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7일 말과 모범으로 충고를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09-07 20:23:38    조회 : 784회    댓글: 0

◈ [인천] 2014년 9월 7일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에제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제2독서 로마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복음 마태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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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다가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글쎄 어떤 자매님께서 언성을 높이면서 다른 자매님을 공격하는 것이었지요. 들어보니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인해 자신의 체면에 큰 상처를 받았다면서, 가톨릭 신자면서 그럴 수 있느냐는 말씀까지 하면서 자신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처음 뵐 때부터 조금 독특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하시니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저뿐만 아니라 함께 했던 모든 분들이 이 자매님을 슬슬 피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옳을 수 있습니다. 즉, 정의로운 모습이고, 이치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의와 이치에 맞음을 큰 소리로 주장함에 따라 피해를 본 것은 누구였을까요? 자신이 생각했던 정의롭지 못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의와 이치를 따졌던 나의 과격한 행동이 자기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고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와 심판을 내세우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맨 앞자리에 놓으셨던 것은 사랑이었고 또 용서였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심판을 내세워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고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뜻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정의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함부로 외치고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이 세상을 주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배제된 상태에서 정의와 이치를 따지고 들면 더욱 더 힘들어 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정의와 이치를 따지며 사는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빠진 상태에서 외치는 정의와 이치는 결국 주님이 아닌 자기만을 내세우는 오만과 이기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죄의 용서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의 우리 행동 하나 하나가 중요함을 이렇게 이야기하시지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소홀히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남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가 많습니다. 혹시라도 다툼이 생길까봐, 또 복잡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이지요. 이런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 주님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라면서 주님의 길로 이끌어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웃이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이 먼저 좋은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2독서에서 이야기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내 몸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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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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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

두 나그네가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여행을 한 탓에 몹시 지치고 배가 고파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마을에 다다라 어느 집 대문을 힘껏 두드렸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밀자 문이 그대로 열렸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 하나가 천장 높이 매달려 있었다.

'저 과일을 꺼내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한 나그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너무 높이 매달려 있어 내릴 수가 없어. 빨리 다른 집으로 가는 게 좋겠어."

그는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부엌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다른 한 나그네는 바구니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난 저 과일을 꼭 꺼내 먹을 거야. 아무리 높이 매달려 있어도 누군가가 저기에다 걸어놓은 거야. 그렇다면 꺼낼 수도 있는 거야."

그는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고, 곧 헛간에서 사다리를 찾아 부엌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 높이 매달린 바구니 속 과일을 꺼내 먹었다.

위의 글은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탈무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나그네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쉽고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인지가 대조되고 있지요. 당연히 후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하나 필요한 것은 나만의 사다리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나만의 사다리를 찾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고통과 시련도 나의 걸림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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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말과 모범으로 충고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7일 연중23주일
(마태18,15-20 : 로마13,8-10 : 에제33,7-9)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말과 모범으로 충고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한없는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강론 시작에 앞서 항상 ‘사랑합니다’하고 말문을 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입니다. 가끔은‘하늘만큼’, ‘땅만큼’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하며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똑같은 사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에게! 이것밖에 안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것에 젖어있으니까 좋은 줄을 몰라요. 그래서 인사를 바꾸기도 합니다.‘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땅도 알고, 하늘도 알고!’즉 ‘하늘도 알고 있을 만큼, 땅도 알고 있을 만큼 사랑해!’합니다. 사랑을 하려거든 하늘 앞에, 땅 앞에 부끄럼 없이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백성들을 미리 경고하여 하느님을 거슬러 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도 그런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까닭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지 않아 그 결과로 어떤 화라도 당하게 된다면 에제키엘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경고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위험이 닥쳐오는 것을 미리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경고를 듣고 호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은총이 풍부하더라도 담을 그릇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악인에게 선행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길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윤리도덕의 타락, 배금사상, 사치풍조, 낙태 등등의 죄악을 고치라고 선언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지느냐 들려지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의 메시지를 바르게 들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외쳐야 합니다. 말과 모범으로 충고를 하는 것이 사랑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 소명을 받았습니다.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고는 듣는 사람의 몫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책임도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타이르는 일,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칭찬은 달디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도 알고 땅도 알만큼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땅도 알고 하늘도 알만큼 큰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달지만 독이 되기 쉽고, 충고는 쓰지만 약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하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잠언12,15).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를 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단죄하거나 무안을 주거나 장황한 설교를 하지 않고, 다만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의 인격은 존중해 주셨습니다. 형제적 충고는 바로 단순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모욕을 당하거나 무안을 당했을 때 그를 단둘이 만나 이야기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비난하고 나쁘게 이야기하여 사람들 사이에 그 사람의 평판을 나쁘게 가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라’,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지지해 주고 그의 잘못된 행동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도움을 청하라.’ 그래도 안 되면, “맺고 푸는“권한을 가진 ‘교회의 도움을 받아라.’ 이렇게 형제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묵시록에 보면,“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묵시3,1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히브12,5-6.11). 그러므로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은총입니다. 한 주간 바른 충고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 말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추석명절에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서로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말고 경청할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함부로 충고해서 가슴에 상처를 주는‘멍절’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무엘 하권 12장 을 보면, 나단이 다윗을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에게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단에게 소리쳤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그런 짓을 하고도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그 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습니다.“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그러자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고 주님께서 내리시는 시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결국 죄의 씨는 죽고 밧 세바가 아들을 낳게 되는 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범하여 하느님 눈 밖에 날 수 있으나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죄를 고백하면 그분의 크신 자비가 새 삶을 살도록 안배하십니다. 예언자 나단의 소리를 귀여겨들었던 다윗처럼 우리도 쓴 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알고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공자께서는“나를 착하다고 말하여 주는 사람은 내게 해로운 사람이며 나를 나쁘다고 말하여 주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이슬란드의 격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님아, 님아, 별사람이 별의 별 소리를 다 해도 곧이 듣지 말고 짐작하여 들으소서.”.“사람은 모두가 자신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을 기회만 있으면 타인을 꾸짖으려 한다”(로슈푸코).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말하며, 그것을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의 그림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들이 스스로의 과오를 보며 남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돌아볼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자기 단점을 고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나를 꾸짖으라.”
 
- 청주교구 감곡 매괘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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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양의 자격, 목자의 자격

2014년 가해 9월7일 연중 제23주일

<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복음: 마태오 18,15-20

< 양의 자격, 목자의 자격>

세기 ‘로마의 사도’라 불리는 재속 사제로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한 필립보 네리의 일화입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거룩한 영성으로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녀를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녀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했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 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한 재속 사제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을 벗기라고 하니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시키는 사제를 판단하고는 자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녀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와서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궁금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엔 성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성인이 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마귀에게 속고 있다고 판단하여 신자들과 미사를 하지 못하게 여러 차례 교회가 막았을 때 그 교회의 명에 순명한 것이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님입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이 지상에서 쓸 수 있는 천상 하느님의 권력입니다. 하느님 외에 누가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시면서 하신 말씀과 오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작지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반면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분명히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제자들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 중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다고 하여 그를 인정할 수 없다고 거부할 수 있을까요?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들도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일치하는 모든 제자들은 그 하느님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들은 자신들의 주교로부터 그 권한을 부여받아 죄를 용서해 주고 미사를 거행합니다. 만약 사제들이 주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주교를 몰아내려 한다면 그 사제들은 주교와 일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늘 나라 열쇠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은 하늘 나라 열쇠를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미사를 거행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본당 사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제를 파견한 주교와 교회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 질서가 무너지면 분열 외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는 ‘파문’이란 명목으로 이 권한을 사용하였습니다. 본당 사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교님만 따르면 되지’, 혹은 ‘교황님만 따르면 되지’, 혹은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아버지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니다. 예수님은 파견 받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파견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당 사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교를, 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버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권위를 행사하여 교회가 파문하면 하느님께서 파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조건은 바로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겸손한 순종’입니다. 사실 신자만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도 주교님도 그 위에 순명합니다. 교만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에 죄와 분열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대한 순명,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구원과 일치가 세상에 오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본당에서 주교와 일치하여 성사를 베푸는 사제를 거부하려는 모습이 보이거든 그런 사람이 교회를 분열하는 양의 탈을 쓴 이리라 여기고 그를 조심해야 하고 교회에 알려야합니다. 교회의 본성은 일치이고 하나로 모이는 데 있고 사탄은 교만으로 교회를 갈라놓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을 마태오 복음 장이라는 큰 그림에서 보면 비단 신자들만의 자격을 말씀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당신의 천상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성직자들의 자격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이 시작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 제자가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장은 당신의 제자들, 즉 지금의 성직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인데, 오늘 복음은 그 중간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께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권위를 주시기는 하셨지만 결코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8장 첫 머리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란 소제목으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라는 소제목이 등장합니다.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 하나라도 죄짓게 한다면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달고 깊은 바다 속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또한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손발을 자르고 눈을 빼어 버리는 성직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기보다는 성직자들 또한 죄를 지으면서도 그렇게 손발을 자르거나 눈을 빼어버리지도 않으면서 왜 신자들을 판단하려 드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직자의 자격은 자신이 자격이 있어서 성직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성직자 또한 용서받는 한 사람에 불과하니 겸손해져서 누구도 업신여기지 말고 모든 신자를 자신과 같은 처지로 생각하고 그들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하여 당신께서 착한 목자의 모범으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뿐만 아니라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목숨까지 불사하는 모습을 본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등장하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어쨌거나 교회에 당신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으니 그만한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일단 파문하면 이방 민족처럼 구원에서 제외지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권의의 영향력을 알고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길 잃은 이들을 데려와 무리를 만들어야지 흩어버리는 성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이어지는 말씀이 ‘용서’입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가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교회의 수장이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앞으로 예수님을 배반할 것도 모르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또한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한 사람임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사제들 또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받지 않으면 천국 문턱에도 갈 수 없는 인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해성사 보는 신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죄를 용서하기를 꺼려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성직자 또한 나중에 자신의 죄에 대한 값을 반드시 치르게 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사제들을 미리 판단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그 사람도 자신의 판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정원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 풀, 꽃 하나하나를 정성으로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아침에 정원을 나가 보니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문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떡갈나무야, 무슨 일이 있었니? 도대체 왜 다들 시들어 있지?”

“나무들이 서로 함께 있지 않으려 해요.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는데 열매도 못 맺는 소나무와 함께 있는 것이 싫고, 복숭아나무는 자신처럼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 포도나무와 함께 있는 것을 원치 않으며, 라일락은 자신처럼 향기롭지 못한 나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두 시들어 있는 중에도 유독 생기 있고 아름다운 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꽃은 바로 팬지(Heart-peace)였습니다. 왕은 그 꽃에게 물었습니다.

“팬지(마음의 평화)야, 다들 슬픔 속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데 너는 작은 꽃이 지만 꿋꿋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 짐의 마음이 매우 기쁘구나!”

“네, 고맙습니다. 저는 원래 볼품이 없는 꽃이잖아요, 하지만 왕께서 떡갈나무 나 소나무나 복숭아나무 혹은 라일락을 원하셨다면 저를 뽑아 버리고 그들을 심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왕께서 저를 심으신 것은 저를 보시면서 마음에 평화를 느끼기 위함이란 것도 알지요. 그래서 저는 왕께서 저를 보시면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시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왕은 이후로 더욱 팬지꽃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바로 겸손에서 옵니다. 그 겸손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모든 상황을 잘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양들과 목자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자격은 둘 다 같은 것인데 바로 ‘겸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겸손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신자는 교회를 받아들이고 교회는 신자를 받아들여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의 자격은 ‘겸손’, 그로인한 ‘순명’ 이것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 겸손을 가진 사람만이 참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휴 동안 강론은 쉬겠습니다, 좋은 추석 보내세요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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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늘과 맞는 순리
 
2014년 가해 9월7일 연중 제23주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늘과 맞는 순리

로빈손 크루소 처럼 TV 프로에서 보면 산에 홀로 사는 자연인들이 있군요.
아무도 없는 홀로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사람의 도움은 있게 마련입니다.
공구 그릇 연장 동네 장날 교통수단 등 그런 간접적 도움 말입니다.

암튼 인간은 홀로가 아닌 공동체를 이루어야 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거부하며 사는 건 자연의 순리도 하늘의 뜻도 아니지요.
자연과 함께 살고 나아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늘과 맞는 순리라 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18,19~2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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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한가위 인사 올립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고맙습니다.'

한가위 인사 올립니다.

저는 조용하게 가득 찬 달님을 보며 고향생각도 하고,
세상의 아픈 마음들을 위해서 기도도 하면서 지낼 생각입니다.
물론 오늘은 주일이니 정신없이 움직여야겠지요...

여러분 행복한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아, 마음이 그러시겠지만, 그래도 기쁜 시간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의 소중한 명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부터 9월10일까지 묵상 올리는 것을 꾸욱 참도록 하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조상님들의 애환이 담긴 말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가위처럼 꽉찬 평화가 이 세상에 깃들기를 두 손 모아봅니다.
.....
감사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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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하느님의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9월7일 연중 제23주일(순례19일차),
에제33,7-9 로마13,8-10 마태18,14-20

2014년 가해 9월7일 연중 제23주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가장 모르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사랑'일 것입니다.

어제는 11:30분쯤 순례중 큰 도시, 부르고스에 도착했습니다.
삶을 즐기는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삶을 축제처럼 지내는 스페인 사람들입니다.
경제적 여건도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녁 7시 반에는 800년 된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기존 신자들과 순례객들로 가득한 성당 미사였습니다.

800년이 지나 신자들은 계속 바뀌었겠지만 하느님의 사랑, 미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과 함께 가는 뿌리 깊은 신앙임을 깨닫습니다.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미사는 하나이기에 따라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느님 주신 사랑의 최고의 보편 언어가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평화의 인사 때는 서로 악수하며 일치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순례일행에게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산티아고 순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첫째, 충고하는 사랑입니다.

충고하는 사랑은 어려우나 이 또한 의무입니다.
형제가 악한 길을 버리도록 충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뿐 아니라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사감이 아닌 하느님 말씀에 따른 경고나 충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을 지라도 경고한 그에겐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아무도 충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섬세한 충고의 과정을 알려주십니다.

상대방을 최대한 존중, 배려한 절차에 따른 충고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최선을 다해 충고한 결과가 이렇다면 주님은 그에게 결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악을 저지르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오, 이런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진정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할 때 저절로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셋째,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혼자의 기도도 좋지만 함께의 기도는 더욱 필요합니다.
소통은 사랑이자 생명입니다.
서로간은 물론 하느님과의 소통에 함께 미사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기도는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샘입니다.
서로는 물론 하느님과 소통으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모든 사랑은 결국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체험과 함께 가는 이웃 사랑입니다.
순교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최고의 응답이자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당신 사랑에 응답하여
충고하는 사랑, 악을 짓지 않는 사랑, 기도하는 사랑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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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3주일 
 
2014년 가해 9월7일 연중 제23주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9월의 첫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보내는 시간만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위해서 쓰는 시간만큼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봉성체 다닐 때, 봉사자는 늘 제가 편하도록 신발을 정리해 주곤 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다니니까, 신발을 신기위해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도록 수고 해 주십니다. 작은 일이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바로 그런 배려가 순교자의 열정을 삶 속에서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한 교우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자매님께서 무슨 질문을 하실지 궁금했습니다. 교리에 대한 것인지, 성서에 대한 것인지, 신앙에 대한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님의 질문은 저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신부님도 외로우시죠?’ 혼자 살기 때문에 외로울 거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주일 저녁 모든 미사가 끝나고 텅 빈 성당에 혼자 있는 사제가 외롭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사제가 외로워 보이시나요?

교우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우리들 모두는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병실에 누워계신 형제님도, 혼자되신 저의 어머니도, 뜨거운 여름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는 재수생도,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는 남편을 둔 아내도 모두 외로운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외로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을 칩니다. 혼자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이기에 넘어지는 그 순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바로 외로움과 고독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독을 넘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그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사랑의 실천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의 실천은 신앙인들에게 의무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이웃의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진실한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보초”를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슬기롭게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괭가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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