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배은망덕하지 마라.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10-05 22:19:55    조회 : 704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이사 5,1-7

1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3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4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5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 6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가지치기도 못 하고 김매기도 못 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게 하리라. 또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7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제2독서 필리 4,6-9

형제 여러분,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9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복음 마태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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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피에타’를 보고는 그 자리를 한 동안 떠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큰 슬픔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거든요. 그냥 단순히 2,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 이라는 간단한 도식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의 아픔과 슬픔이 그대로 제 마음으로 크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조각한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때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그의 작품은 너무나 많습니다. 당대에도 천재라는 호칭을 들으면서, 대단한 걸작들을 많이 남겼지요. 그러나 그는 천재라기보다는 늘 최선을 다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끌로 흰 대리석을 조각하는 일이 제일 좋아. 죽으면 영원히 쉴 텐데...”

89세의 나이로 삶을 마치기 전 3일 전까지도 작품 손질을 했던 미켈란젤로가 휴식을 권하는 의사에게 말했던 말입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쉼 없이 작품을 만들었지요. 특히 수많은 하느님의 형상을 이 땅에 남기면서 사람들과 하느님의 간격을 가깝게 했습니다.

죽으면 영원히 쉴 것이라면서 최선을 다했던 그분의 열정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내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편하고 쉬운 것만 하려는 나, 순간적인 기쁨만을 가져다주는 것에 모든 것을 걸려고 했던 어리석은 나는 아니었을까요? 또한 항상 내가 기준이 되면서 너무 많은 것을 얻지 못했다며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던졌던 것은 아닐까요? 나의 일이 우선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일이 우선이었습니까?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못된 소작인들은 주인이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낸 종을 붙잡아 매질하고 죽이지요. 더 많은 종을 보내도 소작인들은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자기 아들은 존중해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이 아들만 없애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파견된 소작인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에게 풍요로운 세상을 주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잘 가꿔서 많은 소출을 내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항상 기준이었습니다. 나만 불공평한 처지에 있는 것 같고, 나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고, 나만 행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보다는, 그 뜻을 내 안에서 없어지게 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아들을 없애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지요.

나의 기준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던 미켈란젤로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일을 위해 단 하루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먼 훗날, 주님 앞에 떳떳한 마음으로 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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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당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다른 방법으로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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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 거기까지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아서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서, 요즘 사람들의 문제점을 찾게 됩니다. 즉, 요즘 사람들의 문제점은 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꿈이 작은 것이 아닐까요? 그의 말처럼 목표를 너무 낮게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표를 100미터로 잡았는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80미터까지밖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목표를 10미터로 잡고 대충해서 10미터에 도달했습니다. 후자의 사람만이 목표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누가 더 성공에 가까이에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느님 나라라는 엄청나게 큰 꿈이 있습니다. 이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큰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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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배은망덕하지 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27주일 (마태21,33-43 : 필리4,6-9)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 21,33-43

배은망덕하지 마라.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요한 15,9). 그래서 하느님은 미리미리 사랑의 질타를 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키워 주시길 바랍니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겨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의 노고와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산등성이에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한가운데 탑을 만들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 만들어 놓고 포도가 송이송이 맺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이사5,1-2).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들포도가 열렸습니다(이사5,4). 온갖 정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허물어 망그러진 채 내버려 두게 됩니다. 순을 치지도 않고 김도 매지 않고 황폐하게 두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인 채로 두게 됩니다(이사5,5-6).

이사야 예언자는 이 비유말씀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고와 땀이 함께하는 만큼 좋은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만큼 사랑을 열매 맺지 않는 다면 그 자체가 황폐한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지만 그 사랑을 배신하는 악한 결실을 맺은 것을 안쓰러워하시는 사랑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복음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훌륭하게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추수철이 되어 그 도조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작인들이 간이 부었는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그 포도밭을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마태21,33-38).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소작인들은 욕심으로 화를 자초하여 죽고 새로운 소작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레미아 31,3에서는 “나는 한결 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5,8). 그리고 마침내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에페2,4).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에 인색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21,43). 결국은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음에 이르고, 소출을 내는 사람, 다시 말하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 한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에 새겨라’ 했거늘 우리는 거꾸로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필리4,6-7)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시편 50,14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에페5,20).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할 수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 드려야 합니다”(성 필립보네리).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실루스).“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필리4,9).

감사를 드린 인물을 몇 명 보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바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마음은 주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1사무2,1).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모시고 번제와 친교제를 바친다음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아삽과 그의 일족을 시켜 감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역대기 상16,7).

사도들도 예수께서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가24,51-53).

예수님도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요한11,41).

이제는 우리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숨쉬고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공짜로 숨을 쉬고 있으니 많은 빚을 진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도 은총입니다.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로움인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을 감사합시다.

잔소리 많은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답니다. ‘여보, 나 부탁이 있는데 당신 벙어리가 될 수 없겠소?’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어요. ‘나도 부탁이 있어요. 당신 귀머거리가 돼 줘요.’ 벙어리가 되어달라는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달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하고요. 아내나 남편이 계시지 않는 분은 그런 저런 부탁 받을 일 없어서 감사하고요. 자식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어 감사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있어서 감사하고요. 무자식이 상팔자라 감사하고….아픔을 느끼게 만든 자식이 있어서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나를 철들게 하니 감사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맙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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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를 버린 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복음: 마태오 21,33-43
 
< "주를 버린 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

우리나라 정식 첫 세례자는 1784년 북경 사신으로 갔다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주교와 사제직을 맡아가며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 보고 배우고 온 것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해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의 신앙을 전파했던 한국 초대교회 창설자들은 몇몇 유생의 고발로 사형과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북경주교의 명령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대놓고 제사를 거부하여 1791년 그들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은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이 돼서야 겨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여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집을 옮겨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는데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발각되면 그를 모시던 회장들이 사제복장을 하고 관아에 끌려가 대신 순교를 함으로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3명의 회장들이 순교를 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강완숙 골롬바가 6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주 신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강완숙 골롬바까지 잡혀가 문초를 당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만 없어지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혀가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이 생명을 부지하여 천주교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날 밤, 주 신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양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와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내가 주문모 신부요!’하고 자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때가 1801년 4월 19일이니 주문모 신부는 약 6년간 조선교회를 위해 일하셨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순교자가 됩니다. 그 후 33년 동안 사제가 없는 암흑의 신앙생활을 하고 모진 박해가 있었음에도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조: 김길수 강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저는 지금 한국교회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써 순교자들의 삶에 비해 저의 삶을 비추어보며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 결혼도 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의 행복도 알고 허무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에서 편하게(?) 사목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이 그의 발이 떨어지지 않게 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모진 고문과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맡겼는데 소작인들은 그것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도조를 받으러 온 하인들뿐 아니라 주인의 외아들까지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떻게 돌아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고 세상 것을 추구하느라고 하느님을 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도조, 즉 십일조도 내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 주인의 아드님이 우리 안에 말씀과 성체로 들어오셨다가 우리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 밑에서 그리스도의 뜻은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가 바로 ‘하늘나라의 행복’과 연결됨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면 결국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문모 신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순교의 길을 택했던 것은 이 세상이 싫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 즉, 하느님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적인 행복이 아닌 마음의 평화를 선택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압록강을 건너서 평생 불편한 마음으로 사느니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편한 마음으로 죽겠다는 것이 순교의 정신입니다. 순교의 목적도 결국엔 행복에 있었던 것입니다.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 중에 많은 지식층들은 천주교를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지고 있던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민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킵니다. 서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은 쉽게 뽑히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우리나라 가톨릭도 건강한 모습으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유층이 훨씬 많이 성당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서민 중 이도기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던 이도기는 서울로 올라와 김범우 등을 만나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기쁨의 삶을 삽니다.

대놓고 신앙생활을 하고 교리를 전파하니 곧 잡혀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논어 맹자를 뛰어넘는 지식으로 반박하니 그의 예지에 심문하던 공주부윤이 이도기를 놓아줄 방법을 찾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밤에 감옥 문을 열어놓고 도망치면 “죄수가 도망쳤습니다. 곧 잡겠습니다”라고 보고하고는 안 잡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런 명령을 받은 포졸들은 문을 열어놓고 도망치기를 바라며 슬쩍 자리를 피합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보니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문을 아예 활짝 열어놓고 다른 곳으로 갔다 오니 여전히 목석처럼 앉아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이 새고 포졸들은 “아이고 이 답답한 친구야, 당신이 천주교를 믿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려면 눈치가 있어야지. 그러다가 매 맞아 죽기 알맞소”하며 안타까워합니다.

“내가 매맞아 죽을지 병들어 죽을지 굶어 죽을지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요. 내가 어떻게 죽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내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그렇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 뜻을 따를 때 솟아오르는 양심의 기쁨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포기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옥중생활은 너무나도 혹독하여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입을 옷과 음식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이도기에게는 부인이 매번 그런 수발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이도기가 부인을 불러서 말합니다.

“부인, 나 때문에 번거로움이 많소. 이제 괘념 말고 면회 오지 마시오.”

부인은 매우 난감합니다. 춥고 배고픔에 죽어가는 남편을 보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살짝 와서 옷과 음식을 넣어놓고 갑니다. 어느 날 다시 이도기가 아내를 부릅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옷자락을 들쳐 상처를 보여줍니다. 먼저 맞은 상처는 썩어가고 새로 생긴 상처는 피가 흐르는데 뼈가 으깨어져서 그 살갗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부인 보시오. 나도 사람인데 이 상처가 어찌 아프지 않겠소.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은 고통을 잊을 수 있소. 그런데 부인이 오시면 나 또한 어찌 사랑하는 내 아내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당신을 바라보면 아내를 보는 기쁨은 누리지만 이 상처의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으니 면회 오지 마시오.”

부인이 비로소 남편의 의도를 깨닫고 음식과 옷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한 달이 지난 뒤 포졸이 부인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부인이 슬피 우니 포졸이 부인을 위로하는 말을 합니다.

“부인,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 남편이 죽던 그 밤에 찬란한 빛이 당신 남편의 시신에 어리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참조: 하늘로 가는 나그네]  

영국의 격언 중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주를 버린 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그렇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세상을 버리던가, 아니면 세상을 얻으려 마음의 평화를 버리던 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마음의 평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임을 믿는다면, 마음의 평화를 잃는 것이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고 결국 세상 모든 것까지 잃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도기는 아내의 애정과 세상의 배부름과 따뜻함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자기 마음의 평화만을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내 또한 자신의 삶을 따라 순교의 길을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순교는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순교는 양심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만약 양심의 평화를 잃는다면 불안한 마음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이 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은 끊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두 행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만약 양심의 평화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순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교의 피는 또한 주위를 깨끗하게 하여 더 많은 이가 구원의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이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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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로에게 봉사자 처럼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 21,33-43

서로에게 봉사자 처럼

국회의원직은 봉사직 이건만 왕직 처럼 행세하면 부자격자 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자녀들이 서로에게 봉사자 처럼 산다면 화목할 겁니다.
지위가 오를수록 겸손하지 못하면 미움을 사고 외면당해 마땅합니다.

존경심도 고마움에서 우러나와야지 명령과 복종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조차 모르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해지면 그 직책을 벗어야 합니다.
소작인이 주인행세하면 주인은 소작인을 바꾼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오 21,4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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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 인생은 주님의 것[단상]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1-7

제2독서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6-9

복음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

연중 제27주일(2014년 10월 5일) 내 인생은 주님의 것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 바람에 맑은 햇살이 흩날리는 주일 아침입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우리 삶을 돌아보게 되지요.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내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음을 문뜩 생각합니다. 이런 노래가 있지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이건 노래일 뿐입니다. 나의 것이라고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결국 인생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물로 받은 것이지요. 생명을 주신 분께 고스란히 돌려드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자신들 소유라고 여깁니다. 소작인은 소작인일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니지요. 이들은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그것도 포도원 밖으로 끌고가서 죽여버립니다. 탐욕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악한 소작인들을 모두 처단해 버립니다. 결국 탐욕의 악이 자신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늘 경계심을 잃지 말아야 하겠지요. 우리 인생도 하느님의 것임을 늘 자각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사람이 됩니다. 인생에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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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삶의 이정표 -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순례47일차-군인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순례47일차-군인주일),
이사5,1-7 필리피4,6-9 마태21,33-43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 21,33-43                                                        

삶의 이정표

오늘은 순례47일차입니다.
이제 순례는 끝났지만 귀국하는 날까지 순례 차원에서 쓸 것입니다.

어제 순례46일차, 제 영명축일날은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에는 우리집민박 가까이 있는 산티아고 재래시장을,
오후에는 산티아고 대성당 주변의 기념품 가게를 이냐시오 형제와 순례했습니다.

나라와 말, 인종만 다르지 사는 모습은 똑같았습니다.
활기에 넘친 열기로 가득한 재래시장을 돌면서 사람들의 온갖 표정을 관찰했습니다.
모두가 본업에 충실한 평범한 삶이었고,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한 시장이었습니다.

새삼 '사는 것은 먹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정말 먹는 재미가 없으면 삶은 참 팍팍할 것입니다.

이어 저녁에는 '우리집민박'에서 사장과 함께 머물던 두 형제(김종만, 박해덕요한)와 이냐시오 도반이
삼겹살 파티에 케익을 마련해 제 영명축일을 축하해 줬습니다.
그대로 축제분위기 였습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거룩한 곳이 '이상'이라면
먹을 것 가득하고 사람 북적이는 시장은 생생한 '현실'입니다.
성속일여, 성과 속이, 이상과 현실이 하나의 보완관계에 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산티아고 대성당이나 재래시장이나 모두 거룩한 땅,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순례초기 프랑스 몽쉘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적인 모습도 떠오릅니다.
섬 전체가 수도원이었고 사람 북적이는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을 지나 위로 올라갔을 때
성당에서는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상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 같습니다."

이상과 현실이 하나의 보완관계에 있음을 지적한 말에 김승월 형제도 공감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듯이 생업에 충실한 거룩하고 순수한 모습들을 충분히 관찰한 재래시장 순례였습니다.
오후에는 기념품 가게에 가서 소량의 부족한 선물을 구입했습니다.
전 번 언급했던, 조개무늬 형상에 화살표가 선명한 인조석 이정표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이정표는 생명과 같습니다.
이정표를 놓쳐 길을 잃어버리면 졸지에 미아가 되어 버려 방황입니다.
이정표 방향 따라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안정과 평화요,
이정표를 잃어버렸을 때는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그대로 평생 하느님을 찾아가는 삶의 순례여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삶의 이정표를 상징하는 인조석 이정표보다 더 좋은 선물을 찾을 수 없었고
제 취지에 공감한 이냐시오 형제도 여러개의 인조석 이정표를 샀습니다.

하여 오늘 강론의 주제는 '삶의 이정표'입니다.

재래시장에서 생업의 일에 몰두하던 사람들,
과연 삶의 이정표는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리지 않기위해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입니다.
일만 있고 기도가 없으면, 먹는 일만 있고 하느님 찾는 일이 없으면 곧장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립니다.

삶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의 궁극 목적지는 하느님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이정표를, 하느님을 잊고 지내는지요.
하여 삶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았는데, 걸어가거나 달려갔는데 하느님 방향없이, 목표없이 그렇게 살았다면
그 인생 얼마나 황당하겠는지요.

삶의 이정표를 매일 매순간 확인하기 위해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순례중 매일 미사와 시간경을 바쳤습니다.
삶의 이정표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복음의 포도원 소작인들의 만행은
삶의 이정표에 이어 포도원 주인이 상징하는 하느님을 잊은 업보입니다.
삶의 이정표를 잊어버렸을 때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이 삶의 이정표가 인간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1독서 이사야서 내용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 친구의 탄식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탄식을 듣습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사필귀정, 삶의 이정표를 잊은 결과입니다.
마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과연 들포도가 아닌 '공정과 정의'의 좋은 포도를 맺은 순례여정의 삶인지 묻습니다.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적절한 삶의 이정표가 되는 말씀을 제시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또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 친히 삶의 이정표가 되어 주십니다.
사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삶의 이정표도 없습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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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2014년 가해 10월5일 연중 제27주일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 21,33-43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포도밭’입니다. 구약 성서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포도밭은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니 우리들 각자가 주님께서 가꾸시는 포도밭입니다.

오늘은 군인주일이기도합니다. 저도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군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86년 10월 저희 부대는 안양의 몰악산으로 유격훈련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졸병이라서 선임들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격장의 담을 넘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격장의 담은 안양 교도소의 담과 연결된 담 이였습니다. 저는 자칫 잘못했으면 교도소의 담을 넘어 들어간 최초의 군인이 될 뻔했습니다. 다행히 교도소의 담이 조금 높았고,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에 교도소의 담을 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순간 이였습니다.” 사다리는 무조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목적지가 틀린 배는 아무리 노를 저어도 결국 잘못된 곳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또 하나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근무한 곳은 성당이었습니다. 어느 여름 날 부대에서 잔디밭에 뿌릴 비료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골고루 비료를 뿌리다가 나중에는 ‘꾀’가 났습니다. 날씨도 덥고, 별일 없을 것 같아서 비료를 듬뿍 듬뿍 뿌렸습니다. 일은 쉽게 끝났고, 저는 느긋하게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지나면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비료를 골고루 뿌려준 잔디는 잘 자라는데 한꺼번에 듬뿍 뿌려준 잔디는 영양과다로 타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일을 통해서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지금 당장 편하려고 편법을 쓸 때, 그 결과는 반드시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 우리들의 본당,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주님의 포도밭입니다. 주님의 포도밭에는 때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분열의 씨가, 두려움의 씨가, 갈등과 걱정의 씨가 들어오곤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고난도, 아픔도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주신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제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눈에, 젊은이들의 눈에, 어른들의 눈에, 할머니 할아버님들의 눈에 주님의 종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미사 및 성사를 거룩하게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자주 찾아가며, 특히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사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본당의 재정을 잘 관리해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곳에 예산이 쓰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교구 성소국에 있습니다. 성소 후원회의 모임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매월 후원회 미사를 함께 합니다.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매월 있는 예비 신학생 모임이 잘 되도록 함께 하려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권위주의와 독선이 자라나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 안에 불신과 다툼, 시기와 질투가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나쁜 것들이고, 하느님께서 가슴아파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예비 신학생들과 성소 후원회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복음화학교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과 일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웃과 친구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공로와 우리들의 업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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