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 청하여라.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09 06:44:21    조회 : 515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갈라 3,1-5

1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5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복음 루카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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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아닌 생각을 곧이곧대로 믿는 대서 모든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을 만났는데 그 형제님께서는 자신에게 모든 잘못된 일들이 닥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남들에게는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재수 없는 일들이 자신에게는 꼭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오히려 꼬이기만 할 때를 소위 ‘머피의 법칙’에 빠졌다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철을 타야 하는데 플랫폼에 도착할 때 지금 막 떠나는 전철을 보는 것, 마트 계산대에 서면 내가 선 줄의 계산이 가장 느린 것, 버스를 기다리다가 너무 안와서 늦을까봐 택시를 급하게 잡아서 탔더니 바로 뒤에 버스가 부우웅 하고 오는 경우, 목욕탕에 갈 때마다 정기 휴일일 때 등등.... 이런 경우를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이 형제님 자신이 늘 이런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 형제님은 자신에게만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고 하면서 불평불만을 던지십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책에서 유유상종의 법칙이라는 내용을 보게 되었지요. 즉,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들을 끌어당긴다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화를 많이 내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많이 찾아오며, 반대로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편안하고 기쁜 상황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부정적인 행동들을 따라오게 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의 부산물은 아닐까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상황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주님께 매달려야 하는지를 복음 말씀을 통해 전해 주십니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려서 원하는 빵을 꿀 수 있었던 사람의 비유를 전하면서, 주님께도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졸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 가득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까지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을 접고, 대신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께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내가 필요한 일들을 끌어당길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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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진실과 조금 밖에 빗나가지 않은 것이라도 후에는 천 배나 벌어지게 된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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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33의 법칙

부정적인 소식은 긍정적 소식보다 일곱 배 정도 빨리 퍼진다고 합니다. 이를 일본 경영 컨설턴트 간다 마사노라는 ‘3대 33의 법칙’이라고 말하면서, 긍정적인 소식이 세 명에게 전파되는데 반해 부정적인 소식은 33명에게 전달된다고 하더군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소문들은 얼마나 빨리 퍼집니까? 그에 반해서 좋은 소식은 그리 빨리 전달되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긍정적인 소식, 좋은 소식 역시 비록 3:33이라는 낮은 비율이어도 분명히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달해야 할 소식은 어떤 것일까요? 세상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답고 사랑 가득한 곳으로 만들려면 내가 전달해야 할 소식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인 소식, 좋은 소식, 행복한 소식만 전달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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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청하여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27주간 목요일(루카11,5-13)
 
2014년 가해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청하여라.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기억 하실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시합 응원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표현했고 그 희망이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2,4).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구한다 해서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주시는 것은 그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66장 18절을 보면 “나 나쁜 뜻을 품었더라면 주께서는 아니 들어주셨으리라”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없신 여긴 탓이다”(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하라!’ 하느님의 손길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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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같은 행위, 다른 본성

2014년 가해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복음: 루카 11,5-13

< 같은 행위, 다른 본성 >

 몇 년 전부터 술이나 고기를 먹거나 햇빛을 많이 쐬면 얼굴에 붉은 반점들이 돋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가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에 나갈 때는 얼굴이 희게 되는 선크림을 바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크림을 지우고 나면 그 붉게 올라온 것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어쩌면 위선이란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일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화장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화장은 자기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천연두 등의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도 했고, 서커스를 위해 우스운 화장을 하는가 하면 전쟁터에서 상대에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도 우리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려고 말과 행동에 화장을 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변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구원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다시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갈라티아인들에게 잘못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옛 계약(구약)이었고 이는 그리스도와 맺은 새로운 계약(신약)으로 파기되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의 희생 공로가 무의미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가 내준 보속을 하지 않았다고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의미 없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보속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죄가 용서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약간은 흥분된 듯 이렇게 말합니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바오로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닌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듯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란 바리사이처럼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여겨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구원은 무화과 잎이 아닌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죽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 일부 신학자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한 번 구원받으면 그만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고도 계속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주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이 말하는 행동은 진정으로 믿는다면 행동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야고보가 왜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가톨릭이 행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율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지녔느냐의 판단이 결국은 행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도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 행동이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알려면 열매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도 아니면서 겉으로만 그런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위선자요 율법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신앙 안에서도 이런 잘못된 사고가 많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즉, 봉사를 많이 한다면, 혹은 미사나 기도를 많이 한다면, 혹은 선행이나 자선을 많이 한다면 하느님께서 더 즐겨 보아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가장 많이 했던 이들이 바리사이들입니다. 착함이란 나의 존재가 변하여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했다고 보상이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의도로 했다면 이는 위선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는 자신들이 한 선행과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도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따지며 교만해 졌다가 하느님께로부터 큰 벌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받아들이면 자신도 모르게 선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신의 본질과 벗어나 위선적일 수 있고 반면 본질에서 나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맷돌질을 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지며, 같이 밭을 갈아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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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정신이 엔진 노릇을 해야
 
정신이 엔진 노릇을 해야

포기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니 끈기 있게 노력해야 결과를 얻겠지요.
다이어트, 몸매 만들기, 건강관리, 피부 관리 같은 육체에 관한 거나,
기술 예술 전공 등과 같은 것도 이 원리에 해당되는 몸의 조건입니다.

몸의 상태를 위해 정신이 엔진 노릇을 해야 그렇게 되는 인간조건입니다.
여기서 그 목표가 무엇 때문이며 왜 그래야 하는지의 이유가 중요합니다.
목적과 이유는 자기나 사회 국가 인류 나아가 하늘까지 득이 돼야 옳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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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진짜 사랑을 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부모의 기도가 있는 한, 자식은 반드시 제대로 섭니다.'

2014년 가해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루카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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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5일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으로 시노두스(SYNODUS)가 로마에서 19일까지 진행됩니다.
시노두스란 ‘함께 걸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회의 권위 하에 개최하는 ‘회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번 교황님 주최의 시노두스의 주제는 ‘가정이 직면한 복음화에 대한 도전들’이라고 합니다.
가정의 붕괴, 이혼, 자녀의 신앙교육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듯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끝자락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은 알거늘 ……”이라는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습니다.
누구든지 악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부모들에게 더욱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뱀을 생선이라고 착각하는 부모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불행하게도 그런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것을 채워주려 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이 너무도 노골적입니다.
세류에 휩쓸려 그저 남들한테 뒤쳐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독인지도 모르고 자녀들의 입에 넣어주려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말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지 늘 생각해야만 합니다.
특히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주려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가정답지 못한 가정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부모 중, 누가 없는 것을 결손가정이라고 하지만,

자녀가 얻어야만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가정을 결손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기도하는 모습이 자식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큰 답이 바로 기도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가르치십시오.
반드시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누구보다도 부모에게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짜 사랑을 하십시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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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가끔씩 신자 분들의 차를 탈 때가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함께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바칩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신자 분들도 좋아하십니다. 처음부터 차를 타면서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운전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일 년이면 30,000킬로를 달렸습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진 적도 있었습니다. 빙판길에 차가 한 바퀴 돈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 가는 길에 차를 잠시 세워 묵주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제 앞에 커다란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만약 제가 묵주를 꺼내지 않았다면 큰 사고 날뻔 했습니다. 그 뒤로는 차를 타면 언제나 짧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운전할 때도 몇 가지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차문을 열고, 의자를 조정하고, 룸 미러를 조절합니다. 시동을 걸고, 계기판을 살핍니다. 그리고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급하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초를 켜고,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미리 준비를 합니다. 머리 손질도 하고, 옷차림도 정돈하고, 약속 시간에 미리 가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입니다. 아무런 갈망이 없으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텔레비전은 채널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채널을 맞추어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도 약속 시간을 정해서 만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정해진 시간에 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지 않으면 기도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넷째, 매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숨을 쉬면서 살아갑니다. 5분만 숨을 쉬지 않아도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식사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매일 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영양실조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매일 나의 몸을 돌보듯이 매일 기도를 통하여 나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점을 이야기 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이는 또한 우리도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린 갈라티아인 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권위와 율법이 아닌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나의 힘과 능력을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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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제자리"에로의 귀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갈라3,1-5 루카11,5-1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제자리"에로의 귀환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영합니다. 고생하셨어요. -302호-"

장충동 수도원 숙소에 돌아왔을 때
게시판에 붙은 메모지가 마음의 불안을 불식시키고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의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가 아닌 여기 제자리의 내집임을 깨닫습니다.
돌아올 집이 있었기에 발걸음이 갈수록 가볍고 힘찰수 있었습니다.
어제 비행시간 12시간 내내 피곤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돌아올 제자리의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의 집에서 미사와 식사를 하면서 깨달은 것도
이런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집이 상징하는바,
평생순례후 죽음을 통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이었습니다.
인생 마지막 돌아갈 집, 아버자의 집이 없다면 그 인생 얼마나  쓸쓸하고 허무하겠는지요.

"내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는 주님 말씀처럼 이냐시오 형제나 저나 제자리의 집에 돌아오니 참 넉넉하고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제자리가 꽃자리입니다.
순례후 돌아온 제자리의 집은 예전의 제자리가 아닌 새로운 출발점의 제자리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끝났지만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사는' 제자리에서의 내적순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주신 제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예전 자작시 1연에서 처럼
다시 제자리에서 정주의 나무가 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정이나 기분이 아닌 순수한 믿음입니다.
정말 위대한 힘은 체력도, 정신력도 아닌 믿음의 힘, 신력입니다.
바로 복음에서 주님이 그 삶의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제자리 정주의 삶에서 기도의 원리, 믿음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늘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기도요 믿음입니다.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신자요 구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 아버지로부터 하사되는 참 좋은 선물, 성령입니다.

우리는 바오로의 말씀대로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항구한 믿음의 삶을 살 때 성령 충만한 삶이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제자리에서의 내적순례에 항구할 수 있는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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