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시 : 작성일2021-01-08 19:08:36    조회 : 196회    댓글: 0

[강우일 칼럼] 열린 마음

등록 :2020-09-10 17:13수정 :2020-09-11 02:38

제주에선 산에서 마주치며 인사를 해도 멀뚱멀뚱 보며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꼭 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타지방에서 제주에 이주해 온 이들이 공통되게 느끼는 점이 있다. 제주인들의 낯가림 증세다. 제주인들은 타지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왜 그런지 제주인들의 생각을 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이유는 두가지다.
나는 제주에 사는 덕택에 자주 숲길을 걷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숲에선 되도록 잡생각을 털어내고, 걷는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다양한 나무와 풀, 귀에 들어오는 바람소리 새소리에 집중한다. 봄이 되면 이름 모를 온갖 새들이 한껏 청아한 목소리를 자랑하며 짝을 부르다가 새끼를 낳고,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느라 바쁜 날갯짓을 했는데, 8월도 하순쯤 되니 새끼들이 다 자라서 둥지를 떠났는지, 요즘은 새들의 지저귐도 한결 차분하고 조용하다. 대신 곤충들의 계절이 왔다. 한쪽에선 매미들이 신나게 합창하더니 색색의 나비들이 이름 모를 아주 작은 꽃들 위를 날고 있다. 땀 흘리며 숨 가쁘게 언덕길을 오르는데 큰 나비 두마리가 내 앞을 힘차게 날며 춤을 춘다. 커다란 검정 날개 아랫부분에 남색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이를 디자인하신 분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에 머리 숙일 따름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숲속에서 뭔가가 후다닥 소리를 내어 내가 화들짝 놀랐다. 노루 새끼 두마리가 성큼성큼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나뭇잎을 뜯어 먹다가 내 발소리에 놀라 황급히 도망을 치고 있다. 어린 노루 새끼들은 내가 다가가도 멀뚱멀뚱 보는 놈들도 있지만, 조금 자란 녀석들은 경계심이 늘어 사람 소리가 나면 즉시 도망친다. 키가 꽤 자란 조릿대 숲을 껑충껑충 뛰어넘어 달리는 그 동작이 얼마나 빠르고 경쾌한지 부럽게 바라보았다. 어느 육상 선수도 흉내 내기 힘든 속도와 도약이다. 숲은 생명들의 보금자리다.한참 걷다 보면 반대편에서 오는 산행객들과 만난다. 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산에서 지나치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상대가 또 기쁜 어조로 받아주면 마음이 한결 환해진다. 초면이라도 얼굴 마주치며 안녕을 기원하고 선의를 교환하는 일은 이 각박한 세상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회복하는 일 같아, 나는 되도록 인사를 건네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답이 없어 좀 무안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꾸 인사한다.그런데 제주에선 산에서 마주치며 인사를 해도 멀뚱멀뚱 보며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꼭 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타지방에서 제주에 이주해 온 이들이 공통되게 느끼는 점이 있다. 제주인들의 낯가림 증세다. 제주인들은 타지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왜 그런지 제주인들의 생각을 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지역사회가 좁아서 제주인들 사이에서는 면식이 없는 사람도 몇마디만 이야기해보면 족보와 학연 등 연고가 금방 드러나 마음의 문을 쉽게 연다. 그런데 타지 출신은 그런 공통분모가 없어 서먹하게 느낀다.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4·3과 6·25라는 현대사의 비극 때문이다. 4·3은 1948년 4월3일 좌익무장세력이 제주도 경찰지서 여러곳을 습격하여 촉발된 소규모 봉기 사건이었다. 그런데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인 끝에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고 이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일반 주민 3만여명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이때 진압에 동원된 군경은 대부분 타지 출신이다. 군인과 경찰뿐 아니라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새겨진 가해자들은 이승만 정권이 보낸 서북청년단원들이다. 이들은 북한에서 공산당한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탈출하여 좌익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이들이었다. 민간인이지만 이승만의 특명으로 제주에 내려와 빨갱이 청소를 위해 제주도민을 닥치는 대로 폭행, 강간, 고문, 약탈, 살해하였다. 그래서 제주인들의 기억에는 ‘서청’이라면 공권력을 빙자하여 온갖 악을 저지르는 조폭 같은 존재였다.6·25 발발 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분자들이 후방에서 적군에 동조할 가능성을 우려해, 곳곳에서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양민들을 무더기로 즉결처분하였다. 제주 여러 마을에서도 예비검속으로 한날한시에 마을 주민 상당수가 집단처형되었고, 지금도 같은 날에 희생된 조상들을 위해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마을들이 있다. 옛날 제주에는 돌담도 집 안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낮았고 대문도 없었다. 주인이 외출할 때 잠시 출타 중이니 나중에 오라는 표시로 정낭(긴 통나무)을 비스듬히 돌기둥에 걸쳐놓고 나가는 개방적인 삶을 살았다. 이렇게 활짝 열어놓고 살던 이들이 타지인들에게 낯가림하고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은 6·25 전후 많은 타지인이 유입되고 협박과 봉변, 폭행과 약탈에 시달렸기 때문이란다. 그 상처가 너무 깊어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다. 대문 없이도 서로 믿고 안심하며 살던 옛 제주인의 열린 마음이 그립다.요즘 코로나 감염증 때문에 우리 사회가 많이 예민해져 있다. 인간은 불행이나 재앙이 닥치면 제일 가까운 원인부터 대응하려고 한다. 뉴욕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아무 관련 없어도 우선 눈에 띄는 모든 무슬림을 경계하고 혐오했다. 코로나가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을 때 유럽인들은 주변의 중국인은 물론 아시아인들까지 노골적으로 혐오했다. 우리나라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신천지 교회를 통해 급속도로 늘어나자 그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가 빗발쳤다. 한동안 진정 추세였던 코로나 감염증이 광복절 광화문 시위를 주도한 개신교 특정 교회 관련자들을 통해 전국에 급속도로 재확산되자 우리 사회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각종 미디어를 통하여 이들을 포함한 개신교회 전체에 대한 혐오와 비판을 증폭시키고 있다. 가라앉고 있던 코로나 감염증에 이들이 다시 불을 지피고, 바이러스 방역을 방해하여 우리 국민 다수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힌 법적 책임은 피할 수 없겠으나, 어느 특정 종파나 종교인들을 향한 막연한 혐오는 우리 국민 전체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코로나 확진자와 가족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다. 교회도 집회도 간 적이 없는 이들도 감염되는 것이 코로나이고 누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혐오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바이러스다.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다. 출신 지역이 다르고, 학연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출신 집안이 다르지만, 서로의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면 우린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서로 다른 점 때문에 밀어내고 혐오하면 세상은 불행해진다. 가장 다양한 종족과 문화와 언어의 백성이 모여 가장 힘 있는 나라를 만들었던 미국이 최근 관용과 존중을 상실하고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키우면서 사회가 불안해지고 나라가 내리막을 걷고 있는 것 같아, 남의 일 같지 않다.
강우일 ㅣ 베드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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