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받은 용서를 기억하라.

작성자 : 김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1-10 06:45:00    조회 : 676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티토 1,1-9

1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2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5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 루카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 ***** *****

사람들이 제일로 가기 싫은 병원은 어느 곳일까요? 병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 치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몇 년 전에 치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에 치료했던 치아에 문제가 생겨서 치과를 찾아간 것이었지요.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서 너무나도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어쩌면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치과의 시끄러운 기계음을 들으면서 진료의자에 꼼짝없이 누워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했거든요. 또한 치료가 무척 아플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 좋게 대기실에 앉아 있기 힘들었습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치과 의사 선생님께 “선생님, 저 마취해서 아예 기절시켜 주세요.”라고 말했으니까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저의 이런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더군요. 잔뜩 찡그린 인상과 거의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쩍 벌리고 있으면 순식간에 치료를 마치고서는 “다 됐다.”라고 하셨습니다.

막상 치료를 받은 뒤에는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대기실에서의 긴장감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걱정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만 견디면 될 것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면 별 것 아닌 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도 걱정에 걱정을 더해서 더욱 힘들어 합니다.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도 말이지요.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스스로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 굳이 더욱 더 신경 써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힘들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믿음을 갖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오늘 복음의 사도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힘만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할 수 없기에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에서 보이는 사도들의 모습처럼 주님께 믿음을 청해야 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만으로는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 구원의 선물도 얻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이 믿음을 청하는 오늘, 진정으로 주님께 기도를 올리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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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 마치 가장 쉬운 것을 선택하듯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위스턴 오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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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랑(‘따뜻한 하루’ 중에서)

젊은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잘 생겼고, 여자는 아름다운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부부였다. 모든 부부에게 찾아온다는 권태기는커녕 갈수록 사랑은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내가 시름시름 앓더니 실명을 하게 됐고, 운명의 장난처럼 곧이어 남편도 실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불행도 부부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남편은 아름다운 아내를, 아내는 잘생긴 남편을 잃을까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10년 전, 20년 전 모습만을 기억하며 애틋함은 더 커졌다.

부부의 이야기는 온 세상으로 퍼져갔고, 이를 딱하게 여긴 용한 의사가 눈을 치료해 주었다. 남자가 먼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아내를 찾았다. 그러나 옆에는 늙은 할머니뿐 아름다웠던 아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내도 눈을 떴다. 아내도 남편도 절규만이 남았다.

"누가 내 아내를 바꿔 치기 했는가?"

"내 남편은 어디 갔는가?"

세월이 그들을 바꾸어 놓은 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부부의 사랑을 지켜온 건 무엇이었을까요? 눈을 다시 뜬 그 날부터 그들은 행복했을까요?

보이지 않는 그 순간이 오히려 이 부부에게는 가장 행복할 때가 아닐까 싶네요. 즉, 고통의 순간이 행복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바로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참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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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받은 용서를 기억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2주간 월요일(루카17,1-6)

2014년 가해 11월10일 월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 17,1-6

받은 용서를 기억하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유혹은 극복하면 은총이고 넘어가면 죄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언제나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때때로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지만 유혹은 곳곳에 도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물며 인간에게 유혹은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당신에게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하여도“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하시며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한 자비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 그리고 누군가에게 여러 번 용서를 받았고, 또 용서를 청했던 자기를 기억한다면 남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보다 알게 모르게 잘못한 것에 대해 오히려 용서를 청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에게는 결정적인 상처가 될 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내가 잘한다고 생각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할 일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 용서해 주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신앙에서 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평화와 기쁨,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용서가 어렵다면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기기 바랍니다. 아울러 미운 상대를 보고 괴로워하지 말고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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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이 시대 지도자로 산다는 것
 
2014년 가해 11월10일 월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 17,1-6

이 시대 지도자로 산다는 것

지도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 훌륭하신 선배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지도자는 맡겨진 사람 한명 한명을 위해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저도 크게 체험한 바가 있었는데 형제를 만날 때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만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얼마나 크던지요. 기도 없이 만나면 우선 그의 인간적인 약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의 실수, 그의 부족함이 커 보이고 만남 자체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반대로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만나봤습니다. 그의 허전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꼬이고 꼬인 측은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말이지 이 세상 모든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 기도임이 틀림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이 시대 지도자가 겸비해야 중요한 삶의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보살핌(care)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목자는 다른 무엇에 앞서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맡겨진 구성원들과 공동체를 주의 깊게 보살펴야 합니다. 보살핀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 다시 말해서 배려한다는 것, 격려한다는 것, 그의 성장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동시에 목자들의 목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토서를 통해 목자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티토는 초대교회 당시 바오로 사도를 도와 열심히 일했던 동료 일꾼이었습니다. 티토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바오로 사도를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개종자였습니다. 티토는 바오로 사도를 도와 마케도니아 교회와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위해 열심히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비록 성경 이름은 티토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내용을 보면 초대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사목서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티토 1장 7~9절)

정말 바오로 사도 대단하십니다. 어찌 그리도 핵심을 찌르시는지요?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 되는 지도자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거만하지 않고 겸손해야겠습니다. 여간해서는 분노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기도를 통해 열심히 내공을 닦아야겠습니다. 술도 조심해야겠습니다. 말도 신중히 가려서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흠 잡힐 데 없는 사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이웃을 지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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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네가 한 번 해 보렴!"

2014년 가해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성 레오 교황학자 기념일

<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복음: 루카 17,1-6
 
< "네가 한 번 해 보렴!" >

태국 통신회사는 많은 감동적인 광고를 내보내는데 요즘 나온 것 중의 하나가, ‘엄마와 딸과 파인애플’이야기입니다.

엄마는 길거리에서 파인애플과 같은 과일을 파는 노점상인입니다. 딸이 돌아오다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는 광경을 봅니다. 그러나 엄마는 딸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줄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생각해 낸 방법이 파인애플을 아이스크림처럼 잘라서 손잡이를 꽂아 얼음 속에 넣어두었다가 아침에 딸아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딸아이는 아이스크림보다 맛있다고 하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팔아도 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엄마는 “네가 한 번 해 보렴”하며 얼음 박스에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세 개를 넣어줍니다. 아이는 하루 종일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사세요!”라며 시장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도 팔지 못하고 풀이 죽어 돌아옵니다.

그때 엄마는 아이에게 “시장에 가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물건을 파는지 구경해보렴”하며 격려해 줍니다. 딸은 시장에서 “고추가 한 묶음에 15원, 두 묶음 사면 하나 더 드려요!”라며 자신 있게 소리치며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와 “정말 너무 맛있는 돼지고기 바비큐 사세요”라며 물건을 파는 아저씨를 보고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크레파스로 아이스박스에다 “기절할 듯이 맛있는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이 한 개 15원, 두 개 사면 하나 더 드려요~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사세요~”라고 그림과 글을 쓰고 다시 시장으로 나갑니다.

장사가 잘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전거에 싣고 따르릉 따르릉 하기만 하니까 이이들이 뛰어와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을 사갑니다. 유명해 진 것입니다. 이것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는 행복합니다. 딸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 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화라고 하는데 아마도 그렇게 성공한 모녀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교육은 많이 배웠다고 해서 잘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신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하면 자녀들을 다그칩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이들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라도 열심히 해 냅니다. 그러나 삶의 즐거움을 없습니다. 겉으로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이 쌓여갑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즐거운 것을 할 수 있게 놓아두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 아닐까요? 우리는 아이들의 성공을 바라는 것일까요, 행복을 바라는 것일까요? 스스로 즐겁게 해 내야 행복합니다. 물론 그것이 세상에서 성공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이 하느님 눈에는 가장 가증스러워 보이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16,15). 이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도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 광고에 나오는 어머니는 딸이 하고 싶다면 “네가 한 번 해 보렴!”하며 기회를 주는 참다운 교육을 한 것입니다.

제가 유학하면서 이태리 본당에서 아이들과 캠프를 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개울을 건너고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제가 힘겨워 하는 아이들을 도와주었을 때 선생님들이 그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힘들고 넘어지고 물에 빠지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모범을 보여주고 뒤에 오는 이들이 따라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티토에게 편지를 보내어 ‘원로’들을 임명하라고 합니다. 원로는 ‘프레스뷔테로스’라고 하는데 개신교에서는 ‘장로’라 하고 가톨릭에서는 ‘사제’라 합니다. 그런데 사제를 뽑는데 이런 조건들을 내세웁니다.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에피스코포스’라고 하는데 우리는 ‘주교’라고 번역합니다. 주교님 또한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며”삶이 온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르침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가르침보다도 그 가르침을 살아내어 배우려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보면 따라 하게 되어있습니다. 교육은 말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
 
'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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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자기 훈련 -믿음의 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10일 월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티토1,1-9 루카17,1-6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티토서 1,1-9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 17,1-6                                                                                                          

자기 훈련 -믿음의 힘-

진정한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어제 무심코 한 제말이 하고 난 후, 옳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지인과 대화중 저는 제 믿음 부족을 고백했고 지인은 웃었습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은 다 옳은데 제가 믿음이 부족하여 잘 깨닫질 못합니다.“

또 어제 어느 자매의 편지를 받고 그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편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일요일인 어제로 위령 성월을 맞아 남편 묘에 가 연도를 하는 것이 끝났습니다.
남편이 가기전 죽어서도 자기에게 자주 오기를 바래,
남편 가고 난 그해부터 9년 째 11월 위령성월엔 1일부터 9일까지
매일 남편 묘에 가 연도와 묵주 기도를 하였지요.
지금은 오며 가며 묵주기도를 하고 묘에서는 연도만 하고 옵니다.
처음엔 교통편이 나빠 오고가고 7-8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5시간정도 걸립니다.
큰아들의 차를 타고 가면 가는 데만 한시간 좀 더 걸리지요.
아들이 효자라 올해도 6일간은 함께 가 주었고 혼자서는 3일간만 다녀 왔습니다.-

9년간 매 위령성월 11월 1-9일까지 남편 묘에 가서 연도를 바치는 것은
그대로 사랑의 표현이자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대로 믿음의 힘의 반영입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믿음의 힘이 없으면 항구하기 힘듭니다.

오늘 1독서에서 원로와 감독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이 참 까다롭습니다.
둘 다 공히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한다고 하며,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감독은 더 까다롭습니다.
비단 감독뿐만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인격의 본보기 같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감독(주교)은

1 거만하지 않고,
2 쉽사리 화내지 않으며,
3 술꾼이나
4 난폭한 사람이나
5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6 손님을 잘 대접하고
7 선을 사랑해야 하며,
8 신중하고
9 의롭고
10 거룩하고
11 자제력이 있으며,
12 가르침을 받은대로 진정한 말씀을 듣고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온전한 인간의 전형입니다.

덕목따라 번호를 매겨 보았습니다.
내 전인도(全人度)를 평가할 수 있는 항목들입니다.
과연 어느 항목이 잘 되고 있으며 어느 항목이 부족한지요.
한 항목을 1점으로 할 때 12점 만점에 몇 점쯤 될까요?

이런 덕목들은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훈련의 결과입니다.
늘 깨어 노력하고 연마한 훈련의 결과입니다.

이런 자기훈련의 열매가 덕이며 자유입니다.
자기훈련의 끊임없는 노력 없이는 덕도 자유도 없습니다.
하여 수도자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훈련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늘 깨어 자신을 추스르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스스로 조심할 때
남을 죄짓게 하는 일도 적어질 것이며 잘못한 형제들에 대한 용서도 용이해질 것입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깨어 있도록 하는 것, 역시 믿음의 힘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제자들은 즉시 주님께 믿음을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좋은 믿음을 선사하시어 자기훈련에 항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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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2014년 가해 11월10일 월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티토서 1,1-9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 17,1-6
 
신학교 교정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보를 하면서 자주 읽었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사제들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4시간 기도를 하는 사제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사제로서 최소한의 것들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글이 신학교 교정에 있는 것은 그런 정도의 최소한의 사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사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합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장미향이 나듯이, 사제는 그리스도의 순명, 가난, 정결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에서 교만, 허위, 욕심의 냄새가 난다면 세제복은 입었지만 세상의 것들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강론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지녀야 할 사명입니다. 특히 사제는 말씀을 잘 묵상하고, 신자들에게 선포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신변잡기를 늘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성급한 판단으로 편을 갈라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고, 신자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야 합니다.

사제는 고백성사를 비롯한 성사를 성실하고, 경건하게 집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족들을 위해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거친 말을 들을 때도 있고, 속이 상할 때도 있지만 꾹 참고 견디면서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미사 시작 30분 전에는 고백소에 불을 켜고 신자들을 기다렸으면 좋겠습니다. 장례가 나면 제일 먼저 가서 유족들을 위로하고, 연도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봉성체를 가면 대화를 많이 나누고, 외롭고 아프신 어르신들에게 주님을 모셔드리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노력일 뿐입니다.

사제는 먼저 성직자이기전에 인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仁義禮智’는 먼 옛날 어르신들만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아닙니다. 전통과 관습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소중한 전통들을 사제들이 먼저 지키고 보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신자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제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방앗간을 하시는 형제님께서는 외로운 어르신들에게, 소년 가장들에게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어김없이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동네 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성당으로 오셔서 비가 세지 않도록 창문을 닫고, 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수구를 치우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시고 가는 형제님도 보았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본당을 사랑하는 형제님의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사제가 피정을 가면 늘 성당에 나와서 마당도 쓰시고, 사무실도 돌보고, 수녀님들 도와 드리는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 계시기 때문에 피정도, 휴가도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용서는 영어로 ‘Forgiveness’입니다. 용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주는 것만이 용서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재능을 나누어 주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용서합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아름답게 이야기해 주는 성서 말씀은 루가복음 15장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바로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에게 가장 큰 덕목인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용서는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용서는 나를 구원에로 이끄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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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

11월10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기경호 신부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루카 17,1-6(14.11.10)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공동체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 가지 길에 대해 말씀하신다.

곧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1-3ㄱ),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해주며(3ㄴ-4), 굳은

믿음을 가지라(5-6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남을 죄짓게 하지 않고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길을 묵상해본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살아가기에 ‘남을 죄짓게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죄짓게 하다’란 말은 직역하면 ‘걸려 넘어지게 하다’이다. 걸려 넘어지는 계기는

다양하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사랑이시고 모든 선(善)이신 하느님과

예수님(마태 11,6; 13,57)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 이것은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

자비하신 주님’(태양의 찬가)과 나약한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적인 거리 때문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서

다른 사람의 개입 없이도 걸려 넘어진다. 자기 안에 형성된 왜곡되고 비합리적인 사고나

과거의 상처, 고정된 사고의 틀을 버리지 못한 채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뿐 아니라

절망하고 자신을 혐오해버리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그 상처와 어두움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여 그들마저도 죄를 짓게 한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터인데 왜 오히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일까? 사실 죄의 유혹은 인간의 나약성에 비해 매우 강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런 유혹의 실체를 간파하여 “감추어진 유혹이나 드러난 유혹, 갑작스러운 유혹이나

끈질긴 유혹에 빠지지 않게”(주님 기도 9)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우리가 남을 죄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사랑의 연대책임 부족'과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罪性)과 악에 기우는 경향 때문이다. 각자가 영혼의 어둠과 상처,

아픔이 있기에 서로 상처받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서로 죄짓게 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죄의 유혹은 인간의 한계와 이 세상의 속성으로부터 당연히 일어나지만 의도적으로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는 불행하다(17,1). 그런 사람은 자기 죄뿐 아니라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한 책임도 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것보다 다른

사람, 특히 ‘보잘것없는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당시 몹시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던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17,2)고 하신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죄짓게 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임을 강조하시면서

‘스스로 조심하라’(17,3)고 경고하신다.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말과 행동으로

직접 남을 죄짓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으로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다른 이를 죄짓게 하지 않으려면 내 자신이 사랑의 존재가 되고 그 사랑을

끊임없이 나누어야 한다. 하느님의 선을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건네고 되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남을 죄짓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랑과 선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하는 ‘묻지 마’ 범죄는 무관심과 냉대, 사랑결핍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나의

적극적인 해코지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내가 해야 할 사랑 실천과 선행을

소극적으로 하지 않을 때도 일어나는 것이다.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현대인의 가장

큰 죄는 ‘무감각’이라 했다. 다른 이의 아픔에 무관심할 때, ‘방치된 아픔’,

‘사랑의 버림’이 다른 이의 영혼과 삶을 파고들어 죄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 죄는 결코

개인의 죄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 결핍에 기인한 ‘사회적 죄악’이다.

이런 뜻에서 오늘도 우리는 남을 죄짓게 하고 있지 않은지 정직한 성찰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깊은 연민의 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사랑하시고, 모두가 하느님의 선(善) 안에

머물며 행복하기를 바라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깊이 새기며 살아가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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