들의 생각, 고민, 비극, 위험, 두려움에 몰입합니다. 글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장차 우리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통찰력을 얻기도 합니다.
18. 독서 장려를 위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저는 단 몇 마디 말로도 큰 교훈을 주는 저명한 작가들의 글 가운데 두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소설은 “모든 가능한 기쁨과 불행을 단 한 시간 만에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수년이 걸려야 겨우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 강렬한 감정은 너무나도 더디게 생겨나기에 우리가 좀체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래서 우리는 최고로 강렬한 기쁨과 역경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릅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저는 천 명의 사람이 되어 보지만 여전히 저 자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저는 무수히 많은 눈으로 보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바로 저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경배를 드리거나 사랑할 때처럼, 도덕적인 행동을 할 때나 지식을 얻을 때처럼, 저 자신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이때만큼 저다울 때가 없습니다.”
19. 그런데 저는 독서로 얻을 수 있는 개인적 이점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독서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일깨워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 관하여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20. 문학이라고 하면, 저는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자기 학생들에게 들려주곤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사상이나 논평에 집착하기보다는, 단순히 그 작품을 읽고 직접 접하며, 우리 앞에 있는 생생한 본문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학생들에게 이를 설명하며, 처음에는 읽고 있는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경우에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문학의 정의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도전을 제기할 때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듣지 않으면, 우리가 신학이나 심리학을 제아무리 많이 공부했더라도, 곧바로 자기 고립에 빠지고, 우리 자신과 또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일종의 ‘영적 듣지 못함’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21. 다른 사람들의 신비에 민감하게 해 주는, 문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우리에게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1964년 5월 7일에 작가들을 포함하여 예술가들에게 하신 용기 있는 호소를 떠올려 봅니다. “저희에게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저희의 직무에는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의 직무는 설교하는 직무입니다. 보이지 않고 형언할 수 없는 영의 세계, 하느님의 세계를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직무인 것입니다. 예술가 여러분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가가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해 주는 일의 장인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자들 특히 사제들의 임무는 바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그들이 주 예수님의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임무에서, 문학과 시가 제공할 수 있는 기여는 비할 데 없이 큰 가치를 지닙니다.
22.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성찰한 시와 수필로 현대 문학에서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 T.S. 엘리엇은 오늘날의 종교 위기를 널리 퍼져 있는 정서적 무기력의 위기라고 예리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신앙에 관한 문제는 주로 개별 교리들에 관하여 더 믿느냐 덜 믿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동시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물과 다른 인간들 앞에서 깊은 감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수성을 되살리고 풍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도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서양이 동양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제 생각에 서양에는 시(詩)가 다소 부족해 보입니다.”
식별 훈련
23. 그렇다면 사제가 문학을 접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훌륭한 소설들을 읽는 것을 사제 교육(paideia)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증진하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사제 후보자 양성 과정에서 사제와 시인 사이에는 깊은 영적 연관성이 있다는 칼 라너의 통찰을 되새기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24. 그 독일 신학자가 우리에게 해 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질문들에 대답해 봅시다. 라너에 따르면, 시인의 말은 ‘향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곧, “무한을 향하여 열리는 문,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시인의 말은 이름 없는 것을 부릅니다. 이 말은 부여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하여 뻗어 나갑니다.” 시는 “그 자체로는 무한을 선사하지 않고, 그 무한을 가져다 주지도 담아 내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