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서한: 양성에서 문학의 역할 1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4-12-14 21:29:47    조회 : 34회    댓글: 0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서한

 

양성에서 문학의 역할

 

1. 처음에 저는 사제 양성에 관한 제목으로 이 서한을 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주제는 사목 활동에 몸담은 모든 이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성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서한으로 저는 개인의 인격 성숙의 여정에서 소설과 시를 읽는다는 것이 지니는 가치에 관하여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2. 종종 휴일의 무료한 시간에, 인적 없는 동네의 한적함과 무더위 안에서, 좋은 책을 찾아서 읽는 일은 유익하지 못한 선택들을 멀리하게 해 주는 오아시스를 우리에게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권태나 분노, 실망이나 실패의 순간들에 내면의 평온함을 구하는 데에 기도가 도움이 안 될 때에도 한 권의 양서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까지 우리가 그 풍랑을 다스리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들여 독서하는 것은, 인격 성숙을 저해할 수 있는 강박적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새로운 내면의 공간을 열어 줍니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와 휴대전화와 그 밖의 기기에 끊임없이 노출되기 이전에 독서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던 것이었습니다. 독서를 해 본 사람은 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3. 비교적 닫힌 구조라서 그 서사를 풍성하게 하거나깊이 이해하게 해 줄 시간도 여백도 빠듯한 시청각 매체와 달리, 책은 독자 개인의 더욱 깊은 참여를 요구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독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책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자신의 재능과 기억과 꿈, 드라마와 상징으로 가득한 개인사를 동원하여 하나의 온전한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본문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자가 쓰고자 의도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본문이 탄생합니다. 따라서 문학 작품은 수많은 방식으로 새롭게 말할 수 있고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창적인 종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나의 살아 있고 언제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글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저자에게서 받은 것으로 풍요로워지고 이로써 내적 성장이 가능해져, 우리가 읽는 새로운 모든 작품을 통하여 세계관을 새롭게 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러한 까닭에, 저는 적어도 일부 신학교들이 문학에 지대한 관심과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화면에 대한 집착 그리고 해롭고 피상적이며 폭력적인 가짜 뉴스에 대한 집착에 대항해 왔다는 사실을 매우 가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신학교들은 조용한 독서 시간과, 고전이든 신간이든 우리에게 끊임없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책들에 관한 토론 시간을 마련하여 이를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품 직무를 위한 양성 프로그램에는 대체로 충분한 문학 기초 소양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그저 오락의 한 형태, 곧 미래 사제의 교육과 그들의 사목 직무 준비에 포함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비주류 과목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거의 예외 없이, 문학은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이 건강하지 않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미래 사제들에게 심각한 지적 영적 빈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의 사제들은 인간 문화의 핵심 자체에, 더 구체적으로는 모든 개개인의 마음에 문학을 통하여 특별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5. 이 서한을 통하여 저는, 사제 후보자 양성의 맥락에서 문학에 기울이는 관심에 근본적인 변화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밝힌 한 신학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문학은 …… 한 개인의 신비 안에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그 핵심에서 솟아납니다. …… 온갖 언어 자원을 활용하여 충만한 표현에 도달할 때에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삶입니다.”

 

6. 그러하기에 문학은 우리가 저마다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들과 여러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의 구체적 실존과 그 본질적 긴장과 열망과 의미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7. 저는 젊은 시절에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스물여덟 살이던 저는 산타페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고등학교 2-3학년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엘 시드(El Cid)를 공부하게 만들어야만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대신에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의 작품을 읽어도 되는지 묻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 시드는 가정 학습으로 돌리고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에 관하여 다루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현대 문학 작품들을 읽고 싶어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흥미를 끌었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들은 문학과 시에 전반적으로 맛 들여 나가게 되었고 이윽고 다른 작가들에게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음은 언제나 더욱 큰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모든 이는 문학에서 각자의 길을 발견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비극 작가들을 좋아합니다. 모든 이가 그들의 작품들을 자기 것으로, 곧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운명에 눈물지으면서 우리는 결국 자신 때문에 울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공허함과 결점과 외로움에 대하여 울게 됩니다. 제가 읽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똑같이 읽으라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삶에 말을 걸고 자신의 여정에 참된 동반자가 되어 주는 책을 찾을 것입니다. 단지 다른 이들이 필수라고 입을 모으니 의무감에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독서만큼 비생산적인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언제나 조언에 열려 있으면서도 우리 삶의 매 순간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면서, 열린 마음, 놀라움에 대한 수용, 유연성, 배우려는 의지를 지니고 스스로 읽을거리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신앙과 문화

 

8. 문학은 진심으로 자기 시대의 문화와 대화를 나누기 바라는 신자들 또는 단순히 타인의 삶과 체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신자들에게도 필수적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렇게 확언한 것도 당연합니다. “문학과 예술도 …… 인간 본연의 특성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밝히려고 힘씁니다.” 실제로 문학은 우리 일상의 현실과 그 열정과 사건에서, 그리고 우리의 활동, , 사랑, 죽음 그리고 우리 삶을 채우는 온갖 불행한 일에서 단서를 얻습니다.

 

9. 옛 문화든 새 문화든, 가장 숭고한 이상과 열망 그리고 깊은 고통과 두려움과 열정을 담고 재현하는 문화들의 상징과 메시지, 예술 표현과 서사를 무시하거나 없애버린다면 그 핵심에 어찌 닿을 수 있겠습니까? 소설과 시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의 드라마를 표현하려고 애쓰며 속속들이 밝히는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제쳐 놓거나 감상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우리가 인간의 마음에 어찌 말을 걸 수 있겠습니까?

 

10. 교회는 선교 체험을 통하여, 교회의 신앙이 뿌리내려 온 서로 다른 문화들과 만남으로써 -흔히 문학을 통하여- 주저 없이 그 문화에 참여하고 각각의 문화에서 찾은 가장 좋은 것들을 이끌어 내면서 교회가 지닌 모든 아름다움, 새로움, 참신함을 드러내는 법을 배워 왔습니다. 이러한 접근법 덕분에 교회는, 문화적 역사적 특정 문법이 복음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근시안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자기중심성의 유혹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절망의 씨를 뿌리려 획책하는, 최후의 날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바로 그러한 자기중심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학 양식과 문체를 접함으로써, 다양한 소리로 울려 퍼지는 하느님 계시를 잦아들게 하거나 우리의 필요 또는 사고방식 아래 두는 일 없이 그 계시를 언제나 더욱 깊이 탐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 그러하기에, 예를 들어 초기 그리스도교가 당대의 고전 문화와 진지하게 대면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통찰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동방 가톨릭 교회 교부인 체사레아의 바실리오는 370년부터 375년 사이에 자기 조카들을 위하여 썼다고 여겨지는 젊은이들에게 한 연설(Oratio ad Adolescentes)에서 바깥 사람들’(éxothen), 곧 그가 이방인 저자라고 불렀던 이들이 지은 고전 문학의 풍요로움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신학과 주석에 유용한 논증인 말들(lógoi)의 측면에서도, 수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도와줄 행실과 행동(práxeis)의 측면에서도, 바실리오는 그러한 풍요로움을 본 것입니다. 바실리오는 그리스도교 젊은이들에게 고전을 그들 교육과 양성을 위한 준비(ephódion, Viaticum), 영혼의 유익’(IV, 8-9)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라고 독려하면서 이 연설을 마칩니다. 바로 그 시대의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이러한 만남에서 복음 메시지의 새로운 표현이 생겨났습니다.

12. 문화에 대한 복음적 식별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인간 체험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건과 감성과 염원 안에 그리고 마음속 긴장감과 사회적, 문화적, 영적 상황의 긴장들 안에 이미 씨 뿌려진 성령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에 나와 있듯이 바오로 사도가 아레오파고스에서 보여 준 접근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사도 17,16-34 참조). 바오로는 하느님을 말하며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이 성경 말씀에는 두 인용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기원전 6세기)의 시에서 간접 인용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별자리와 날씨가 궂을지 갤지 그 징조를 노래한 솔리의 시인 아라투스(Aratus, 기원전 3세기)파이노메나(Phaenomena)에서 직접 인용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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