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21 06:54:38    조회 : 602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제1독서 에페 2,12-22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루카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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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한 학생에게 “너 신부님 되지 않을래?”라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 학생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도 신부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신부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날 자신도 없고, 또 매일 다른 내용의 강론을 쓰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따라서 신부님은 도저히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또한 학교 성적도 좋았지요. 그렇다고 신부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사제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본당신부인 저의 모습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제가 반드시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고, 묵상 글을 매일 써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히 임하면 그 자리에서 최고의 사제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학생은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으로만 비교하다 보니, 좋은 사제가 될 수 있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사람을 원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제자들을 그렇게 뽑지 않았겠지요. 더 능력이 많고, 더 많이 교육을 받고, 또한 성격도 좋으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오히려 ‘부족함’ 그 자체인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삼가 조심하라고 일러 주신 것과 비슷하지요. 즉, 육과 영과 정신이 깨어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깨어 있음은 언제 깨어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라고 나옵니다. 성경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낮, 밤중, 새벽의 의미는 인간의 세 시기인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뜻하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어느 정도 주님을 알 때부터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교육과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행복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생각도, ‘나중에 하지 뭐.’라는 안일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일은 부정적인 마음을 통해서는 할 수 없으며, 지금 당장 해야 하며, 그것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만이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의 모습으로 참으로 행복합니다.

지금 내 자신은 행복에 얼마나 가까이에 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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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면 쉽지 않고, 쉽다면 멋지지 않을 것이다(밥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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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 졌을 때가 하늘을 볼 수 있을 때이다.

언젠가 ‘돼지는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돼지의 목이 땅을 향하고 있어 기껏 높이 들어봤자 45°밖에 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하긴 제가 본 돼지는 늘 땅만을 바라보며 킁킁 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돼지도 하늘을 볼 수 있을 때가 있다고 하네요. 바로 ‘넘어 졌을 때’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삶 안에서도 넘어질 때가 참 많았습니다. 실패했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커다란 실수로 인해 부끄러운 상황에 놓였을 때, 가정과 직장 안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바로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을 때였습니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실패를 해봐야 좀 더 조심하게 되고, 몸의 이상이 생겨야 자신의 건강을 살피게 되지요. 또한 실수와 부끄러운 일을 경험할 때 더욱 더 겸손하게 되며, 각종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을 때 한층 더 성장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넘어 졌을 때’가 끝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멋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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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루카12,35-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 12,35-38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 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며 오늘에 충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 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 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평상시 집안정리를 잘 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소위‘열심 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해했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마음도 꼭 맑은 것은 아닙니다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내일도 내일 같이 하고 남 일도 내일 같이’할 때 희생이고 봉헌일 것입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의 준비와 영혼의 깨어있음은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어서 행복한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종들 각자의 행위에 의해 결정됩니다. 항상 깨어 안 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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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허리에 띠를 맬 때 마다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 12,35-38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사제들이 미사 전 정식 제의를 입을 때는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하나 하나 걸칠 때 마다 그 순간에 합당한 기도도 바칩니다. 제일 먼저 착용하는 것은 표현이 좀 특별한데 개두포입니다. 어깨 위로 하얀 보자기를 걸친 후 끈으로 묶습니다. 이때 바치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내 머리에 투구를 씌우시어 마귀의 공격을 막게 하소서.”

이어서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면서 또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조찰함의 띠로 저를 잡아매시고, 또 제 안에 사욕을 없이 하시어 욕망을 절제하며 정결의 덕이 있게 하소서!”

이윽고 마지막 단계 제의를 입으면서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사제의 기도는 이미 제의방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예식을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해 사제는 허리에 띠를 매면서 준비를 시작합니다.

사제서품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장엄한 입당성가와 함께 입장행렬이 시작됩니다. 저희는 장백의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왼쪽 손에는 제의를, 오른 손에는 큰 초를 하나 들고 입장을 초긴장 상태로 입장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손에 켜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때 마다 그때 당시의 가슴 설레고 떨리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언제까지나 사제품 때의 긴장과 설렘의 마음으로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장 35~36절)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 등불을 켜놓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오늘날 신발 끈을 동여매는 것, 손전등을 챙기는 것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것, 머나먼 밤길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스카 축제일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억을 되살리는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때 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매었습니다. 이유는 약속의 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응답하겠다는 의미에서의 행동이었습니다.

요즘 미사 전 제의를 갖춰 입을 때 허리에 띠를 맬 때 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선배 살레시안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님, 지금 제가 봉헌하려는 이 미사가 제 생애 마지막 미사인 듯 봉헌하게 하십시오.”

매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맬 때 마다 짧은 화살기도를 되풀이해야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하루가 제 생애 마지막 날인 듯 살게 하소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마지막 만남인 듯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지상에서 완수하는 마지막 임무인 듯 정성껏 임하게 하소서. 오늘 매 순간 주님 은총 안에 깨어있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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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복음: 루카 12,35-38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

어제 유투브에서 재미있는 원숭이 실험을 보았습니다.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입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시켜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 원숭이는 돌을 받아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합니다. 조약돌을 주고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도 조약돌을 다시 놓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밖으로 집어던집니다.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버리고는 철창을 뜯고 흔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매우 화가 난 것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했는데 맹맹한 오이만 먹고 다른 원숭이는 계속 맛있는 포도를 먹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오이로도 만족했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불행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부족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제대국이 되었는데도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이 돈이 행복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돈에 치중하는 이유는 아직도 참 행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처음 원숭이에게 오이 대신 포도, 그리고 더 맛있는 것을 준다면 그 옆에 원숭이가 포도를 집어 던질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는 절대로 마음의 평화도 사람들 간의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평화 때문에 분열 없이 ‘양쪽’ 모두 한 가족처럼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도 외국인도 모두가 구별 없이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한 건물의 부분처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결국 한 건물인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모퉁잇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들에겐 분열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가진 이들은 다 가진 이들이기에 서로 부족하여 시기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당신 생명입니다. 당신 생명을 구분 없이 주고 계셔서 그 생명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믿기만 한다면 더 이상 분열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인종이나 나라에 상관없이 똑같이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누구와 비교하여 질투를 느끼던가, 그래서 불행해진다면 사실 믿음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신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평화이고 기쁩니다. 그분 이외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야 마땅한데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하고 있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피의 가치, 성령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성당에 들어서면 우측에 미켈란젤로의 수작 피에타 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모님이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 대리석 조각은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피에타 상은 유리로 막혀져 있습니다. 그것을 유리로 막은 이유는 어떤 조각가가 저것이 어떻게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냐며 올라가 망치로 때려 성모님의 손가락과 코 등이 파손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예술성을 잘 모르지만 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재능이 있는 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느님께 덜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가장 훌륭한 예술품에 흠집을 내고 자기 인생에도 흠집을 내게 된 것입니다.

질투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 성령은 이 세상의 모든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면 서로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는 바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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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죽음 준비는 평소에 미리 잘 하라고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 12,35-38

죽음 준비는 평소에 미리 잘 하라고

방청소와 정리정돈을 잘 해놓으면 언제 누가 와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약, 예고, 사전허락 등으로 미리 알려주는 게 생활습관화 되었습니다.
갑자기 누가 들이 닥치면 때론 얄밉기도 하고 때론 화까지 나기도 합니다.

그 날과 시간을 알아도 그 때에 가서야 급하게 덤비다보면 실수도 합니다.
시험 준비는 평소에 공부 열심히 잘 하라고들 어른들이 곳잘 말합니다.
예수님도 죽음 준비는 평소에 미리 잘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맞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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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깨어있으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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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이십니다.
깨어있는 종들을 위해 몸소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그림을 그리어 봅니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광경이 눈 안에 들어옵니다.
시중을 받고 있는 깨어있었던 종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의 논리와 감각을 뛰어넘는 세계일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완벽한 사랑을 우리 역시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을 뿐입니다.
그분과 같은 마음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결국 누구나 맞이해야 할 그 시간을 의식하라는 말씀이시겠지요.
하여,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고, 그것이 기준이 되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늘 똑똑한 척하면서도 부질없는 것들로 마음을 빼앗겨,

의미 있는 것들을 잃어가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자주 대하게 됩니다.
너무 아까운 시간입니다. 이 아깝고 귀한 시간을 스스로 안타깝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며,

주어진 시간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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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 12,35-38
 
2007년 9월 5일 자동차를 샀습니다. 주행거리는 35,000킬로입니다. 많이 타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갈 때, 어머님께 갈 때 제게는 친구와 같은 차입니다.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운전하기 전에 살펴 볼 것들이 있습니다. 정기 검사도 받아야 합니다. 운전대 앞에는 각종 계기판이 있습니다. 주로 눈여겨보는 것은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표시하는 계기판입니다. 타이어의 상태도 보아야 하고, 와이퍼의 상태도 살펴야 합니다. 워셔액도 채워야 하고, 가끔씩은 엔진 부위도 점검해야 합니다. 안전한 운행은 꼼꼼한 점검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사회에 각종 사고와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다보면 이런저런 사고와 사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안전에 대해서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아까운 생명이 다치는 사고는 많이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물질과 재물에 집착하기보다, 사람의 생명과 문화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좀 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89년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체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이 주제는 오늘 제1독서인 에페소서에서 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인 이유를 4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한 몸을 이룬다고 합니다. 내 몸의 지체들이 아프면 돌보듯이, 우리들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본다면 그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 올 것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가로막는 벽을 허물었다고 합니다. ‘적개심, 편견, 차별, 분노, 원망, 불평, 시기심, 교만, 욕망, 걱정, 근심’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을 가로막는 벽은 외부에서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들의 내부에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청하면 주실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며,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로 오십시오. 내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물, 불, 바람, 흙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입니다. 이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제5원소가 바로 사랑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고 합니다. 고통과 치욕의 상징인 십자가는 이제 우리를 하느님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걸림돌로 여겨지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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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사람들! -깨어 있음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에페2,12-22 루카12,35-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 12,35-38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사람들! -깨어 있음 예찬-

지금 여기 깨어있는 사람들이 진정 살아있는, 건강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자기를 잊고 잠들어 있는 불행한 영혼들도 많습니다.

깨어 있어야 일상의 늪에서, 무기력, 무의욕,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하느님의 현존을 살 수 있습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수행생활이,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생활이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 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깨어 있는 당신의 공동체가 주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진정 깨어 있는 주님의 공동체가 아름답습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충만입니다.
깨어 있음은 갈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찬미입니다.
깨어 있음은 감사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입니다.

그대로 깨어 있음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깨어 있지 못해 세상 것들에 중독이요, 세상 우상들에 종이 되어 삽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보다 영혼의 병에 더 좋은 치유제도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샘솟는 깨달음에, '참 나'의 삶입니다.
깨어 있음, 깨끗한 마음, 깨달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연 하루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참으로 깨어 있는 영성훈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깨어 있는 삶입니다.
바오로가 묘사하는 다음 모습은 그대로 주님을 알아 깨어 살기 전,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오늘날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있습니다.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주 그리스도 안에 깨어 있는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우리를 하나로 만드시고 우리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하여 당신 안에서 서로 다른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약간 말마디를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미사은총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깨어 있다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선사하시며 새 인간, 새 공동체로 창조해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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