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11 07:47:39    조회 : 661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갈라 3,22-29

형제 여러분,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8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복음 루카 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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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잘 아는 이러한 우화가 생각납니다.

돼지가 길을 가다 암소를 만나 쌓인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살코기와 베이컨을 제공하고 심지어 내 발까지도 맛있는 먹을거리로 그들에게 내주는데 사람들은 왜 나보다 너를 좋아하는 걸까?”

그러자 암소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지요.

“이유가 있지. 너는 죽어서야 유익한 것을 제공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우유를 나눠주거든.”

이 세상에는 움켜쥐는 데에만 급급한 사람들도 있고, 또 반대로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언젠가 여건이 좋아지면 다른 사람을 위한 큰일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시고, 또 어떤 사람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더 멋지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바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세 가지 질문’에는 이러한 질문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대답은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는 ‘현재’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행하는 선행‘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사실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얼마나 행복할 지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행하는 사랑의 실천,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말은 성모님께서 불행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보다 더 행복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성모님께서는 더욱 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은, 단순히 과거의 일회적인 행동을 통해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에 매순간 행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만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에 답변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장 행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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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마법이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힘을 이미 갖고 있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할 힘이다(조앤 K.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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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청춘(용혜원, ‘지하철 사랑의 편지’ 중에서)

롱펠로우는 지금까지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롱펠로우는 하버드 대학에서 근대어를 가르치며 낭만적인 사랑의 시를 써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롱펠로우의 머리칼도 하얗게 세었지만 안색이나 피부는 젊은이처럼 싱그러웠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롱펠로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군. 그런데 자네는 여전히 젊군 그래. 자네가 이렇게 젊은 비결은 뭔가?"

이 말을 들은 롱펠로우는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를 보게나! 이제는 늙은 나무지. 그러나 저렇게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다네. 그것이 가능한 건 그래 봬도 저 나무가 매일 조금이라도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나이가 들었어도 매일매일 성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네!"

겉모습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 과연 ‘성형수술’에만 있을까요? 언제나 청춘이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면 겉모습 역시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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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27주간 토요일(루카11,27-28)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 11,27-28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가치를 외적환경에 두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는 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충북음성이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고달픔도 감당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 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끝까지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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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하느님 말씀 빼고 나면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 11,27-28

하느님 말씀 빼고 나면

크게 성공한 사람이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의 부모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얼마나 자식 교육을 잘 시켰으면...’ ‘자식이 저리 잘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명 설교를 듣고 있던 한 여자가 작은 소리도 아니고 큰 소리로 성모님을 극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복음 11장 27절)

성모님을 향한 여자의 극찬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은 의아스럽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호응하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어머니 저를 키우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저를 위해 큰 희생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꽤나 의외였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생뚱맞기도 하고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성모님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복음 11장 28절)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충실했던 분입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이것입니다. 성모님은 단지 자신의 어머니, 즉 혈육관계라는 것 때문에 훌륭하거나 행복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 인해 훌륭하고 행복하심을 강조하십니다.

성모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열 달 동안이나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른 세 해 동안 ‘말씀’ 곁에서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경청했고 관상했으며 그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충실성은 다음과 같은 응답에서 잘 드러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38절)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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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복음: 루카 11,27-28

<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

제가 일반대학 다닐 때 쯤 스카폴라를 착용하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갈색이었으니 가르멜산의 성모 스카폴라였던 것 같습니다. 스카폴라는 많은 종류가 있고 대부분 교회에서 인준을 받는 것입니다. 각 수도회에서 수도자들이 입는 작업복이 있었는데, 그 앞뒤를 가리는 작업복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조그맣게 상징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제가 착용했던 스카폴라는 갈멜의 것이었는데, 누구든 지옥에 가지 않고 연옥에 가서도 빨리 해방될 수 있다는 계시를 성 시몬 스톡크라는 분이 1251년에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만 착용하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을 잘 때 꼬이기도 하고 투명비닐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겨울엔 차가워서 싫었습니다. 그래도 지옥에 안 간다니 열심히 하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어느 날부터는 착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착용하고 다닌다고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삶이 그렇지 않은데 그것만 차고 다닌다고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차고 나쁜 일을 많이 하고 다니는데도 그것 하나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착용하고 다니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스카폴라는 그리스도를 입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되지 못하는 근본원인은 죄가 아닙니다. 죄 때문에 오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이 부끄러움이 두려움이 되고 그 두려움이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쫓아낸 것이 아니고 그 죄 때문에 두려워 숨는 것을 보고 죄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이 선악과 하나 따먹었다고 천국에서 쫓아내는 그런 무자비한 분은 아니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죄를 짓고 그 부끄러움을 자신의 힘으로 가려보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화과 나뭇잎입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바로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며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부끄러움이 나뭇잎이 아닌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죽으로만 덮여질 수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 상징적 행위로 첫 조상들에게 동물의 가죽으로 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미래 구원을 위한 예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죽음을 면하는 방법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피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집의 죄를 위해 죗값을 치렀다는 상징적인 표현이요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옷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두루마리를 빨아 깨끗하게 되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먹었던 행위는 그 집 안에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 있으니 감히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그분의 몸을 우리 안에 영합니다. 그러면 어떤 죽음의 천사도 우리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이는 누구든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우리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덮여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행위가 얼마나 많이 강조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소공동체는 그 본질적인 목적, 즉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 뵈옵고 그 체험을 나누는 친교의 정신은 잊혀지고, 본당에서 행사 때 동원되어 밥과 청소를 하는 등의 행동 위주의 모임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레지오도 기도 한 것을 활동으로 보고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과의 친교와 활동이 구분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타보다는 마리아를 지향하는 신자들이 되어야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들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일 잘 하는 식모가 아니라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오늘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이 아닌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라고 정의하며,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입어” 죄의 부끄러움이 덮여진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개신교에서 너무 믿음을 강조한다고 우리가 행위만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내가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께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 되기 위해서는 불을 붙이면 그만입니다. 그 도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이 받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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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분께서 알려주신 행복의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거짓 사랑이 아닌 참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루카11,27)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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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하신 분인가를 표현했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지극히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 질문일까요?
아니, 우리만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있었을 질문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싸움으로 역사는 진행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완벽하고 보편적인 답변을 찾지 못한 역사이고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행복의 조건에 대한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얻어낸 지금까지의 답들이 저마다 이유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야기도,

여인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한다고.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이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잘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일단 달콤하고 감각적으로 쾌감을 허락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의 조건,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일단 자기 십자가를 전제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때로는 자신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일단 그분의 말씀대로 살 수 있었을 때,

세상이 말하는 그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허락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삶의 구체적인 경험이 있어야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

진짜 행복이라면 허무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행복은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결론을 내려봅니다.
우리 자신이 좇고 있는 것들이 진정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들인가를 항상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0131012)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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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행복의 기초 -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갈라3,22-29 루카11,27-28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 11,27-28                                                                           

행복의 기초

행복의 기초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참 행복도 없습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시편16,2).

위 시편 고백은 믿는 이들에겐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셨던 5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는 참 행복했습니다.

"어, 이냐시오 형제가 어디에 있지? 미사해야 하는데."

귀국하여 이틀이나 잠깼을 때 제 방을 스페인 알베르게 방으로 착각하여 이냐시오 형제를 찾았고
제 방의 책상위에 미사를 준비하려 했다가 좀 지나서야 장충동 수도원의 제 방임을 알았습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50일간을 동고동락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제가 몸이 무거운 편이라 2층 침대를 쓸 때 저는 1층을 썼고,
몸이 가벼운 이냐시오 형제는 2층을 썼습니다.
2층 침대가 아닌 경우는 언제나 옆 침대에 이냐시오 형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게 기적이요, 순례중 가장 큰 성과입니다.

순례중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도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순례가 끝나는 50일차 이냐시오 형제 집에서의 미사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순례가 성공했음을, 서로가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유종의 미사였기 때문입니다.
늘 행복의 기초인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기에 성공적 순례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성모님이 행복한 것은 아드님 예수님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행복의 가능성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 역시 매일 미사와 시간경을 바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기분 따라, 감정 따라, 마음 따라 살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 따라, 하느님의 뜻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분은, 감정은, 마음은 수시로 변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뜻은 하나이기에 늘 내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에 맞추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했기에 성공적 순례였습니다.
순례중 여러번의 특이한 체험도 소개합니다.

한 밤중 강론을 다 완성하여 기뻐했는데 깨니 꿈이었습니다.
말씀과 하루 체험을 간절히 묵상하다보니 꿈중에 까지 강론을 썼던 것입니다.

이런 때는 실망감에 속된 말로 김이 새서 강론 쓰기가 좀 힘들었지만 힘껏 써냈고 참 행복했습니다.
이런 행복감이 순례중 샘솟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 믿는 모두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이미 부여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깨달은 사랑의 각자이자 성숙한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이런 진리의 깨달음입니다.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알 때 참 행복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고스란히 체험하는 행복한 미사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삼 하느님은 행복의 기초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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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 11,27-28
 
계절이 바뀔 때 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몸이 피곤하니 쉬라는 뜻입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약속을 줄이고, 며칠 쉬면 감기는 제 곁을 떠납니다. 이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지친 몸을 더욱 혹사했을 것이고, 몸은 더 나쁜 상황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감기에 약을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효과가 빠를 것입니다. 하지만 내 몸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적당히 쉬고, 기다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운전을 할 때 사람의 인격과 습관이 보이곤 합니다. 잠시도 못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깜빡이를 켜고, 빵빵 거리곤 합니다. 차선을 자주 바꾸고, 과속을 하고, 담배꽁초도 길가에 버리곤 합니다. 음주운전도 하고, 신호 위반도 하곤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자동차는 편안한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운전도 3단계로 구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준법운전입니다. 이렇게 운전을 해도 사람들은 존경합니다. 운전을 아주 안전하게 잘 한다고 합니다. 차선을 잘 지키고, 신호를 준수하고, 속도위반을 하지 않습니다. 제게 처음 운전을 가르쳐 주신 신부님은 늘 준법운전을 하셨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정해진 속도 이상으로 운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도착 시간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준법운전을 한다면 교통사고는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량의 흐름은 훨씬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운전을 하기 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합니다. 두 시간 운전을 하면 잠시 쉬면서 안정을 취합니다. 뒤에서 빠르게 쫓아오는 차가 있으면 옆으로 피해서 먼저 가도록 합니다. 커다란 트럭이 앞에 가면 추월을 하거나, 멀리 떨어져서 갑니다. 뒤에 오는 차들의 흐름과 앞의 차의 흐름을 함께 파악합니다. 차에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안전운전을 하는 분들의 차를 타면 마음도 편안해 집니다. 차 안이 아늑한 휴게소 같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짐을 들고 가는 분들이 있으면 가는 길까지 모셔다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를 타면 피정 강의를 듣기도 하고, 성가를 듣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차 안이 마치 피정의 집 같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10개월 머물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이런 분들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영원한 생명에로 가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욕심도, 원망도, 미움도, 두려움도 다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것과 복음을 따라 사는 것도 마치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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