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하늘나라의 실체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12 08:01:33    조회 : 500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이사 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제2독서 필리 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마태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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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그제를 이용해서 저는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틀 동안의 교육이 모두 18.5시간, 아침 8시 30분에 시작해서 저녁 6시 30분까지 계속되는 교육이었지요. 교육 내용은 정말로 좋았지만, 오랜만에 피교육자가 되어서 참석하는 교육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제로 살아가는데 이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보다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을 더 드릴 수 있을까 해서 선택한 교육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둘째 날에는 ‘가지 말까?’라는 유혹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교육을 받는 장소도 너무 멀었습니다. 출퇴근 시간,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거의 2시간을 가고 오는 것이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래서 ‘교육 참석을 하지 말까?’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함께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대기업 은퇴를 앞두고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신 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오신 분,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오신 분 등등……. 이분들 역시 교육 받고 싶지 않은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힘든 교육이지만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모습에서 저 역시 함께 해야 함을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육을 모두 마친 뒤에는 모두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오랫동안 인사를 나눌 수가 있었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삶은 순간의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남의 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기쁨은 체험할 수 없겠지요. 또한 이 과정 안에서 얻게 될 많은 것들 역시 전혀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의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달해주십니다.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사람들은 오려고 하지 않지요.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갑니다. 바로 자기 일에만 매어 있는 것입니다. 임금의 초대보다 자기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혼인 잔치에 가는 것이 귀찮을 수도 있을 것이고, 별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을 보았다면 그리고 이 혼인잔치에서 만나게 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자신의 일과 세상의 일을 제쳐두고 초대에 응했을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르심, 이웃과 함께 하라는 부르심,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라는 부르심,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힘이 되라는 부르심 등등…….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금은 진노해서 군대를 보내어 없애고 고을 역시 불살라 버립니다. 임금의 진노를 받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초대에 적극적으로 임해서 혼인 잔치를 즐기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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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함으로써 사람들은 단결하고 하나가 됩니다. 또한 사람 각자에게 있는 보편적인 지성이 연합을 뒷받침해줄 것입니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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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제의 길을 걸으신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제가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후회하지 않는 까닭은 제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도, 죄를 지을 때에도, 약하거나 실패할 때에도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초대되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분은 절대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앞으로 갈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앞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게끔 하시는 분, 그래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기쁘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분. 이러한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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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하늘나라의 실체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하늘나라의 실체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궁금한 궁극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언젠가 입국하게 될 하늘나라의 실체입니다. 한 봉쇄 수녀원 부활성야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전례를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수녀님들이기에 갖은 정성을 다 기울여 미사 전례를 준비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전례에 감동했고 너나할 것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처럼 부활성야 미사는 독서도 한 두 개가 아니고 빛의 예식도 추가되는 등 소요시간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정성스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깊이 몰입하니 전혀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회중은 그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한 뒤 아름다운 성가로 응답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당시 그 거룩한 전례의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문득 든 생각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펼쳐질 광경은 아마 이런 광경이 아닐까? 하느님이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요셉 성인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함께 하시며, 사랑으로 충만한 뽑힌 이들이 둘러앉아있는 곳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 선포되며,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기쁨에 찬 찬미의 응답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곳.’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초대되지만 어떤 사람들 특히 영성생활에 맛들이지 못한 사람들, 기도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나 지루하고 괴로워 마치 생지옥 같은 느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그들이 지상에서 그토록 즐겨보던 막장 드라마도 더 이상 없습니다. 더 이상 상다리 부러지는 휘황찬란한 연회상도 없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그저 밋밋하기만 한 말씀 잔치만 되풀이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 이 지상에서부터 ‘밋밋한’ 천국 생활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 습관,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천진난만한 생활 태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영적생활.

사실 하늘나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신 분,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상관없이 골고루 비를 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진홍빛 같다 할지라도, 지난 삶이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만 찾는다 할지라도, 너무나 부당해서 매일 가슴을 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그저 존재 자체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단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천상복락에 참여하기 위한 한 가지 작은 조건이 있습니다.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는 것입니다. 그 예복도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잔치 주인이신 하느님의 적극적인 초대에 두말 하지 않고 응하는 것입니다. 천국 생활이란 하느님께서 차려놓으신 산해진미를 감사하며 만끽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그분 권고에 따라 회개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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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부의 합당한 옷은 신랑을 전부로 여기는 마음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복음: 마태오 22,1-14
 
< 신부의 합당한 옷은 신랑을 전부로 여기는 마음 >

어느 날 사탄이 열개의 병을 들고 한 청년을 찾아와서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는데 꿀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 마시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돈이 아무리 좋아해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유혹하는 사탄의 간청에 청년은 ‘열 병중에 딱 한 병인데...’하며 떨리는 손으로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난 청년은 돈을 받으며 다시는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고 사탄에게 말했습니다. 청년이 방탕하게 살다가 돈을 다 탕진했을 무렵, 사탄이 또 나타났습니다. 그 청년은 사실 마음으로 사탄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이번에는 아홉 개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청년은 돈이 필요했기에 이번에도 모험을 했고 다행히 이번에도 꿀물을 마시고 두 배의 돈을 받았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쉽게 번 돈으로 인생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콜, 마약중독 등으로 삶이 허물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 사탄을 불러댔습니다. 계속 그 위험한 선택을 했고 하면 할수록 두려움마저도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돈이라면 영혼까지 팔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이젠 ‘돈 벼락이냐, 죽음이냐’하는 마지막 인생의 승부를 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노년에 이른 그는 남은 두 병 중 한 병을 식은땀을 흘리며 꿀꺽 삼켰습니다.

“아! 나는 이겼어. 끝까지 살아나고야 말았어! 이제 어서 돈을 내놔라.”

승리에 도취되어 어쩔 줄 모르는 노인에게 사탄은 마지막 병을 스스로 마시면서 “후후,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지. 그러나 너는 이미 돈이라는 독약에 죽어가고 있었던 거야! 너는 청춘을 돈이란 종이에 얽매어 노예로 살다가 그것에 묶여 영원한 것을 잃어 버렸다. 자 이제까지 받은 돈의 대가를 지금부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고통과 함께 지불해야 할 것이다. 하하하~~~”라고 하며 돈을 부여잡고 죽어가는 그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하나에 집착하면 다른 것은 잃고 맙니다. 이 주인을 섬겼다면 저 주인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교만, 육체적 욕망, 세상의 유혹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면 마치 자캐오가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처럼 세상 것은 쓰레기가 돼 버립니다. 만약 세상 것이 소중하여 그것을 잃었을 때 내가 흔들린다면 아직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그분만이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사랑이시고 나의 신랑이시며 나의 전부가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전부라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차 없이 바칠 수 있을 때에야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믿음이 없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말씀입니다. 즉, 임금으로부터 초대받은 많은 이들은 그 귀중한 초대를 거부합니다. 그 거부하는 이유는 세상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곧 죽음으로 심판받는 것이 됩니다. 관계는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하느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응답하여 왔어도 혼인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앞에 나오는 21장을 설명해주는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22장 1절부터 14절까지인데, 저는 이것이 21장의 결론으로 서로 다른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21장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요한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예루살렘이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안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을 상징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혼인 이야기를 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잘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 들어갔더니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마음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성전정화’인 것입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을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그들의 불신앙의 문제점을 밝히십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려 했던 것처럼 믿음의 열매가 아닌 자신들의 행위로 인정받으려던 이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의복을 갖추지 않은 이들입니다. 의복은 하느님의 어린 양의 피로 빨아 깨끗해진 것이라야 합니다.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진 이들만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를 저주하여 영원히 믿음의 열매가 맺지 못하게 하셨던 것처럼, 믿음이 아닌 자신들의 공로로 옷을 만들어 입으려 했던 유다인들의 불신앙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맏이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명을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돌려 일을 하러 갔고, 작은 아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믿었던 세리와 창녀들이 그를 믿지 않아 변화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지금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파견된 세례자 요한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증거하라고 열두 사도로 이루어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그분이 파견하신 교회를 믿는 행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못된 소작인의 비유’를 들어주시며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 안에서 당신이 어떻게 또 한 번 돌아가시는지 알려주십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느라고 주인의 아드님까지 죽이게 됩니다. 주인의 아드님은 포도원에 오십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 것에 집착하여 믿음을 저버린 이들 안에서 또 돌아가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도 말씀과 성체로 들어오시지만 우리가 세상 것에 얽매여 있을 때면 또 우리 안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죽으면 구원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인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혼인은 믿음으로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은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사 그 초대에 응했더라도 합당한 믿음의 옷을 입지 않고 겉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삶으로는 세상 것에 집착한다면 마지막 날에 역시 쫓겨나게 되리란 것입니다.

흰 옷은 그분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합당한 변화란 세상 것을 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전이 세상 것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세상 것이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신부에게는 신랑이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애정이나 재산, 명예나 자녀 등으로 괴로워 못 견딘다면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또 돌아가시고 맙니다. 이 세상 것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다면 이젠 혼인잔치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녁때가 되면 동네에 항상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뛰어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각자의 집에서부터 엄마들이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구슬치기, 딱지치기, 전쟁놀이에 열중하다보면 엄마의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나중에 엄마의 큰 소리가 나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정말 엄마의 따듯한 사랑이 담긴 저녁식사보다도 나중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의미 없는 구슬이나 딱지에 왜 그리 집착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쓰레기와 같은 세상 것들에 집중하며 그분의 초대를 거부합니다. 혹은 성체를 모시는 감사보다도 봉헌하는 헌금을 더 아까워하기도 합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 것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때 증명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며 믿음을 증거해 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들을 휴지조각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청합시다.

이번 일주일간은 사제 연수가 있어서 복음묵상이 없겠습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십시오 ~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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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하느님의 부르심은 공평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의 초대가 마감되는 시간은
늘 공평하게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2014년10월12일 연중 제 28주일 복음묵상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마태오22,4)
 ---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신앙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 즉 값진 초대를 받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초대를 받아들이고 거부하고는 모두 우리의 몫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여러분은 분명 초대에 응한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응답이 정말 그분의 초대에 올바른 응답으로서 그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는

평생 각자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공평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과 역시 공평할 것입니다.

결국 주어진 시간 안에 응답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응답을 한다는 것은 요구하는 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요구에, 부르심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응답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초대가 마감되는 시간은 늘 공평하게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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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축제의 삶을 살기위하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이사25,6-10ㄱ 필리4,12-14.19-20 마태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축제의 삶을 살기위하여

실로 중요한 것은 꿈이요 희망이요 비전이요, 이들이 사람을 고결하게
합니다. 잘 먹어서 건강이 아니라 꿈이, 희망이, 비전이 생생할 때 심신의
건강입니다. 꿈을, 희망을, 비전을 잃으면 서서히 타락이요 건강도 잃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하면서도 절실히 깨달은 것은 '영양신화'에서 해방되자는
것입니다. 영양가가 있든 없든 생생한 희망이 있어 기쁘게 먹고 힘껏 살면
저절로 건강해집니다. 굳이 건강식품을, 보조식품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최고의 식이자 약은 희망이요 꿈이요 비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축제의 삶을 살기위한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희망을 지니십시오.

우선적으로 지녀야 할 바 희망이요 꿈이요 비전입니다.
이런 희망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의욕입니다.

성경의 사람들 모두가 희망의 사람들, 꿈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언자들이 그러합니다.

실로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런 희망을, 꿈을, 비전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 이사야의 비전은, 꿈은 얼마나 희망에 넘치는지요.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얼마나 빛나는 꿈의 비전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은연중 깨닫는 현실이 아닙니까?

바로 우리의 희망은, 꿈은, 비전은 하느님 그분이심이 다음 고백을 통해
감격스럽게 계시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이런 하느님의 꿈입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 희망과 꿈, 비전의 원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모실 때 비로소 삶은 축제가 됩니다.

둘째, 삶을 즐기십시오.

하느님이 그 삶의 희망이자 꿈이, 비전이 될 때 자유입니다.
세상속에 살되 세상에 초연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실로 환경이 지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꿈이, 희망이 자유롭게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유를 누리는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영원한 희망이자 꿈이신 주님 안에 살기에 이런 축제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기에 이런 자유인의 삶, 축제의 삶입니다.

셋째, 축제의 초대에 응하십시오.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잔치입니다. 삶의 잔치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축제의 삶을 맛볼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도, 깊이도 결코 계시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비로소 축제의 삶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혼인잔치가 상징하는바 삶의 축제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가 삶은 축제임을 웅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어떤자는
장사하러 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합니다.

삶의 축제에 참석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현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삶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세례로 끝난 초대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옷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예복을 입지 않아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이가 믿는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과연 주님의 미사잔치이 초대에 응한 우리들,  이 잔치에 맞는
예복을 입으셨는지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끊임없이 공동체 삶의 잔치에서 확인해야 할 우리의 예복입니다.

삶은 축제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28주일 축제의 삶을 살기위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1.희망을 지니십시오. 하느님이 희망이십니다.
2.삶을 즐기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자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3.주님의 초대에 응하십시오. 주님은 언제나 당신 축제의 삶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 축제의 삶에
초대해주십니다. 미사은총이 우리 삶을 고해의 삶에서 축제의 삶으로
바꿔주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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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8주일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가끔씩 어릴 때 살던 집이 생각납니다. 담 뒤에 작은 개울이 있었고, 동네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고, 밭에는 옥수수, 깨가 심어져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배고프면 집에 가서 찬밥을 먹고 다시 놀았습니다. 동네 우물가에서 박카스 병을 줄에 매달아 물을 퍼 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그런 놀이와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제 발전과 아파트의 편리한 삶을 대가로 소중한 많은 것들을 상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요로운 삶도 좋고, 경제의 발전도 좋은데, 우리 사회는 우울증은 더 늘어나고, 이웃과의 따뜻한 정은 더욱 각박해져가는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공동체는 무엇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성령께서 참된 자유를 주시고 마음 깊이 있었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가족의 불화도, 갑자기 찾아온 병도, 이웃에게 느꼈던 서운한 감정도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감사를 드린다면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옷을 입고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함께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열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 잔치에 함께 하지 못합니까?

첫째,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은 이미 높은 분이 아닙니다. 자신만이 모든 것을 알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잔치에 초대를 받았어도 가지를 않습니다.

둘째, 독선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만이 초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초대를 받은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초대를 받았지만 가지 않습니다.

셋째,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아주 고약한 병입니다. 저도 예전에 이 병에 걸려서 상당히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잣대로, 사랑의 잣대로 보기 시작하면 이 병은 금세 치유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럼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기 위해서 그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다행스럽게도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해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능력과 힘은 결국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또한 어떠한 처지에 있다 해도 감사할 줄 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노력을 알아주시고 결국은 나를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신다는 절대적인 믿음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것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나눔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인내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용서의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감사의 옷을, 인내의 옷을, 나눔의 옷을, 사랑의 옷을 입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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