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24 06:47:10    조회 : 513회    댓글: 0

◈ [청주] 기회를 놓치지 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루카12,54-59)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기회를 놓치지 마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넘어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는 바를 실천해야 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하고 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기회는 놓칠 수 없는 찬스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세상 것을 쫓다가 안전사고에 둔감해졌습니다. 세월호 사고뿐 아니라 현실적 이익과 편리성을 선택한 사고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음을 봅니다. 정신 차려야 하겠습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의 끈으로 주어진 일치
 
2014년 가해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복음: 루카 12,54-59
 
< 성령의 끈으로 주어진 일치 >

며칠 전에 연합뉴스에 ‘몸 불편한 할머니 도운 경찰에 건네진 사탕 두 알’이란 훈훈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서울 이태원 파출소에 87세 할머니가 장을 본다며 나갔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20여일 전 신장수술을 받으셔서 2주 만에 극적으로 의식을 회복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걸음걸이가 불편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신고를 접한 순경은 팔방으로 찾은 끝에 신고 받은 그 인상착의의 할머니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걱정하는 가족에게 전화하여 안심시킨 다음 차로 모시고 와서 더 이상 차가 올라갈 수 없는 경사 높은 길을 할머니를 업고 40여 미터를 갔습니다.

가족들에게 할머니를 잘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손짓을 하시며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사탕 두 알을 꺼내 건네며, “마침 집에 있는 것이 이것뿐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경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할머니가 주는 것이니 받아라”고 해서 사탕 두 알을 손에 쥐고 돌아왔습니다.

지난 2월 임용돼 이태원파출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신 순경은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손자가 느끼는 감정을 잘 몰랐는데, 그 할머니를 돕다 보니 마음이 짠했다. 이번에 느낀 감정을 소중히 간직해 경찰관으로서 어려운 분들을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작은 도움과 작은 갚음이지만 작지만은 않은 감동을 줍니다. 받으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양심에 받으면 주어야 한다는 법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고받는 무언가를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일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일치시켜 주는 힘은 바로 ‘성령님’이라고 정의합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웃에게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자신 안에 성령님을 먼저 모시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 즉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는 이 성령의 끈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당신의 모든 것, 즉 성령님을 보내셨고, 아드님은 또한 그 성령님을 아버지께 돌려드렸습니다. 이 성령님을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제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바칠 제물이 더 이상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관계는 거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순경은 할머니를 업어주면서 제물을 바친 것이고, 할머니는 자신의 소중한 사탕 두 개를 내어주시며 보답을 한 것입니다. 이 오고가는 것이 사랑이고 관계를 이어주는 성령의 끈인 것입니다.

우리 고전 동화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누이가 나중에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고 호랑이는 떨어져 죽어서 수수가 빨갛게 것이라고 합니다. 동화가 좀 잔인합니다. 그런데 더 잔인한 것은 그 전에 호랑이가 오누이의 어머니를 잡아먹는 이야기입니다. 오누이의 어머니가 떡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산을 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떡 하나를 던져주고 다음 산을 넘었더니 또 나타나서 떡을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떡이 다 떨어지자 손과 발까지 달라고 해서 그것마저 떨어지자 잡아먹혔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모든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시 자신을 바치는 희생의 선물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떡은 선물이요 제물입니다. 이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상대의 사랑이 식었음을 직감하고는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바쳐야 할 제물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신앙인에게는 이 제물이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 성령의 힘으로 온갖 선행과 봉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기에 아버지로부터 성령님을 받으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또 당신이 당신 생명을 아버지께 바치시기에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8)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바치시는 당신 생명이 성령이시고, 또한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선물이 성령이시기에 아드님은 다시 생명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가 이 성령의 끈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요구하시고, 자신의 전 재산을 몽땅 봉헌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내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 #####

◈ [기타] 삶과 죽음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12,57)
---
잠시 후 또 한 분의 장례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얼마 전, 교황님의 방한에 맞추어 한국으로 성지순례도 함께 갔던 75세의 자매님이십니다.
아침에 일어나시지를 않아 이상해서 남편이 확인하니 돌아가셨다 합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고는 계셨지만, 지난 주일에도 미사 후에도,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던 터라서 저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며 답을 얻어냅니다.
망자가 남긴 기억들을 떠올려봅니다.
참 좋은 기억들뿐입니다.

사제로 살다 보니, 좋은 죽음도, 그렇지 않아 보이는 죽음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맺었던 수많은 관계들 안에 남겨진 우리에 대한 기억일 것입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겨질 수 있는 삶들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미사에도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다가올 지 모를, 하지만 확실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림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억들을 사람들에게 남기면서 살고 있을까요?
결국 잘 죽기 위해서 잘 살라는 명백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려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삶과 죽음.
이보다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올바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기운 냈으면 좋겠습니다.
---

제가 20대 중반 때 나온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꽤 많으시리라 봅니다.
그 당시, 멜로디가 좋다는 정도였지, 가사 내용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젊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 가사 말이 정답게 들려옵니다.
자주 흥얼거리는 애창곡이 되고 말았습니다.
함께 흥얼거려볼까요?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외로운 사람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걸.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 #####

◈ [수도회] 깊이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4,1-6 루카12,54-59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깊이의 삶

인문학 열풍을 말하지만 실제 인문학이 경시되는 사회는 천박한, 얕고 가벼운 세상입니다.
잉여사회의 특징은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잉여시대, 잉여사회일수록  살길은 깊이의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는 길뿐입니다.

"현장감이 떨어지면 끝이다.
본질로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만 서성대면 쪽팔리는 거다.
모든 일, 인생의 성패도 결국은 거기서 갈린다고 본다."

어느 유명 패션디자이너의 마지막 인터뷰 대목입니다.
피상적 얕은 삶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으로 회귀하라는 것입니다.

"다산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4가지 규율을 지켰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몸을 단정히 하며, 말을 삼가고,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나도 그 가르침을 따르려 애쓰고 있다."

토굴에 은거하며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는 전직 정치가의 고백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로 끊임없는 회개의 삶과 직결되는 본질적 깊이의 삶입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하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오늘날 피상적인, 감각적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 깊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로 주님을 만날 때 올바른 분별의 지혜요, 눈이 열려 시대의 징조를 읽습니다.

1독서의 바오로가 오늘 복음에 답을 줍니다.
주님을 만날 때 '하나'에로의 귀환이요, 단순하고 본질적인 깊이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질입니다.
이런 '하나'를 체험할 때 내외적 분열의 치유요,
이런 '한 분'을 만날 때 깊은 내적평화에 시대의 징조를 읽을 수 있는 눈도 열립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부르심에 합당한, 깊이의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바로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평화와 일치의 은총입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 #####

◈ [서울]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10월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 12,54-59
 
빌 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입니다. 그는 부자에도 3가지 부류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입니다. 기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투자를 통해서 부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부를 이웃들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자선사업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부를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요트를 사고, 비싼 차를 사고, 궁궐 같은 집을 사는 사람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같은 부자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내와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 세계 주교 회의를 마치면서 교황님께서 주교님들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것처럼 교회도, 주교님들도 많은 유혹을 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회가 직면하게 되는 유혹 5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완고함에 빠지는 유혹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많이 아는 것으로 남을 심판하고, 비난하려는 유혹입니다. 교회에 있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잘못한 이들을 하느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여기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상처를 치유하기 전에 붕대부터 감으려는 유혹입니다. 붕대를 감으면 상처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것으로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주와 자유는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묘약은 없습니다. 오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물질과 자본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물질과 자본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모두 영적인 형제요 자매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는 유혹입니다. 십자가는 차에 걸어 놓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무겁지만 우리가 묵묵히 지고가야 하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와 함께 지냈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는 교회의 유산을 포기하려는 유혹입니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는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은 없듯이, 교회의 전통과 정신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식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세상은 돈을 목적으로 하고, 이윤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돈과 이윤을 추구하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잊히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 외롭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판단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이런 문제 앞에서 어떻게 결정을 했을까를 생각하면서 판단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늘 같은 방향을 향해서 움직입니다. 어둔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기준을 삼은 북극성은 늘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같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일의 날씨는 예보하면서,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느냐!’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를 참된 식별에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세상의 뜻을 헤아리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외모를 가꾸려는 마음만큼, 내면의 정신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재산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며,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일들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