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1일 훈련이 순교를 만든다.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09-21 15:21:42    조회 : 735회    댓글: 0

◈ [인천] 2014년 가해 9월21일 주일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제2독서 로마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 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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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치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는 역사에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생지옥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지요. 이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가장 비참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사람들의 선택은 자포자기 또는 저항해서 매 맞아 죽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수용소의 오물이 가득한 탁한 물에라도 매일 세수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배급 커피를 다 마시지 않고 남겨서 그 물로 얼굴을 닦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바로 이런 이들이 살아남았답니다. 위생상의 이유로 씻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처절한 투쟁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했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타협하거나 체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 특히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우리 순교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음 그 자체만으로 박해를 당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피하지 않지요. 그럴수록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했고, 더욱 더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하셨을까요? 유한한 세상에서 주는 기쁨보다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름이 곧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 덕분에 우리들은 죽음의 위협 없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타협하는 우리들의 모습,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모습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우리의 순교자들처럼 순교를 선택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편하고 쉬운 신앙생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우리들의 안일한 모습에서 계속해서 배교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어쩌면 고된 삶을 통해서 순교와 같은 신앙을 전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순교는 일상의 삶, 특히 어렵고 힘든 삶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전하는데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순교자들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내 자신은 일상의 삶 안에서 과연 순교자의 삶을 따르고 있는지를 묵상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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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한마디에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의 한마디로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한마디를 버팀목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한마디 한마디에 사랑을(다카하시 아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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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물러나면(‘좋은생각’ 중에서)

중국 송대에 상서(장관)를 지낸 양분이 책을 읽는데 조카들이 뛰어와 말했다.

“숙부님, 심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옆집 사람들이 새 담장을 세웠는데 석자나 되는 우리 땅을 자기 집 마당으로 끌어들였지 뭡니까?”

그 말을 듣던 양분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자. 옆집에서 땅을 침범하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별 영향이 없어도 경우가 아니잖아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양분은 후후 웃으며 창밖의 낙엽을 가리켰다.

“가을이 되니 원래 가지에 속했던 잎이 땅으로 떨어지는구나. 저렇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나뭇가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조카들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자 양분이 말했다.

“우리 모두 머지않아 저 낙엽처럼 떠날 운명이니 한 조각 땅을 두고 싸우는 일이 무어 그리 중요하느냐.”

그제야 조카들은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좁은 마음에 이웃과 소송이라도 벌일 생각이었어요.”

조카들이 건넨 소장을 본 양분이 조용히 타일렀다.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였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 줄 아느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 발 물러나는 것이다. 내가 딱 한 발만 물러나도 사람들과 날을 세울 일은 없어진다. 그게 세상살이의 이치인 것이야.”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해관계를 잘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어쩌면 그런 삶이 또다른 현대의 순교자 모습은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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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순교자의 삶을 기억하며|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순교자의 삶을 기억하며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는 신유, 기해, 병오, 병인등 백 여년 동안 4대 박해를 통해 만 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순교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라는 말은 신앙과 믿음을 증거하기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습니다.”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혜서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지혜3,1-9)라고 적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세상은 어리석게 보았지만 주님 눈에 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곧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 신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이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화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 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39).

그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응송 시편 126장에서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 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하고 노래합니다. 지금 받는 수고와 땀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역경,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수가 늘어갔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제 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기도서나 묵주, 신심서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은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그런데 주님 체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은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없는 탓입니다. 복음에서 보듯“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만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나의 취향과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크신 예수님에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로 바오로 사도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5-8)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자기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익숙해져 왔는데 그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했으며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3,9).

현대의 순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명한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밉거들랑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은 안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순교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 마더 데레사 -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괘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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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훈련이 순교를 만든다

2014년 가해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복음: 루카 9,23-26

< 훈련이 순교를 만든다 >

이성례 마리아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이시고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시복된 124위 중 한 분입니다.

대부분의 초대 한국 교회 신자들이 그랬듯이 이성례 마리아도 박해를 피해 자주 이사를 해야만 했고 그것으로 인해 밥을 굶어야 하는 등의 궁핍한 생활을 견뎌야했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리시던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자녀들의 신심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수리산에서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함께 체포되게 되었는데 그녀는 포졸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다음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한 살밖에 안 된 아들과 함께 격리수용 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젖이 나오지 않고 먹일 것도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최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며 마음이 흔들려 마리아는 배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것이 발각돼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주위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어 순교의 열정을 다시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재판관 앞에서 자신이 배교했던 것을 취소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감옥을 오가며 마리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마음이 약해질 것을 걱정해 둘째에게 형장에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지막 당부를 하였습니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참수형을 받을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39세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참조: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 이성례 마리아]

시복되신 순교자들의 삶을 보다보니 의외로 배교했다가 뉘우치고 다시 용기를 내어 순교의 월계관을 쓰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겪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분들도 쓰러졌다 일어났다 하며 믿음을 지켜나갔다는 것을 볼 때면 나의 약한 믿음에 비추어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반면 처음부터 전혀 배교의 마음 없이 엄청난 고문을 참아내고 순교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자 이일언 욥은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모진 고통을 당했지만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며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욥이 처형장소로 갈 때 자녀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도 훌륭한 교우가 돼라.”

그러나 저는 배교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순교의 길로 가는 분들을 보면서, 배교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이들이 처음부터 강한 믿음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훈련된’ 분들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배교했던 분들은 아직 조금 덜 훈련이 되었던 것이고, 배교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미 완전하게 훈련되어 싸움에서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된 분들인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훈련되는 것입니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말콤 글래드웰은 ‘일만 시간의 법칙’은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적 수준의 전문가 즉 마스터가 되려면 일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며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스케이트 선수, 피아니스트, 체스선수, 숙달된 범죄자, 그 밖의 어떤 분야에서든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이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일만 시간은 대략 하루에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어느 분야에서든 이보다 적은 시간을 연습해 세계 수준의 전문가가 탄생한 경우는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아주 특이한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결국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많은 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일만 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서 어린 나이에도 천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순교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프로 중에 프로만이 할 수 있는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분들이 순교의 천재였다고 보기 보다는 평상시 엄청나고 꾸준한 노력을 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들은 교리공부와 성사생활을 하고 두려움과 가난과 싸우며 자신들을 단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은 어떤 훈련을 했을까요? 모든 훈련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한 율법학교 학생이 스승에게 와서 스스로 랍비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스승은 “그 자격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저는 제 몸을 단련해서 맨 땅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고, 들판의 풀을 먹을 수 있으며, 날마다 채찍으로 세 번씩 제 몸을 때리며 훈련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귀를 보아라. 저 나귀는 맨땅 위에서 자며, 들판의 풀을 먹고, 날마다 세 번 이상 채찍으로 맞는다. 지금까지 너는 나귀가 될 자격을 갖춘 것이지 랍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훈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훈련시키시는 과정을 한 번 보십시오. 베드로는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물속에 빠지기도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에서 배를 구해보려고도 했으며 또한 목숨을 걸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라도 이렇게 쓰러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라면 두려워 할 것이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의 앞에 다가올 십자가 형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못 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갖는 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시키셨던 훈련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연습을 시키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칼을 받으면서도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는 믿음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순교자들을 본받고 싶거든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은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바로 ‘마음의 평화를 세상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돈이나 가족이나 생명을 잃는다고 마음의 평화가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불안해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 뿐입니다. 우리 또한 굳건한 믿음으로 죽음 앞에서도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도록 매일 매일의 훈련을 해 나가도록 합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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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진리위해 목숨 잃으면 하늘은 영생보장을
 
2014년 가해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진리위해 목숨 잃으면 하늘은 영생보장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들을 위한 국군묘지는 참 중요한 곳입니다.
오늘이 이렇게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분들이 목숨을 잃어간 덕분입니다.
오늘도 이 나라는 이분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그 정신을 찬양해야 됩니다.

전쟁과 군생활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잃었으니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도 열사들도 영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계명 진리를 위해 목숨을 잃으면 하늘은 영생보장을 당연히 하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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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참된 공평’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가 주장하는 옳음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항상 생각해야만 합니다.'

2014년 가해 9월21일 연중 제 25주일 복음묵상

“품삯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오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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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어울리는 태도를 보인 것은 밭주인이 아니라,

아침부터 일을 하고서도 일 끝나갈 무렵에 나타난 이들과 똑 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도 밭주인에게 불공평을 호소하고 있는 일꾼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조하기 쉽습니다.
일한 만큼 그 수고에 합당한 몫을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고 정의라고 우리는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욕심과 공평을 쉽게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착각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의 논리를 넘어서는 섬세함으로 우리 생각의 허술함을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가장 큰 메시지는 ‘참된 공평’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나 공평에는 반드시 그 바탕에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저 잣대나 저울질로 가릴 수 없는 것이 공평이고 정의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비유에 밭주인은 다섯 시쯤에도 일꾼들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을 보도록 합시다.

첫째, 밭주인이 장터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이들에게 물어봅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그러자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진정 공평한 사회라면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공평함을 느끼게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사연으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기껏해야 동정 어린 시선으로,

아니면 멸시와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밭주인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일을 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환경적 배경, 개인적 능력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를 가지고 같은 조건에서 살아남는 것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짐승들의 세계, 즉 약육강식의 세계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공평을 이야기 하는 모순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유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겼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른바 배려와 나눔이라는 마음이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공평이나 정의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울 때 사용하는 단어들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둘째, 밭주인은 사실 일꾼이 필요 없었습니다. 충분히 일꾼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날도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기까지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바로 밭주인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임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세상의 죄로 인해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진정 공평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어느 누구도 대상에서 소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 때, 그 말은 힘을 갖게 됩니다.
공평이나 정의라는 말은 결코 이기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억울하다는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했던 사람들 역시 같은 감정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들의 억울함은 사실 자신들의 욕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욕심을 공평이나 정의라는 말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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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무혈순교[단상]
 
2014년 가해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대축일 경축이동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2014년 9월 20일) 무혈 순교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이 길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민과 혼란을 동반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 없고, 예수님 없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그

래서 성당의 십자가는 반드시 예수님 형상이 있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참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103위 한국 순교자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을 참으로 깨달은 분들입니다.

진정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주님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주님의 형상으로도 변모합니다. 일상 삶에서 크고 작은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질 때 우리는 나날이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늘의 순교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신앙 선조들은 피흘리는 순교를 했지만, 오늘의 우리는 피흘리지 않는 순교를 합니다. 순교 성인들이 우리 기억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듯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의 마음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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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믿음의 용사들 - 2014.9.21 일요일(순례33일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9월21일 일요일(순례33일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지혜3,1-9 로마8,31ㄴ-39 루카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믿음의 용사들

오늘은 산티야고 순례33일차 날이자 한국순교자대축일입니다.
원래는 어제가 대축일이지만 주일로 이동해 경축합니다.

어제 순례32일차는 순례여정중 가장 힘들었습니다.

피레네산맥을 넘을때보다, 엊그제 고산지역을 걸을 때보다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이냐시오 형제는 자켓을 입고 저는 바람막이를 입었지만
가파른 자갈길 산을 오를 때는 땀이 비오듯했습니다.

빌리프랑카에서 오 세블에이오까지28.4km를 6:30분에 출발하여 오후 1시에 도착했고
이중 3시간 정도는 끝없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산길이었습니다.
좌우간 계속 묵주기도 바치며 우직하게 걸었습니다.

순교자 성월, 내일의 한국순교자대축일을 앞두고 하느님 마련해 주신 선물로 믿고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후 1시, 해발 1296m의 정상에 있는 오 세블에이오, 알베르게에 도착했습니다.
흡사 묵주기도중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를 통과해 영광의 신비에 도달한듯
산꼭대기 사방 전망이 확트인 알베르게였습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그대로의 감격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늘 가까이 있는 순례자 숙소는 처음입니다.
며칠간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완전히 개어 햇볕 따가왔지만 늦가을의 쌀쌀해진 기온은 여전했습니다.

이제 산티야고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혼자 순례길이 아니라 무수한 도반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산티야고 순례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 말씀입니다.
순교자 성월, 산티야고 순례길에 그대로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미사도구가 들어있는 12kg정도의 제 십자가, 배낭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어떻게 해야 성공적으로 십자가 순례길을 마칠 수 있을까요?

사랑입니다. 주님 향한 간절한 사랑이 가장 큰 힘입니다.

오늘 2독서, 바오로의 우리 향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샘솟는 사랑입니다.
늘 읽을 때 마다 새힘이 솟는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백절불굴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사랑에서 샘솟는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간절한 사랑입니다.
자발적으로 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기꺼이, 자발적으로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대로 산티야고 순례길은 물론 평생순례여정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날마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보천리,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사람이 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막연히 목표없이, 방향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이시자 목자이시자 도반이신 주님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이런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의인들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이런 내면의 깊이에서 샘솟는 힘입니다.

다음 우리를 격려하는 잠언의 말씀이 큰 위안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니,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시어,
믿음의 용사들인 우리 모두, 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6).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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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2014년 가해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오늘은 한국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아내셨던 순교자들입니다. 신앙 때문에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입니다. 우리교회는 바로 이런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특별히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예수님 앞에, 허기진 예수님 앞에 사탄은 달콤한 유혹을 내 놓았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께서 빵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니 높은 데서 뛰어 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하느님과의 거래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과 거래가 아닙니다. 신앙은 온전하게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보여주면서 사탄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시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재물의 유혹 앞에, 권세의 유혹 앞에 무릎을 끊게 됩니다. 사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사탄에게 찾아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바로 어두운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는 신앙의 별들입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이역만리 머나먼 땅으로 유학을 떠난 김대건 신부님,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 추운 겨울에 북경을 9번이나 왕복한 정 하상 바오로, 그밖에 이름 모를 많은 순교자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에 쌓인 우리 교회에 희망을 주었고 빛을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는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나의 욕심이, 나의 게으름이, 나의 자존심이, 나의 이기심이, 나의 교만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순교자들이 보시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너무 쉽게 보이곤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야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재산과 가족,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나눔, 우리의 사랑과 희생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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